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지금의 영화계 모습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같다. 나치에 저항했던 학생운동의 얘기, 잉게 숄의 작품 제목을 여기다 갖다 붙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영화계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다들 나름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고, 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란 소리를 종종 하며 살아간다. 한때 국민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4.5회로 전 세계 최고였을 만큼 어마어마한 영화 사랑의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지난 몇 년간만 해도 봉준호가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석권하고 박찬욱이 칸에서 감독상을 타고 등등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세상을 뒤집어 놓은 것은 2020년이었으며 박찬욱이 칸에서 감독상을 탄 것은 2022년, 그러니까 불과 작년, 팬더믹이 여전히 단말마의 절정이었을 때이다. 모두들 K-컬처, K-컬처 얘기를 해대곤 했다. 실로 엊그제의 추억이다. 그런데 단 1년 만에, 그것도 팬더믹이 종료된 지금, 한국 영화계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음에도 죽어가고 있고, 거의 사망 신고 직전인 상태가 됐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에이 설마.’ 아니면 적어도 이런 반응들이다. ‘일시적일 거야. 곧 나아지겠지.’ 그러나 최근 주변 극장
모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였다.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처음 설정은 그렇게 단순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미스터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전설의 킬러였다. 그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날 이런 남자라면 늘 그렇듯이 착한 여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남기고 병으로 죽는다. 그래도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건달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스터 존 윅은 다시 ‘업계’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온갖 음모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존 윅 1·2·3’ 편은 대체로 그런 얘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액션만이 중요해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스터 존 윅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밝혀진다. ‘존 윅 4’는 킬러들의 세계에조차 지금과 같은 ‘극히 계급적인 사회 구조=시스템=강고한 조직의 규율과 원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키거나 혹은 위반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까지 갈고 닦아야 만이 ‘진정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를 텍스트(text)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콘텍스트(context)로 평가할 것이냐의 해묵은 고민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길복순’은 영화 자체만으로는 웰메이드 작품일 수 있으나 영화 바깥의 맥락으로는 평가할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 ‘길복순’의 길복순은 킬러이고 그것도 최고 에이스의 청부살인 업자이다. 그녀는 영
난 사실 블랙핑크가 어떤 친구들인지, 그들의 노래가 어떤 경향성을 지니는지 잘 모른다. 근데 아마도 그건, 내 나이 대의 사람들 대다수가 그럴 것이다. 그냥 BTS급의 세계적 인기를 지니고 있는 팝 그룹쯤으로만 알고 있으며 국내만큼, 아니 국내 이상으로 인기가 높다는 것을 바람풍으로 들은 정도일 것이다. 레이디 가가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레이디 가가가 브래들리 쿠퍼와 나온 2018년 영화 ‘스타 이즈 본’보다는 바브라스트라이잰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나왔던 1976년 영화 ‘스타 탄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스타 이즈 본’은 ‘스타 탄생’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블랙 핑크와 레이기 가가는 뮤지션들이다. 이쪽 방면의 아티스트들은, 영화인들보다 더, 대통령이 됐든 대통령 할아버지가 됐든, 아무리 그들이 부탁한다 한들 자기가 싫으면 안 하는 성향의 인물들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블랙 핑크는 그 좋다는, 아니 단박에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는 UN공연도 마다했다고 한다. 그들의 스타성은 실로 하늘을 찌른다. 오랜 기간 이쪽 업계를 관찰해 온 사람으로서 한미 정상회담에 블랙 핑크 – 레이디 가가 공연이 ‘주요 의제’처럼 됐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지금의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가. 사랑은 모든 걸 다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원제는 코파일럿(Copilot), 부조종사이다. 영화 속 아실리(카난 키리)는 사이드(로저 아자르)의 연인이자 자신의 마음속 부조종사이다. 사이드가 미국 어느 상공에서 조종간을 잡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
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Dear Mr. 브루스 윌리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데일리 신문과 방송, 유튜브로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리뷰어입니다. 당신의 최신작, 아니 거의 마지막 작품 격이 될 것 같은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을 소개하려다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한국은 잘 아시지요? 제 기억에는 1995년엔가 서울 강남 논현동이란 곳에 플래닛 할리우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그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실베스타 스탤론인지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갔다가 당시 용산 미8군도 들렀었지요. 한 방송사 기자였던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었습니다. 아주 오랜 얘기지요. 플래닛 할리우드는 당신 포함, 세 액션 배우가 만든 일종의 테마 레스토랑이었죠. 세계에 체인점을 열며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았고 (지나치게 미국 소비문화가 들어온다는 이유로) 영업실적도 저조해 1년만에 폐점됐습니다. 다소 과한 음식점이기는 했었어요. 영화 얘기로 돌아 가면, 본인께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잘 아시겠지만, 평론 입장에서는 언제부턴가 당신
알리 아바시 감독의 2022년작 ‘성스러운 거미’는 충격 그 자체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 특히 무슬림에 대해 일정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역설적으로 신선할 정도의 소재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란 사회, 특히 테헤란도 아니고 순교자의 땅이란 뜻의 종교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들이 공존하고 있는 데다 그 여성들 16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히잡을 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이란 사회가 종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윤락이라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강직성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한다. 윤락 여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든 남자든, 뉴욕이든 마슈하드든, 예루살렘이든, 서울이든 모두 거리로 내몰린다. 자신이 팔아야 할 상품이 오로지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도덕을 들이대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 거기에 종교적 정화(淨化)란 광신의 악행이 더해지면 그 휘발성은 어디로 번질지 가늠하기 힘들다. ‘성스러운 거미’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