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작은 실수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때, 한 번의 실패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 아무 잘못 없이도 오명을 뒤집어쓸 때 사람은 자신에게서 등 돌린 세상을 견디지 못해 자신이 세상을 등지려 한다. 합리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에서 친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무의미하다. 수렁에 빠진 친구를 돕다 자신까지 빠져들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 이 시대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타인이고,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가려 하는 적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은 고립된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지로 내몰린다. 각박한 세상이 견딜 수 없어진다면 세상을 떠나자. 가볍게 짐을 꾸리고 표를 끊자. 비행기든 버스든 현실에서 가장 먼 곳, 지금까지 가본 적이 없는 곳을 향해 무거운 몸을 싣자. 그리고 그 길에서 사람을 만나자. 홀로 훌훌 떠난 여행길에도 사람은 있다. 여행길에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새로운 곳일수록 가게와 화장실의 위치를 모르고, 종종 길을 잃는다. 가끔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주길 바라고, 소지품을 떨어뜨리고도 모르기 일쑤다. 여행이 길어지면 현지인들이 가는 음식점에도 가고 싶고, 지금 저 사람이 마시는 음료가
봄꽃이 필 정도로 포근한 날씨, 이례적으로 더운 겨울이 순식간에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 평년보다 강력한 한파로 바뀌었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아 3일간 한랭하고 4일간 온화한 날씨가 된다는 삼한사온 현상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이 크다. 더구나 반팔을 꺼내입다가 내복을 껴입는 일주일 사이 기록적인 폭우까지 쏟아졌다. 사상 처음으로 호우특보와 대설특보가 동시에 발효되는 일도 일어났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해 적응하기 힘든 날. 경험과 예측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날씨다. 여행에서 날씨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측 불가의 날씨는 심혈을 기울여 짠 코스를 단숨에 뒤엎어버린다. 고민 끝에 준비한 옷과 소품도 무용지물. 단순히 휴대용 우산을 꺼내지 않을 정도면 괜찮지만 선크림, 선글라스, 민소매의 원피스와 모자, 샌들은 꺼내지도 못하고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와 회색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준비한 시간이 길고 기대가 컸던 여행일수록 실망도 커진다. 이 여행을 위해 들인 정성과 비용이 아까워 기분이 처지고 짜증만 늘어간다. 하지만 모든 계획과 준비와 꿈과 기대와 희망이 전부 무너진 순간, 반짝여야 할 여행지가 최
미국에서 울려 퍼지는 K-팝, 일본을 가득 채운 K-영화, 유럽인이 찾는 K-드라마 촬영지. 전 세계 휩쓴 한류 열풍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진다. 외국인들이 찾는 한국은 대체 어떤 곳일까? 한류란 한국에 관한 것들이 한국 외의 나라에서 인기 있는 현상을 일컫는 신조어로, 한국의 문화가 전 세계로 번지며 나타났다. 처음 아시아에서 드라마를 통해 일어난 물결은 중동, 중남미, 동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북아메리카, 서유럽,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빠르게 흐르며 작은 나라의 기적을 펼치는 중이다. 드라마,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한류는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을 넘어 패션, 화장품, 음식, 언어, 기술, 무술, 산업까지 분야가 확장되고 있다. 장소를 기반으로 문화, 음식, 쇼핑을 포함하는 여행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관광공사는 추천 가볼 만한 곳의 테마를 ‘한류 성지순례’로 정하고, 여행사 대상 공모전을 통해 한류 대표코스 여행상품을 선정하는 등 한류와 여행을 접목하고 있다. ‘BTS 발자취만 5일 동안 함께하기’, ‘K-드라마와 함께하는 코리아 클라쓰’ 등의 한류 대표코스 여행상품은 한류에 푹 빠진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선다. 한국을 방문한
서두르자. 단풍이 왔다. 한국 가을을 대표하는 붉은 잎. 해가 갈수록 짧아지는 가을의 절정. 가을은 화사하기보단 곱고, 빛나기보다는 찬연하다. 생동하는 봄 뒤엔 열정적인 여름이 기다리지만 찬연한 가을 뒤에는 시린 겨울이 이어진다. 가을은 모두 져버린 후 휴식기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풍성한 축제의 시기다. 이 시기 전국은 들썩인다. 서울역과 교대역 등지에서는 가을만큼 울긋불긋한 사람들을 태운 대형버스가 줄지어 전국으로 출발하고, 유명한 단풍명소와 sns 사진 명소는 단풍보다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설악산과 오대산은 물론, 지리산과 내장산을 비롯해 아름답다는 산마다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400여 종의 단풍들이 붉게 빛나며 어우러지는 화담숲과 둘레길을 따라 단풍과 은행나무가 가득한 남한산성은 새벽에 도착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차가 막힌다. 코로나 시대가 지나가고 한류열풍이 부는 지금은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을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도 많다. 사람이 그토록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이 순간, 단풍놀이를 해야 해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만끽해야 하니까. 가을이 유독 짧게 느껴지는 이유는 큰 일교
캠핑의 계절이 돌아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면서 주말마다 짐을 꾸리는 캠퍼들도 늘었다. 코로나 시대 차박과 캠핑은 급속히 증가했고, 자유를 되찾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에 캠핑을 향한 열정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나 떠날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소규모로 타인과 섞이지 않는 언택트 여행을 추구하던 시기,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들은 몸살을 앓았다. 숙박의 추세가 펜션보다 캠핑으로 기울었어도 지역주민들은 캠핑장 설치를 반대하고 곳곳에 차박 금지 현수막을 걸어둔다. 사람이 많이 오면 지역에도 도움이 될 거란 말은 옛말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겨우 찾아내 방문한 아름다운 지역, 내년에도 머무를 수는 없을까? 집 앞 마트에서 식재료를 잔뜩 사서 떠나 야외에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떠들고, 음악을 듣다가 머무른 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 속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차박이나 캠핑이라 생각해왔다면 이제 다시 배워야 한다. 요즘은 캠핑장도 10-11시 이후엔 매너타임으로 조명을 낮추고 말소리와 음악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데 노지라면 어떨까. 아무데나 물이 있는 곳에서 샴푸나 비누를 이용해 씻고, 세제를 사용해
십 년을 만난 연인이 신혼여행 갔다가, 대판 싸우고 돌아와서 파혼했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들려오는 이야기는 의문을 안긴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서로를 속속들이 다 안다 여겼던 그들은 왜 결혼까지 하고도 헤어졌을까?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면, 여행이 문제인 걸까? 여행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긴 시간 함께하는 일이다. 붙어 있는 시간이 긴 만큼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다름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 여행은 액티비티와 체험으로 꽉 찬 짜릿한 경험이고, 어떤 사람에게 여행은 보송보송한 호텔 침구에 몸을 파묻고 룸서비스를 주문해 하루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는 휴식이다. 여행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다른 만큼 서로 사소한 일에서 부딪힐 일도 많아진다. 또 여행은 익숙함을 벗어난 새로움의 세계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짰어도 예상을 벗어난 일이 숱하게 발생한다. 서로에 대한 예의와 거리를 유지하던 세계를 벗어난 곳에서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은 본래 전부 다르다. 하지만 만남의 회수가 잦아지고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서로에게 일정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니 서로를 잘 안다고 여겼던 관계일수록 여행 중 상대의 다른 모습
장마인가, 우기인가. 기후 변화에 의해 장마철이 점점 길어지고, 특히 올해는 예년 장마철의 세 배에 달하는 강우량에 역대급 폭우가 이어지자 500여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다. 여름철 열대·아열대 지역의 나라에서 3~6개월 동안 많은 비가 집중되는 시기 ‘우기’는 이제 한국의 여름을 표현하는 용어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도 식물처럼 환기해주지 않으면 시들해진다. 바이러스와 세균의 활동 증가로 질병에 노출되고 낮은 일조량과 높은 습도로 인한 체내 호르몬 변화로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강해지며 활동량 저하로 무기력감도 짙어진다. 비 오는 날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건강은 위태로워진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드문 이 여름, 어디로 떠나야 할까. 마이크로투어리즘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형 관광지 대신 집에서 1~2시간 거리의 숨은 여행지를 찾는 근거리 여행이다. 여름철 여행지로 가장 인기가 많은 계곡, 바다, 워터파크보다 작은 미술관이나 물놀이장으로 떠나는 방식이다. 마이크로투어리즘을 더 잘게 쪼개 자신만의 ‘소소한 여행’을 시도해보자. 가까운 전시장과 식물원 가기, 서점에서 평소에 읽지 않았던 책 읽기, 오랜만에 극장으로 나가 영화
잊지 못할 여행의 순간을 떠올려보자. 끝없이 펼쳐진 화려한 꽃밭에서 원피스를 팔랑이며 뛰어가는 모습. 감성적인 숙소 풀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장면. 시원한 폭포 앞에서 함께한 이들과 잡은 포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 장면은 1인칭일까, 3인칭일까? 이 시대의 기억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스마트폰에게, 사진에게, 영상에게, 그리고 sns에게. 기억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고, 기억은 혼자 돌아볼 수밖에 없지만 공유한 기록은 타인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기록이 기억의 대체를 넘어 세상을 장악하는 동안 사람들은 순식간에 시선을 잡아챌 수 있는 기록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혹은 누구와 함께였는지보다 중요한 건 여행에서 남긴 한 장의, 혹은 몇 분의 기록이다. 이왕이면 눈부시고 찬란하게, 순식간에 타인의 부러움과 감탄을 끌어낼 수 있게. 그러나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가슴 깊이 남아 불쑥불쑥 떠오르는 여행의 순간은 기록과 다른 방식으로 저장된다. 그 순간은 꽃밭을 걸을 때 귀 옆을 스치던 바람 한 자락일 수도, 비를 피해 들어간 처마 밑에서 맞잡은 손의 따스함일 수도 있
관광지마다 단체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시기, 여행의 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마지막까지 주춤대던 수학여행이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비상사태를 해제한 엔데믹 시대. 국내 대형 여행사가 2019년 이후 3년 6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했다는 소식에 이어 정부의 근로자 휴가 지원사업 확대, 경기도의 비정규직 노동자 휴가비 지원, 지역 관광공사의 숙박상품 기획전 등 반가운 소식이 쏟아진다. 6월은 ‘여행가는 달’로 각종 혜택이 쏟아지고, 매월 마지막 주말은 ‘여행이 있는 주말’로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떠나지 않으면 손해일 듯한 시기, 여행의 시대는 절정으로 달려간다. 억눌렸던 욕구를 해소해주며 흥청망청 쓰기 좋은 시대, 위기에 대한 경계심이 약해진 이 시대에 팬데믹 시대를 잠시 떠올려 보자. 사람 없이 흐드러지던 벚꽃 명소와 봉쇄된 이후 더없이 맑아졌던 수로를. 여행자가 관광지를 점령하는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던 지역들은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묶인 팬데믹 시대는 지구의 회복기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묶여 있을 수 없고, 지구는 더이상 훼손될 수 없다. 위기를 겪지 않고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사람은 아프고 난 뒤 성장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4년 만에 재개되는 축제 소식이 이어지는 봄,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은 늘 붐비고 인천항 크루즈터미널도 해외에서 온 여행자들로 생기를 띈다. 각종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잡히고 단체여행도 활성화된 시기, 개방의 시기다. 본격적인 엔데믹 전환, 입출국 규제 완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 등으로 인해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가 날개를 달았다. 꽉 막혔던 항공편 회복과 더불어 5월 황금연휴 기간엔 베트남, 일본, 태국 등 근거리 해외여행 예약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 여행자들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침체된 경기를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정부는 근로자 1인당 국내 여행비 10만 원을 지원하는 근로자 휴가 지원 사업을 펼치며, 각 지역도 외국인 여행자들을 위한 코스 개발과 국내 여행자들을 위한 워케이션, 예술여행 등 각종 테마를 선보인다. 다양해진 개인의 취향에 맞게 여행 콘셉트도 다채롭다. 이제 통제와 고통의 시기는 다 지나간 듯하나 방심했을 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엔데믹 초기 이태원 참사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방심이 불러온 끔찍한 결과는 이후 밀집이 예상된 축제에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