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조선의 잔다르크’라 불렀다. 45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무정 장군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종로거리로 행군해 들어오던 날 ‘백마탄 여장군’이 왔다며 환영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뺀 모든 사람들이 통일된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설파하던 장군은 48년 10월, 해방된 조국의 부평경찰서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조선의용군 지휘관 김명시의 이야기다. 1907년 마산에서 태어난 김명시 장군은 일찍이 오빠 김형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유학을 마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해 19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선 장군은 1932년 국내잠입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오빠 김형선은 서대문형무소, 동생 김형윤은 부산형무소로 삼남매가 모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장군은 즉시 중국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휘하에 20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싸웠다. 해방 이후 46년 3월 시인 노천명이 김명시 장군을 인터뷰하고 서울신문에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半生記)”라는 제목으로 글을
오래전 법정에 나갔을 때였다. 방청석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음주운전 피의자가 재판 중이었다. 혈중알콜농도 0.24정도로 단속되었다는데 보아하니 워낙 음주운전 경력이 많아 정식재판까지 넘어온 터였다. 판사가 기가 막힌지 물었다. “술을 얼마나 마시면 이 수치가 나옵니까?” 당사자가 대답했다. “기억이 안납니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학제개편 문제로 온 나라를 벌집 쑤셔버린 상태로 만든 박순애교육부장관은 과거 0.251%의 혈중알콜농도로 단속된 전설의 음주운전 경력자이다. 이 분이 더욱 전설이 된 이유는 그 수치에도 불구하고 선고유예라는 선처를 받은 유일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분은 논문표절로 학회로부터 두 차례나 투고금지 처분을 당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로 논란이 끊이지 않자 윤석열 대통령은 “전 정권 인사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나?”며 임명을 강행했다. 이 분은 이렇게 교육부의 수장이 되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보은을 하고팠을까?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학제를 개편하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방안을 신속히 강구하라"는 교지를 내리셨다. 나라는 이렇게 발칵 뒤집어졌다. 나는 이걸두고 “대통령이 아이를 키워봤어야 사안의 심각함을 알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지인의 아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향집으로 내려온다고 기별이 오니 지인 가족들은 비상이 걸렸다. 기숙사가 퇴소 원칙이라니 집에 올 도리밖엔 없는데 아버지는 이불 보따리를 싸매고 운영하는 학원으로 긴급 대피했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매일 신속항원검사를 해야 할 판인데 그것도 무증상자는 유료(3~5만 원)라니 차라리 도망치는 게 최고란다. 지난 26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은 "문재인 정권 5년은 비과학적 정치 방역과 탈원전, 정치가 과학을 압살해 버린 반지성의 시간이었다"며 대정부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어떡하나? 당신들이 주창한 ‘과학 방역’이 218곳의 선별 진료소를 4개만 남기고 폐쇄한 결과 지금의 재확산에 눈부신 기여를 한 꼴이니 말이다. 졸지에 학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지인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뭔 놈의 질병 청장이 ‘국가주도방역이 어렵다’라니 이건 뭐 국민들이 각자도생 하라는 이야긴데 도대체 지금 정부가 있기는 한 거야?” 같은 날 같은 당의 한무경 의원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전기요금 인상의 책임이 전 정부의 탈원전에 있다는데 동의하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장관은 "원전 비중이
기억력의 퇴화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첫 외교무대 데뷔라고 할 수 있을 NATO정상회의 방문에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하긴 대통령 스스로 집단군사동맹기구인 NATO정상회의에서 15분 동안 15개국 정상에게 원전세일즈를 했다고 하니 ‘노룩악수’를 제외하곤 기억할만한 것이 있을리 없다. 대신 스포트라이트는 김건희여사의 1억원대 목걸이와 1600만원대 팔찌 등에 쏠렸다. 박지원 전국정원장은 “영부인의 패션은 국격”이라며 “꿀리지 않고 멋있었다”고 추켜세웠다. 언론은 한술 더 떠 ‘우크라룩’이니 ‘외교패션’이니 하면서 추앙을 더했다. 김정숙여사는 2만원짜리 국산 브로치를 달았다가 숱한 언론들로부터 무슨 돈으로 2억원대 명품을 샀느냐며 난도질을 당했다. 나는 궁금하다. 그때의 기자와 지금의 기자가 같은 호모思피엔스종이 맞는지.. 이건 태세전환 차원이 아니고 기득권동맹의 추악한 이중잣대다. 말이 나온 김에 명품이라면 필리핀 이멜다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남편 마르코스대통령이 20년 동안 7만명을 투옥하고 3200명을 살해하며 철권통치를 휘두르다 86년 피플파워혁명으로 쫓겨날 당시 이멜다여사는 미군용기 두 대를 빌려 자신의 금괴와 보석을 하와이로 실어날랐다. 미처
공기업 6월은 인사철이다. 상반기 퇴직일정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느라 각종 모임마다 작별인사가 이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빠져나가느라 떠들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해 퇴직인사 자리는 분위기가 조금 독특하다. 아무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없다. 떠나는 사람이야 아쉬움에 그렇다 치더라도 분위기메이커가 되어야 할 후배들마저 자뭇 심각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철도공사는 정부 지분매각이라는 이름으로 민영화망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권발 노동시간을 92시간으로 연장하느니 마느니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러니 후배들은 “또 얼마를 싸워야 할지..”라며 떠나는 선배들을 외려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일전에도 적은 바 있지만 철도기관사 입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폭주기관차”라는 말이다. 거대한 중량과 힘을 가진 기관차가 폭주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잘 아는 입장에서 꿈에라도 떠올리기 싫은 말이다. 그런데 두 달된 윤석열 정권을 보노라면 이 끔찍한 단어가 떠오른다. 인플레와 불경기로 허리가 휘는 국민들은 뒷전이고 요직이란 요직은 죄다 검사출신 측근으로 채우며 세간을 경악케 했다. 이 정도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국방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남 함양의 산골에 작은 텃밭을 마련하고 매 주말이면 흙과 씨름한지도 1년이 지났다. 농사라곤 제대로 지어본 적 없는 어중개비가 산촌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기실 부실한 노후준비 탓이 컸다. ‘도시빈민은 있어도 농촌빈민은 없다’는 역설은 제쳐두고라도 퇴직 후 도시생활은 도무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골짜기를 선택한 것도 그나마 땅값이 헐했기 때문이다. 농막 하나 겨우 지어놓고 농사 흉내만 내던 지난 1년, ‘개도 텃세한다’며 걱정하던 원주민들의 텃세는 웬걸 이장님과 동네 분들이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안달인지라 박복한 내게 웬 홍복인가 싶었다. 어쭙잖게 친환경으로 텃밭농사 지어볼 거라 낑낑대다 심는 작물마다 벌레밥을 만들어 보는 동네사람들마다 혀를 차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올해는 작년의 경험을 밑천으로 동네 어르신들에게 덜 부끄러운 밭을 만들어 볼 거라 이른 봄부터 팔을 걷어붙였다. 퇴비랑 석회고토를 뿌리고 밭을 갈며 나름 바빴다. 그런데 맙소사! 겨울부터 눈이 뜸하더니 봄이 되자 비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동네 어르신마다 살면서 이런 지독한 봄 가뭄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할 정도이다. 하늘을 이기는
고백건대, 대선이 끝나고 한참동안 뉴스를 보지 못했다. 괜히 보다간 혈압관리가 되지 않을 듯싶었다. 촛불혁명을 이룩한 나라에서 불과 5년 만에 총풍사건, 차떼기, 국정원댓글사건, 그리고 탄핵까지 국기문란 레퍼토리는 죄다 꿰고 있는 정치집단에게 다시 정권을 넘겼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 원인을 곰곰이 따져보면 검찰이나 언론 탓 이전에 더불어민주당의 자중지란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끊이지 않은 분란과 내부총질이 빚어낸 참사였으니.. 자중지란은 선거패배이후에도 끊이지 않는다. 법무부가 장관직속으로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하겠단다. 한동훈 장관에게 검찰 수사지휘권, 인사권, 감찰권 뿐 만 아니라 모든 고위공무원을 검증하는 정보권한까지 쥐어주겠다는 것이다. 군부독재시절 안기부는 정보기능으로 모든 부처 위에 군림했다. 이제는 법무부가 수사권과 기소권에 정보기능까지 가진 무소불위의 사정기관이 된다. 지금도 법무부 장관 직권으로 상설특검을 발동할 수 있고(민주당은 권한이 있어도 쓴 적이 없으니 그런 권한이 있는 줄도 몰랐다), 경찰청장에 대한 인사검증 조차 법무부 장관이 가지는 판에 경찰과 검찰의 수사권조정도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1991년말 쯤이었을게다. 나는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는 마지막 고속버스 맨 뒤편 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눈앞에 정복경찰 두 명, “신분증 좀 봅시다” 내미는 주민증을 보더니 “주민번호가 어떻게 되요?”하고 물었다. 아뿔싸.. 당시 나는 5공화국의 3년차 수배자였다. 주민증은 우리 친형님의 것이었는데 늘 외우던 주민번호가 갑자기 가물가물했다. 자다 깨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했더니 차에서 내리란다. 경찰이 앞장서고 내가 통로를 뒤따라가는데 누가 부른다. “아저씨, 가방요~” 내 발밑에 두었던 가방을 가져가라는 소리다. 아.. 어떻하나.. 고백컨대, 가방에는 족히 수십명은 조직사건으로 엮고도 남을 만치의 비합법 노동운동조직의 문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잡히는건 문제도 아닌.. 가방만은, 가방만은 숨겨야 했다. 내가 모른채 그냥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도 더 큰 소리로 이어받았다. “가방 가져가래요~”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몇걸음 앞장선 경찰은 무전 하느라 아직 못들은 눈치, 저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곤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제발 닥치라고~ 이러다간 다 죽어”라는
5년의 임기를 거의 마쳐가는 대통령의 얼굴은 부어 보였고 표정은 굳어있었다. 역대급 임기말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대통령은 마지막 대담에서 하얗게 불태우고 재만 남은 신갈나무 그루터기처럼 보였다. 그는 때로는 짙은 아쉬움과 회한을 비치기도 하였고 한편으론 작심한 듯 세간의 비판에 항변하고 깊은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나는 대담을 보면서 분노를 억누르며 말하고 있음직한 대통령의 항변과 우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스스로 아이러니라 언급했던 야당후보로 변신한 검찰총장의 당선! 곧바로 숱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이는 집무실 이전을 둘러싼 기행들, 또 차기정권 각료인선에서 불거지는 목불인견의 잡음들을 지켜보는 대통령의 마음은 어떠할까? 탄핵이란 폐허를 딛고 애써 쌓아 올린 대한민국이란 공든 탑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나를 안타깝게 만든 것은 정작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패인을 묻는 질문에서 “나는 한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는 대목이었다. 아니.. 선거는 힘을 모아 교대로 싸워야 하는 태그매치였다. 야당은 합종연횡으로 태그매치 상대까지 바꿔가며 링에 오르는데 여당은 현직 대통령이 링을 떠나버렸으니 낭
2016년, 대장내시경을 받기 위해 수면유도제를 맞고 잠든 여성 환자 3명을 유사 강간한 의사 양 모 씨가 있었다. 의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저항이 불가능한 환자를 능욕한 파렴치범이었다. 3년 6월의 징역형, 하지만 그의 의사면허는 자격정지 1개월 후 건재했다. 마왕 신해철을 의료과실로 숨지게 한 의사는 수차례의 동종 사망사고 때문에 두 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의사면허를 박탈당하지 않고 의료행위를 계속하다 또 다른 사망사고 때문에 지금도 재판 중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의사면허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사의 자격증이다. 대한민국 검찰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채 세계 제일의 막강 파워를 누린다면, 대한민국 의사는 가장 생명력이 질긴 절대 면허를 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의사면허가 학창 시절 표창장 하나에 날아갔다. 부산대의전원 입학을 취소당하고 곧 의사면허까지 빼앗길게 뻔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양 이야기다. 의사면허가 봄날 목련꽃잎처럼 이렇게 쉬이 떨어지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부산대에 이어 때를 놓칠까 고려대도 나섰다. 한 젊은이의 삶이 통째로 말소당했다. 잔인하고 추악하다. 싸움을 하더라도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건달들의 불문율이라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