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막례 할머니(80세, 가명) 오랜만에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오시는 박막례 할머니 얼굴이 많이 부었다. 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를 장복했을 때 나타나는 문 페이즈, 쿠싱증후군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떨어진 아들네 집에 계시면서 너무 아파서 주사 몇 번 맞으셨단다. 그 주사 또 맞으면 콩팥 다 망가진다고, 침으로 살살 달래보자고 말씀드리고 치료실에 뉘어 드렸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 도박 중독이었다. 돈 내놓으란 말에 새끼들하고 먹고 살 것도 없다고 하면 무섭게 때렸다. 얼굴 맞으면 표시나니까 죽자고 얼굴만 가렸다고 한다. 그러면 몽둥이로 등을 치고 배를 쑤시고 온몸을 깨털 듯이 두들겨 팼다며, 징하디 징한 결혼 생활을 회고했다. 생활비를 벌어올 턱이 있나. 다 팔아먹어 땅뙈기 하나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고, 공장에 가서 열두 시간씩 일하고, 치매기 있는 시어미를 찾으러 천지사방을 헤매고, 그런 와중에 다섯 남매를 거둬 학교를 보냈다. 본인이 못 배운 한을 풀기라도 하듯 아들도 딸도 모두 지성으로 가르쳤다. 그 덕에 오 남매는 모두 잘 자라 다들 제 몫을 하며 산다. 그런 이야기 끝에 할머니는 이렇게 말
한국 바둑이 변두리 취급받던 1989년, 조훈현은 제1기 응씨배에 단기필마로 출전해 우승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뒷일은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 새해 벽두부터 이 말이 떠오른 것은 올해 내 큰아이가 결혼 예정이라서다. 한참 푸릇하던 나이엔 이런저런 희망과 포부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 나이 예순에 남은 바람이라곤, 그저 탈 없이 가장 노릇을 잘 마치는 것뿐이다. 둘째는 아직 학업 중이지만, 큰애 결혼 날짜를 잡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선친께도 얼마간 빚을 갚았다 싶고. 김규항은 최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본질은 자본의 무분별한 확장이며, 노동이 차지하던 최소한의 몫조차 자본이 빼앗고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갖고 집을 사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게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우리 잘못으로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김규항의 말을 빌리자면, 케인스주의와 같은 수정자본주의조차 삼켜버리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확장만 남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내가 큰아이 결혼 날짜를 잡고 나서 안도했듯, 내 아이도 자식을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다시 아비에게 결혼식 날짜를 알릴 때 안도하길 바란
1. 축구는 전쟁이다 한의사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위험한 운동은 축구다. 운동 중에 발목을 삐거나, 무릎을 다치거나,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환자 대부분이 축구광이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충분한 치료나 재활 없이 축구하다 다시 다쳐서, 아주 운동을 접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경험담일 뿐만 아니라 통계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인데, 학원 스포츠가 활성화된 영국에서 40대 이후 부상자가 가장 많은 운동은 축구 클럽 출신이 압도적 1등이었다. 축구하다 전쟁을 하기도 한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월드컵 예선전을 하다 전쟁을 일으켰다. 대략 5000명가량이 죽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 영토 문제와 이민자 문제 등으로 사이가 매우 나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축구하다 졌다고 엘살바도르 여고생이 권총 자살을 하고, 대통령과 축구선수단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해서 복수를 다짐하다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축구라면 가능하다. 위의 두 나라가 중남미 후진국이라 그런 게 아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난동을 부리던 영국 훌리건들이 프랑스 경찰 머리를 벽돌로 내리쳐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일도 있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프
얼마 전 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내가 한의사이기 때문에 현대의학과 맞서는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해했다. 어떻게든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자기 생각을 옹호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가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이유는 본인이 매우 심한 알레르기 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백신 음모론도 약간 믿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신앙인이었기에, 이렇게 물었다. 성경이 기록될 때도 술은 있었잖아요? 예수께서 공생애의 삶을 살 때, 가장 먼저 행한 이적이 물을 포도주, 술로 만든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담배는 어떨까요. 예수님이 생존할 당시에 담배는 확실히 없었죠.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 어떤 종파는 담배와 술을 허락하기도 하고, 어떤 종파는 엄격히 금하기도 해요. 제 생각으론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 문제일 것 같아요. 담배 피운다고 예수님 말씀을 거역하는 건 아니지 않냐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코로나나 메르스, 독감이나 감기 같은 질환을 뭉뚱그려서 호흡기 전염병이라고 불러요. 불편하더라도 마스크를 꼭 써야 하는 이유죠, 이 병은 코로 들어오는 병이거든요. 한의학에선 이런 병을 상한(傷寒)이라고 부릅니다. 차
꽤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함께 생각해볼 만한 일이라 적는다. 지난 9월 15일에 남북한, 중국, 일본에게 중요한 군사외교적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이날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를 강조했다. 미국이 5-아이즈, 오커스 등을 결성하며 동북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하자, 대한민국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중국을 제치고 미국에 붙으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대놓고 을러댄 것. 그 시각, 북한은 유엔 제재 대상인 탄도미사일을 동해로 쐈다. 이틀 전 순항미사일과 달리 탄도미사일은 심각한 군사도발이며, 북한 후견국을 자처하는 중국 체면을 깎는 일이다. 한편, 일본은 30년 만에 육자대 전군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였다. 일본이 점유 중인 센카쿠 열도에 상륙한 중공군을 퇴치하는 가상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보고 힘으로 해볼 테면 해보라는 무력시위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은 SLBM 미사일 발사 시험에 참관했고, 우리 군은 한 번에 성공했다. 대통령이 오전에 중국 외교부장을 접견하고, 오후엔 중국 베이징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는 공격 미사일 발사 자리를 참관한다는 것 역시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한국이
한국 은둔형 외톨이 부모회란 단체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예전에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 내용을 가지고 비대면 화상 강의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우리나라 19세~39세 연령대에서만 37만 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은둔형 외톨이는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빨리 전문가 상담을 지원해서 그분들이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아픔과 자활 방법을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본인과 가족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싶어서 여러 번 고사했다. 그러다 강연을 수락한 것은 ‘선택하지 않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였다. 트롤리 딜레마란 사고 실험이 있다. 지금 전차가 달려오고 있는데, 다섯 명이 선로에 묶여 있다. 그냥 두면 다섯 명 모두 희생될 것이다. 비상 레버를 당기면 열차는 선로를 변경하고, 다섯 명 대신 한 명만 죽는다. 당신은 레버를 당길 것인가, 아니면 당기지 않을 것인가. 어떤 선택이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이 실험은 숱한 변종을 낳았고, 다양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대체로 70%가 넘는 대다수가 레버를 당겨 한 명을 희생시킨다를 선택한다고 한
이재명 후보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다. 한국 대중은 입지전적인 인간보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자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코스는 대개 이렇다. 지역 이름을 딴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 법대나 그에 준하는 대학을 졸업해서 사시나 행시를 본다. 일단 행정부 국장급 이상, 차장검사나 부장판사급 이상으로 산다. 아니면 대학 때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다 구속돼서 징역을 산다. 그러다 지역에 다시 내려와 정당 공천을 받고 당연한 듯 당선된다. 대개 당선된 해는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나 하면서 살고, 나머지 삼 년은 저런 놈이 어떻게 여기를 왔나 하면서 산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몇몇을 빼면 누가 되든 비슷하다. 지역 유지들 모임의 최종판이 국회다. 이재명은 이 라인에서 완벽한 열외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그가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느끼는 대중들의 보수성이다. 두 번째는 노무현 콤플렉스다. 그의 죽음은 노무현과 진보진영을 지지한 지지자들에게 이명박 일당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른바 대깨문이란 지지자들을 만들었는데,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은
1. 조국은 유죄인가 오랫동안 내심 동지라고 믿었던 친구와 대화가 틀어진 것은 조국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검찰과 수구 언론에 의해 난도질당한 게 맞다. 우리 죄를 대신했으니 희생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죄라고 말했다. 친구는 조국이 어떤 실정법을 어겼느냐며 분노했다.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진 까닭은 이삼십 대가 현 정권과 기성세대에게 분노했기 때문인데,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한 결과다. 실제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흙수저들은 집을 살 가능성도 없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지 않으냐. 저 수많은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들을 보라. 그들이 과연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느끼겠는가.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재벌과 정치검찰, 수구 언론을 포함한 기득권층들이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라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집권 여당 아닌가.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차원에서 조국이 유죄란 말이지, 그가 실정법을 어기고 비도덕적인 인물이란 말이 아니라고 답했지만, 친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삼십 대, 더 나아가 대중들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을 정론으로 이끌어야
1. 천하일통 금계국 아침저녁으로 걷는 반석천엔 시방 금계국과 개망초 천국이다. 노란 금계국에 하얀 개망초가 제법 근사한데, 볼 때마다 끌탕 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금계국 때문이다. 북미가 원산지인 이 꽃은 이르면 오월 중순부터 팔월까지 오래도록 노란 꽃을 피운다. 국화과 식물이 대개 그렇듯이 해열 효과가 있고, 부종을 제거하고, 간열을 내리는 데도 쓸 수 있지만, 한약재로 널리 쓰이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이 금계국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는 점. 한반도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며 월동해 다음 해에도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라서일까, 번식력이 강해서 아무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일까, 남도 해안가에서 경기도 천변, 강원도 국도변까지 금계국 천지다. 그야말로 야생화 끝판왕으로 전국을 뒤덮고 있는데, 실은 우리나라 식물 생태계에 큰 위협이다. 일본에선 이미 2006년부터 생태계 위협종으로 지정하고 퇴치 중이며, 계명대 생물학과 김종원 교수는 돼지풀보다 더 위험한 종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처럼 민관에서 아무 곳에나 금계국을 무분별하게 심는 일은 중단해야 한다. 꽃도 화사한 데다 관리할 필요가 없고, 한 번 심기만 하면 잘 자라고 번식력
1. 운동화 사주세요 오래전 일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가난했던 옛날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집은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가르치느라 늘 긴축 모드였다. 그러니 언제나 검정 고무신이었다. 크게 불편한 줄 몰랐는데, 사학년에 올라가자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고무신은 공을 찰 때 불편했다. 찰 때마다 신발이 벗겨졌다. 늦가을 어느 날, 운동화가 너무 갖고 싶었던 나는 면도칼로 뒤축을 동그랗게 오려내고, 오후 내내 바닥에 갈았다. 드디어 닳아서 구멍 난 것처럼 보이자, 의기양양하게 운동화 사주세요. 했는데, 어른 눈으로 그걸 모르겠는가. 집안 망해 먹을 놈으로 찍혀 저녁도 못 얻어먹고 종아리엔 불이 났다. 다음 날 주린 배를 안고 일어나자, 머리맡에 운동화가 있었다. 아까워서 신지도 못하고 며칠 동안 안고 다녔다. 말을 끝내자 후배 몇이 핀잔을 줬다. 에이~ 무슨 6.25 때 이야기를 하고 그래요. 말도 안 돼. 나는 그때 꽤 놀랐다. 불과 몇 년 상관인 후배들인데, 그 일이 믿을 수 없는 옛날이야기라니. 명색이 의료계열이라고 한의대 후배들 집이 꽤 유복했던 걸까. 아무튼 나에겐 실재했던 과거가 누구에겐 믿을 수 없는 구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