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이맘때쯤이면 해마다 언론 미디어에서는 올해의 사건 사고 등을 간추려 한해를 정리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중에는 올해의 단어, 신조어,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통해 한해를 되돌아 본다. 직장과 사회, 국제 관계에서 지난 한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해를 반추하는 MZ세대들의 말을 한번 살펴보자. 중꺽마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을 세 글자로 줄여서 말한 것이다. 중꺽마,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알쏭달쏭 감이 오지 않았다. 그 뜻을 알고 나니 아하 느끼는 순간, ‘올해의 단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말줄임 언어생활이 보편화되었다. 소셜미디어 사용이 확산하고 대중화하면서 짧게 줄여서 말하는 언어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결과다. 우리 대한민국팀은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태극전사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좋은 경기를 축구 팬들과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2골만 잃어도 사기가 꺽일 만하고, 전반전에서는 무려 네 골을 내준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포기하고 소극적일 수 있는데, 우리 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니까. 졌잘싸…
한 소녀가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렸다. 자살이었다.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아이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산 게 아닌 어정쩡한 몸이 되어버린 그와 남겨진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목격했다.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삶의 끝에 이르고자 했겠지만 그 선택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대학을 자퇴하고 꽃동네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낸 적이 있다. 노숙인, 노인, 버려진 아기, 정신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이었는데 특히 호스피스 경험은 혹독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끔찍했다. 새벽녘 개들이 늑대처럼 일제히 울부짖으면 이불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또 어떤 분이 돌아가신 걸까 두려움에 떨었다. 개들이 짖은 날이면 어김없이 병상에서 누군가 사라졌다. 어느 날 일용직 노동자가 입원했는데 공사판에서 발이 못에 찔렸다 했다. 대수롭잖다며 겸연쩍게 웃던 그 아저씨는 다음날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가난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소식-부음(訃音)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인이 된 이에게 당신의 죽음은 어떠했는지 부질없이 묻곤 한다. 천수를 누리다 기력이 쇠하여 돌아가신 분,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분수가 흐르고 계단 위에 한 사람이 정갈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다. 우리의 소녀상을 흡사 닮았다. 단지 이 주인공은 콧수염을 가진 사나이다. 슈바이처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주가 그를 기리기 위해 생 토마 광장에 만든 청동상이다. 알베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행동하는 인간이자 인도적 지원의 파이오니아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Respect de la vie)’을 중시했고 이 윤리를 잊으면 인류문화는 안녕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를 높이 평가한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거룩한 휴머니스트는 1875년 1월 프랑스 동부 카이제르베르(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6개월 된 그를 안고 발령지인 뮌스테르의 귄스바흐(Gunsbach)로 갔다. 거기서 세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선물을 슈바이처는 자연스런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스러워했다. 조숙하고 사려 깊었던 꼬맹이 슈바이처.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감성은 남과 다른 특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이웃에 대한 물질적 도움보다 그를 정신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진정한 자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지지는 그의 인간 존엄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잘 먹고 잘 입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 초라한 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라. (성현) 너희가 자신에게 남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자비로운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거기서 더 나가 너희의 마음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현) 비방과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다. 올바른 재판관은 자신의 이웃을 심판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자신도 심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망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너그러운 사랑으로, 그가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 길을 잃은 나그네가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는 그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환자에게 화를 내는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세네카) 바르게 살라, 화를 내지 말라. 요구하는 자에게는 주어라. 그는 너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세계사의 3대 거짓말을 꼽으라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죠!’, ‘노예해방을 위해 시작한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말을 들고 싶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물에 나온 부분이지 갈릴레이가 실제 한 말이 아니며, ‘빵 없으면 케이크를.....’도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온 글로 앙트와네트의 무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 지어 퍼뜨린 말이다. 미 남북전쟁은 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에 대한 응징에서 시작된, ‘미연방수호’가 목적이었던 전쟁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남부를 이기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뒤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론자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전 생애의 주제는 아니었다. ‘노예 해방’을 위해 생을 던진 이는 따로 있다. 미 육군 대령이었던 존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이 대표적이다. 1856년, 브라운은 캔자스 동부의 포타와타미에의 고립된 오두막에서 다섯 명의 노예제도 찬성론자를 살해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공공연히 ‘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는 이런 서예 글귀가 써 있는 큰 액자가 병동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누가 쓴 것인지 낙관은 없으나 다소 발칙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병든 사람들의 마음에 꽂히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써 있다.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병원의 간호 서비스는 나름 친절하고 세심한 편이다. 서러운 마음을 어루만지라고 평소에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병들어 아프면 흔히들 인생 뭐 별거 없다느니, 이제 모든 걸 다 내려놓으라느니, 앞으로는 몸만 생각하고 건강만 염려하며 살라느니, 일은 다 그만두라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그게 다 빈 말이라는 것을. 영어로 얘기하면 ‘bullshit’, 한 마디로 개소리라는 것을. 자본주의에서는 아프다는 것도 매우 계급적인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플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일에서 은퇴해서, 건강만 생각하며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플 시간이 없다. 노동을 멈출 수가 없다.
빼돌린 정보로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들은 탈세에도 능하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고액·상습체납자는 56,085명으로 총 체납액수는 51조1천억 원에 달한다. 2019년을 기준한 자료인 만큼, 상습체납자의 실제 규모와 체납액은 훨씬 많을 것이다. 지난 3월, 국세청은 암호화폐에 재산을 은닉한 상습 고액체납자 2,416명을 적발하고 체납세금 366억 원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의로 세금을 체납한 사람들에 대해 국세청이 강제 징수한 것일 뿐, 들키지 않고 자행되는 불법탈세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여전하다. 페이퍼컴퍼니, 해외재산은닉, 역외탈세, 편법증여, 차명계좌, 다운계약서 등 수법 또한 다양한데, 최근에는 죽은 사람과 거래한 것처럼 속여 돈을 빼돌리는 신종수법까지 등장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세금은 근로소득을 통해 원천징수한다. 그런 만큼 국민들에게 탈세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끼리끼리 뭉쳐 부정부패를 일삼고 탈세를 조장하는 무리들은 국민을 깔보고 무시한다. 입으로는 섬긴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짐승’(개·돼지)이라고 비웃는다.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끽소리 못하고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그들의 눈에는 ‘호구’로 보일지 모른다. 묻고 싶어지는…
교사는 자기 교실을 챙겨야 해서 다른 교사의 수업을 보거나 들을 기회가 자주 있는 편이 아니다. 학교 안에서 1년에 몇 번 정도 다른 선생님들이 수업하는 걸 보고 소감을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시정표를 조정해서 전체 교원의 수업을 모두가 보게 짜여 있는데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수업 공개는 수업의 흐름 중 1시간만 보여주면 끝이라서 단편적인 수업 내용을 보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에 고양시 교육지원청에서 주관하는 지역 연계 프로젝트 수업 사례 나눔 콘퍼런스가 있었다. 지역 연계 프로젝트는 고양시 교육청이 고양시와 MOU를 맺어서 따온 시 교육 예산 중의 일부를 수업을 재구성하고 싶은 교사들의 신청을 받아서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학급, 학년 단위에서 수업 계획서를 작성해서 예산을 신청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교 예산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업 예산을 사용하면서 지켜야 할 점이 고양시 지역 내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뿐인 것도 또 다른 장점이다. 1년 동안 우리 학년에서 진행해 온 넷볼, 풋살, 등산, 배드민턴 등이 모두 지역 연계 프로젝트 안에서 이루
모든 일에 때가 있음을 알고 행함은 지혜의 근본이라 할 것이다.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이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할 때라 생각한다. 딸을 대동하고 ICBM 발사장에 나타난 김정은 위원장의 행태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내 생각엔 ‘자신들의 핵미사일개발 보유 목적이 자신들과 후계세대들의 생존을 위해 절박한 선택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보인다. 당신들도 자식들을 위해 더 이상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 피차 강 대 강의 대결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공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간절한 절규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30년 세월에 걸쳐 완성한 핵미사일을 제재가 무서워서 포기할 북한이 아님은 북한체제를 조금만 이해해도 잘 알 수가 있다. 핵포기를 전제로 한‘담대한 구상’을 얘기하는 남한정부가 북한의 입장에선 한심함을 넘어 야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이념과 성격이 다른 정부라 해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약속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자는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남한의 행동에 대해, 우리로서는 공갈협박으로 보이지만 자신들의 의지를 과시하는 행동이 바로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이라 나는 확신한다. 그냥 무시하면서 철
인간의 육체적 생명은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듯 보이지만, 잘 관찰하면 그야말로 변화의 연속이다. 그러나 극히 어린 시절에 일어나는 그 변화의 시작과 죽음을 동반하는 그 끝은 인간의 관찰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예수) 생명은 끊임없이 그 겉모습을 바꾼다. 사물의 겉모습밖에 보지 않는 무지몽매한 인간만이 일정한 형태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사라지면 생명 자체가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실은, 일정한 형태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애벌레가 사라지고 새롭게 나비가 되어 나타난다. 어린아이가 사라지고 대신 청년이 나타난다. 동물적인 인간이 사라지고 새롭게 정신적인 인간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류시 말로리) 도토리는 가지, 잎, 줄기, 뿌리, 즉 모든 외형, 모든 고유한 형태를 잃었지만, 그 속에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생산력을 간직한 상수리나무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