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때 장만(張晩)의 시조를 만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바다의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험한 산길에서 다시 고생을 한 어느 한국인의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서 배·말 다 집어치우고 흙 속에서 호미로
경기도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불법행위 적발 건수가 전국 최다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원상복구를 강제할 수 있는 근절책 등이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그린벨트 훼손은 개발 호재를 기대한 투기 성행에다가 선거로 뽑히는 자치단체장 등 정치인들이 표심 이탈에 대한 우려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약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무엇보다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관련 법·규정들을 대폭 손질해 단속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다. 2017년 1월~2022년 6월까지 최근 5년여간 전국의 개발제한구역 불법행위 총 적발 건수는 3만631건이다. 이 중 경기도가 1만8348건으로 전체의 59.9%를 차지해 가장 많다. 경기도에서는 2017년 1974건, 2021년 3794건이 각각 적발됐다. 5년 사이에 2배가량 증가한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그린벨트가 설정된 전국 14개 광역 지자체로부터 제출받은 ‘개발제한구역 불법 관리현황’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경기도의 불법행위에 대한 이행강제금 부과액과 원상복구 이행률은 오히려 대폭 줄어들었다. 이행강제금 부과액은 2021년 184억여 원(1485건)으로서 2017년…
1.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어린 나이라도 자잘한 추억들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런데도 몇 가지 파편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그중 하나. D시 달성동 329번지, 한옥 집 대청마루. 어느 봄날의 오전이었을 게다. 동쪽으로 네모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이 마루 저쪽까지 길쭉하니 하얀색 꼬리를 빼물고 있었으니. 양철 바케스 안에서 자라 서너 마리가 숨을 들이마시느라 뻐끔대며 물 위로 코를 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참동안 아팠다가 회복된 나를 위해 자라를 잡았던 모양이다. 어여 마셔라, 크고 하얀 사기 대접에 넘치는 생피의 비릿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걸 다 마셨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을 아니까. 가톨릭계 사립인 H초등학교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날도 기억이 난다. 바람이 무척 매서운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성당 건물 한 켠 양지바른 곳에서 손을 잡고 기다리다가 잘못된 ‘은행알’ 골랐다는 최종 발표에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입학한 동네 근처 S초등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핀을 꽃아 늘어 맨 손수건이 조금 비뚤어졌던가 보다. 어머니는 군청색 한복 두루마기 자락을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진리의 높은 계시 중에서 지금은 이미 시대에 뒤처져버린 가장 낡은 것만 받아들여, 간명하고 솔직하고 자주적인 모든 사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대부분을 기를 쓰며 반대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소로) 인류의 종교적 의식은 결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순수해져 간다. 만약 누군가가 고정된 관념을 고집하면, 설사 그것이 옳은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미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기둥에 비끄러매는 사람과 같다. 지금에 있어 진리라 하더라도, 더 높은 단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면 미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해한 미신의 하나는 세계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창조주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창조주의 신을 생각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필요도 없으며(중국인과 인도인들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다), 또 창조주 또는 주재자로서의 신의 관념은 그리스도교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 영혼으로서의 신, 사랑으로서의 신의 관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냉혹하며 고뇌와 악을 허용함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혼으로서의 신은 고뇌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 줄 글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얻고 잃음의 반복이지만,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시가 위로를 건넨다. 점점이 붉어지는 단풍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웃고 있을 사람을 생각한다. 수고로이 얻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10월의 단풍을 아니 보고도 가을을 보냈다 할 수 없다. 쫓기는 원고에 매달려 풍경을 잃어버릴 즘 오랜만에 생각나는 지인에게 살뜰한 전화를 건네면 이미 좋은 곳을 찾아 휴일을 즐기고 있다. 아직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공손할 일이다. 감질 거리는 생각한 줄 쓰려고 무수한 날이 필요하겠지만 잊는 것도 순간이다. 떠나려고 단풍은 저리도 몸서리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부디 아프지 마라. 아무도 모르게 떠나면 쉽게 잊힌다.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을 떠난 때가 어제 같은데, 건강식만 골라먹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야지. 주위를 둘러보면 아픈 사람이 꽤 많다. 쌀이 없어서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오니 고질적인 위병이 사라졌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병으로…
정부의 ‘여성가족부(여가부) 폐지’ 방침에 대한 반발 민심이 심상치 않다. 전 정부에서 여가부가 정치적 시빗거리로 등장한 일은 뼈아픈 대목이지만, 대선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폐지론에 갇혀서 선택지를 좁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윤 대통령도 “여성·가족·아동·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만큼 대선 초반의 최초 공약대로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극심해지는 젠더 갈등을 끝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조직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뼈대로 하는 정부 조직개편안을 밝히자 야당과 여성단체 등을 필두로 반대 목소리가 거칠게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론으로 개편안을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반기를 들고 있다. 전국 195개 여성·시민·노동단체가 공동 주최한 집회에서는 정부가 여가부 폐지를 밀어붙이면 ‘정권 퇴진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지난 정권에서 여가부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자진하여 정쟁거리가 된 허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권 인사들의 잇따른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해괴한 용어를 창조해 2차 가해를…
1. 그의 이야기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렸어요. 핏기 없이 희고 창백한 얼굴이었죠. 신비로웠어요." 일본 농부라 자신을 소개한 그는 그녀를 회상했다. 네팔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에게 묘한 떨림을 느꼈다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작된 한일 간 운명적 러브스토리였다. 차마 고백할 용기가 없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뜻밖에 그녀였다. 여자는 일본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불러주는 안부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떨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밤을 붙잡으며 새벽녘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 그녀는 사라졌다. 이른 아침 체크 아웃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고 했다. 절망감에 그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 다녔다. 강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발견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몰려든 네팔 꼬마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했다. 그는 내게 이국땅에서 운명처럼 만난 신비한 사랑에 대해 비밀을 속삭이듯 털어놓곤 다시
‘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