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은 죄다 길이 있다. 흘러야 길이다. 물이 그렇고 숨이 그렇고 피가 그렇다. 바람도, 해와 달도 흐르는 길이 있다. 흐름은 길이 품고 태어난 숙명이다. 형체가 있든 없든, 만져지든 만질 수 없든, 흐르는 것들은 흐르는 것들끼리 길을 따라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게 있었던가. 나는 흐르지 않는 길과 마주친 적이 없다. 길이란 길은 흘러야 산다. 생명도 그와 같아서, 길을 따라 생명의 씨앗을 흘려보낸다. 뿌리를 내린 것들은 뿌리 아래서 물과 양분을 뽑아 올려 줄기와 이파리로 실어 나른다. 손과 코와 입을 가진 것들은 쥐고 맡고 뜯은 것을 씹어 삼켜 허파와 위와 심장과 뇌로 실어 나른다. 그렇게 실어 나른 숨결과 온기가 생명을 살려낸다.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 막힌 것도 길일까? 묻는 건 어리석다. 막힘이라는 말 어디에도 흐름은 없다. 막힘이 길어지면 기필코 끊어지고 터진다. 그것이 길이 품은 고유의 성깔이다. 남과 북을 잇던 길도 끊어지고 말았다. 철길도 찻길도 끊어졌다. 땅으로 난 길이 그 지경인데 하늘길과 바닷길은 오죽할까. 꽉 막힌 길을 넘나드는 건 삐라와 오물 풍선뿐이다. 보내고 받는 건 반가움이라야 온당한데,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꼽히는 볼로냐(Bologna) 대학이 1088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936년이 된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대학은 꾸준히 늘어나 2023년 기준으로 2만 6000여 개 교나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가운데 좋은 대학도 많고, 좋다고 하는 대학 또한 많다. 여기서 ‘좋은 대학’이란 평범한 고졸 출신이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학생들(고졸 검정고시 합격자)을 선발하여 대학에서 열심히 잘 가르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졸업시키는 연금술을 구현하는 대학을 말한다. 이 연금술은 중세기에 납을 금(gold)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뜻한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그저 그런 학생들을 받아들여 바람직한 교육을 통해 유능한 인재(人材)로 변모시켜 내보내는 대학을 의미한다. 반면에 ‘좋다고 하는 대학’은 명문대학이다. 명문대학은 이미 세상에 잘 알려져 지원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자녀가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대학이다. 그런데 명문대학에 입학한 인재(人才)들이 범재(凡才)가 되어 대학 문을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두고 연금술과 배치되는 ‘역연금술’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좋다고 하는 대학이면서 좋은 대학도 많다. 대체로 좋다고 하
'수박 겉핥기'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단물이 있는 속이 아닌 껍질만 핥는다는 뜻이다. 사물의 속 내용을 모르고 겉만 건드리는 일을 비유해 아무런 소득이 없는 행위를 일컫는다. 수박의 겉을 핥는다는 행동을 떠올려보면 어리석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과연 현실에서 수박의 겉을 핥을, 실수를 할 일이 있나 싶다. 그만큼 이 속담은 말도 안 되는 실수나 비생산적인 노력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도 가끔 이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필자는 배우로서 공연 준비를 할 때, 종종 의도치 않게 수박의 겉을 핥을 때가 있다. 본질을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정작 본인은 자신이 '수박의 속을 핥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외부에서 지적하면, 내가 겉만 핥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종 혹은 꽤 자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주 쉬운 해결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주변의 도움을 받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보면 내가 왜 그랬
“축제에 웬 고사? 안 어울리게...” 축제의 개막, ‘고사’ 순서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한복입고 나와 절과 술잔 올리더라. 이렇게 의아해 하는 축은 아무래도 젊은 층이다. 이태원 참사의 그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게 축제 아니냐, 그런데 왜? 멋진 파티, 잔치 분위기 축제에 꿀꿀하게 돼지머리에 절을 하다니, 대충 이런 볼멘소리다. 카니발(carnival) 피트(fete) 피에스타(fiesta) 피스트(feast) 페스티벌(festival) 주빌리(jubilee) 등 멋지게 들리는 외국 이름의 잔치라야지, 웬 고사야. 축제는 축제다워야지... 설레고 좋은 일, 상서로운 느낌이나 ‘노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그런 느낌 불렀겠다. 그런데, 말의 뜻을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만난다. 어떤 게 ‘축제다운 것’인지 그 본디를 볼 일이다. 문자(글자)에 그 뜻이 있다. 외국 산(産) 저 ‘파티’들의 의미도 다시 볼 일이다. 저 축제의 이름들은 여러 지역에서 자신들의 신(神)에게 뭔가를 바라는 기원(祈願)의 이름들이다. 세상의 어떤 유명한 신도 처음에는 자기 동네 특유의 (토속적인) 기원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더러는 무속(巫俗)이라고, 좀 비하해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에 대해 여야가 국정감사에서 다시 충돌했다. 야당은 류 위원장이 가족과 지인 등 사적 이해관계자를 동원해 특정 언론사를 심의하도록 민원을 넣게 시켰다는 ‘청부 민원’ 의혹을 제기한 상태이다. 가짜뉴스 근절 소동이 한창이던 2023년 9월 방심위에 접수된 민원에서 류 위원장의 동생, 아들, 조카, 처제 등 가족과 주변인, 친인척 등이 1건에서 4건씩 민원을 넣었고, 민원의 내용도 ‘복붙’이거나 거의 유사하기까지 했다. 반면 류 위원장은 사무처 직원이 민원인들의 정보를 유출했다며 ‘방심위 개인정보유출’을 제기하고 있다. 류 위원장은 국정감사에서 자기 주변인의 민원 접수 사실을 모른다거나 몰랐다고 답했다. 여당은 민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류 위원장을 거들었다. 오히려 민원인들의 개인정보가 방심위 내부 직원에 의해 유출된 것으로 수사기관의 엄정한 조사를 요청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방심위의 민원 사주 의혹은 지난해 12월 국민권익위원회에 공익 신고가 접수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권익위는 통상 신고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 결론을 내야 하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류 위원장에 대한 조사 기간을 연장하더니 6개월이 넘
지난 5월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DS) 담당 부회장을 전격 경질하고 새로운 사령탑으로 전영현 부회장을 임명했다. 10월 8일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위기에 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삼성 반도체가 처한 위기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분야에서 지난 30년간 1위 자리를 고수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반도체 산업에서 인공지능(AI)의 변화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며, 글로벌 빅테크 업체들은 반도체 칩을 스스로 설계하고 제조는 위탁생산업체에 맡기고 있다. 삼성 반도체가 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에 선두주자로 TSMC와 협력하여 엔비디아에 독점적으로 납품하고 있다. 삼성 반도체는 2019년 HBM 전담개발팀을 해체하여 현재 SK하이닉스에 고전하고 있다. 2019년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를 따라잡겠다”라고 선언하고 엄청난 투자를 해왔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파운드리는 메모리 시장과 달리, 위탁생산체제이다. 고객이 주문하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다. 구글도 5세대 AP칩 생산을…
얼마 전 열린 부산국제영화제가 역사극 ‘전, 란’을 개막작으로 내세운 것은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다소 의미심장한 이야기일 수 있다. ‘전, 란’은 조선 선조 때의 이야기로 일본의 침략, 곧 임진왜란 당시 내우외환의 혼란스런 정변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그러나 왜군(倭軍)과의 전쟁보다는 선조라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도덕 그를 타파하려는 대동계의 반란, 그 조직을 만든 정여립의 사상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정여립의 대동주의는 일종의 생시몽 식 사회주의로 흔히들 몽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운다. 생시몽 주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왔지만 정여립의 사상은 16세기 조선에서 나왔다 더 빠르다. 노비와 양반이 하나되는 세상,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정여립은 당연히 반역죄로 참수됐으며 영화 ‘전,란’의 오프닝 씬은 그의 목에 칼이 꽂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여립은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신전마을에서 목이 잘렸다. 영화 ‘전,란’의 원래 제목은 ‘전쟁과 반란’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너무 직설적이라 판단했을 것이고 그래서 줄인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에 대한 반역, 임금에 대한 모반, 위정자들을 향한 혁명을 다소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제작은 블랙리스트 감독 출
1년.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학살을 본격화한 지 1년이 흘렀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미국산 무기에 아이들의 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백기를 든 민간인이 즉결 처형당하는 것을 보았다. 점령군의 대피 명령에 따른 피난민의 행렬이 폭격당하는 것을 보았다. 병원에서,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점령군이 지정한 ‘안전 구역’의 막사에서, 피난민들이 산 채로 불태워지고, 환자 곁을 지키던 의료진이, 진상을 알리던 기자가, 구호품을 전달하던 유엔 직원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절멸 수용소’로 만들어, 총인구의 1퍼센트를 체계적으로 말살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포화 속에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구호품을 기다리다 살해되고 구호품에 깔려 살해되었다. 작년 10월 7일 직후 이스라엘은 16년 동안 이어온 가자지구 봉쇄를 전면화했고, 가자지구 주민들 ‘인간 동물’이라 부르며 물과 음식, 의약품, 전기, 연료의 반입을 차단했다. 혼자 살아남아 마취제 없이 절단 수술을 받은 아동들은 돌아갈 집이 없고, 이스라엘의 강제 대피 명령에 따라 이동할 수 없는 환자, 장애인
10월의 한낮에 길을 걷는다. 해를 마주하고 풀밭 길을 걸으니 앞산 가을구름 한가롭고 햇살은 다사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콧노래로 불러본다. 사랑하는 딸이 입시를 앞두고 학원에서 공부 할 때다. 나는 퇴근해 딸을 응원할 겸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스케치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해 가을 10월이었다. 학원 밖 팔달로 네거리 악기점에서는 축음기에 연결된 대형 스피커를 가게 문 밖으로 내놓고서 욕심껏 틀어대고 있었다. 감정이 무뎌질 나이지만 껴안고 사는 슬픔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에서, ‘나를 울려요’라는 가사가 가슴에 각인되면서 눈물 대신 꿈을 위한 슬픈 에너지가 가슴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역 감정 같은 것을 느꼈다. 베토벤은 찬물을 머리에 부어가면서 머리를 일깨워 ‘걸작의 숲’을 완성하고 ‘고난을 통해서 환희로’의 교향곡(운명)을 작곡했다고 한다. 쓸데없이 슬프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릴 일이 아니다.…
‘콜포비아’라는 말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흔히 사용된다. 콜포비아는 타인과 전화하는 것에 대해 긴장, 불안, 두려움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구인구직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지난달 초 Z세대 765명을 대상으로 ‘소통 방식’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0.8%가 콜포비아 증상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같은 주제로 조사했던 2022년에 30.0%였던 수치를 감안하면 매우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응답자의 5명 중 2명은 콜포비아를 겪고 있다는 뜻이다. 콜포비아의 흔한 증상으로는 ‘전화 받기 전 높은 긴장감·불안(68.3%)’, ‘전화가 오면 시간을 끌거나 받지 않음(54.2%)’, ‘전화 통화시 할 말이나 했던 말을 크게 걱정(48.7%)’, ‘통화 시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등의 신체 증상(23.4%)’ 등이 있었다. 또한, 가장 선호하는 소통 방식으로 ‘문자·메시지 앱 등 텍스트’가 73.9%였으며, 전화통화는 11.4%로 나타났다. 이렇듯 점점 대면이나 전화로 하는 직접적인 소통보다 문자메시지, SNS 등을 활용한 소통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람 간의 소통은 감정이 잘 전달되어야 원활할 수 있는데, 문자메시지는 그런 면에서 다소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