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 않습니다. 아닌 건 어떻게 해도 아닙니다. 넘나들기 쉽도록 설치한 사거리 신호등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옮겨 가도 무방한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이 아닙니다. 선택 장애 손님을 위한 메뉴, 이를테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름과 틀림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둘로 가르는 ‘낮’과 ‘밤’처럼 별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그릇’으로 좁히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밥그릇도 국그릇도 모두 그릇입니다. 다만 그릇 안에 담는 음식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이름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국적과 성별이 다르고, 말투와 성격이 다릅니다. 차이(差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게 차별(差別)입니다. 출신과 학벌과 성(性)과 인종에 대한 차별이 거기에서 싹텄습니다. 다름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틀림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해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하면 각양각색의 섬네일(thumbnail)이 시선을 끌며 클릭을 유도한다. 막상 섬네일을 클릭하면 기대하는 내용과는 다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면 가짜뉴스(fake news)나 거짓 내용으로 클릭 장사한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속이는 사람도 속임 당하는 사람도 익숙해져 별다른 느낌도 없다. 이미 가짜나 거짓에 대한 불감증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異民族)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민족’이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매스컴에서는 가짜뉴스가 판치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미디어(media)가 오만불손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반국가적 세력으로 몰려 오히려 매도당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국민은 언론도 정부 당국도 신뢰(trust)하지 않는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데,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치려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클 수밖에 없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不信風潮)가 난무한 작금을 살아가야 하기에 현대인이 갖춰야 하는 주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정직’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정직에 대한 교육부터가 문제투성이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그럴듯하게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고 합
‘5월 광주’를 아는 어떤 이가 뉴스를 보았다. 찬찬히 세수했다. 이게 마지막 재계(齋戒)는 아닐까. 계엄이란 이름의 군사반란을 또 보는구나. 비장한 길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여, 선배가 앞장설 기회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후,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난다. 여의도의 인파, 젊은 여성들 한 동아리가 “와, 아저씨도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응원봉 흔들어 환호했다. 그렇지, 그들(몫)의 세상이지. 마음으로 축원했다. 상황의 그런 변화는 진화(進化)일 터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계엄 전에 뽑았다는데 우연이었나? 도량(跳梁)과 발호(跋扈)를 묶은 1위작 도량발호는 황당한 저들의 행태를 제대로 찍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석서위려(碩鼠危旅)가 뒤를 이었다. 셋 다 상황에 딱 맞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어려운 밤’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했다, 계엄 후에 선정 했다면 1위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뽑히지 않았을까 하는 발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비통과 무력감은 도량발호를 넘어서는 특선작이 될 수도 있었으려니. ‘저 몇 사람의 도량발호’보다는, ‘나(우리)의 전전반측의 총량’은 얼마나 참혹한가. 작년엔 ‘이끗 보더니 의리 잊더라’는 견리망의(
12월 중순, 한 해의 끝자락이다. ‘벌써?’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한 해가 지나간다는 사실은 늘 신비롭다. 언뜻 보면 시간은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흐르는 듯하지만, 실은 다양한 사건과 감정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내 머릿속 구석구석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이맘때면 나는 휴대폰의 달력과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아무 도움 없이 올해를 떠올려본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올해 내가 했던 공연, 촬영, 오디션, 그리고 몇몇 긴박했던 순간들. 삶의 주요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하지만 달력과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내 기억의 빈칸이 채워진다. 스쳐 지나갔던 만남들, 여행에서의 사소한 순간들, 지인의 결혼식, 공연 관람, 그리고 무심코 적어둔 나만의 다짐과 고민들. 적어두지 않았더라면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 나의 관심의 방향이 일에 많이 치우쳐져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살아온 한 해를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 뭔가 놓치고 있었던 내 삶의 조각들
겨울철 집안의 큰 행사 중 하나가 김장이다. 겨울철에는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어려워 초겨울에 김치를 많이 담가서 저장하는 풍습으로 지금은 규모가 작아졌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겨울철 숙제처럼 하고 있다. 어렸을 적 김장은 우리에게 놀이였다. 어른들이 일하시는 옆에서 노란 배춧잎에 매콤한 속을 싸주시면 입에 묻혀가며 하염없이 집어 먹다 보면 얼얼한 입을 씻어내기 위해 물 한 주전자를 마셨던 기억과 무의 파란 부분을 잘라주시면 사각사각 씹어먹으면 옆에서 할머니가 ‘무를 먹고 트림을 하지 않으면 산삼 먹은 것보다 낫다’라는 말씀에 어린아이였지만 산삼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나오는 트림을 입을 꼭 막고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로 참던 모습이 새삼스럽다. 예전에 맛있는 겨울 무를 동삼이라고 해서 인삼에 비교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겨울에 무를 가지고 음식을 하면 꼭 진한 연두색 부분부터 잘라 입에 넣는다. 겨울철 대표 채소인 무는 아삭한 식감과 시원한 맛이 특징으로 다양한 요리에 활용한다. 겨울철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 중에 소화를 돕는 효소와 면역력을 높이는 성분이 풍부하며, 비타민C가 풍부해 겨울철 감기 예방과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무의 비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12월 14일 가결됐다. 1차 탄핵안 폐기 후 김용현 전 국방장관, 조지호 전 경찰청장 등 내란 피의자들의 자백으로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표결 이틀 전 윤 대통령의 ‘12‧12 대국민 담화’ 역시 가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탄핵 직전에 대통령이 당당히,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던 의지는 결연하게 읽히기는커녕 아직도 자기 잘못을 모른다는 자과부지(自過不知)라 할 만했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은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가짜뉴스인가 의심이 들던 것도 잠시였다. 속보로 확인한 비상계엄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제정신인가와 같은 탄식과 화를 불렀다. 경찰의 국회 진입 차단 상황과 헬기에서 내린 중무장한 군인들이 보좌관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실탄을 실은 장갑차를 막아선 맨몸의 시민들 안위가 걱정됐다. 새벽 1시,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절차에 따라 가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릴 때’라는 것을 확신했다. 윤 대통령은 3일 긴급담화에서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 그리고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
연말연시.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춥고 외로움을 느끼는 시기이다. 그들이 품위 있고 유쾌한 한때를 보내도록 특별한 손길이 필요하다. 이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 있다. 아르망 마르키제(Armand Marquiset)다. 이 프랑스인은 20세기 사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동원해 크리스마스시즌에 노인들이나 취약 계층이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가난한 이들의 작은 형제회(Petits Frères des Pauvres)를 설립했다. 이 ‘작은 형제회’는 크리스마스이브 연대 행사를 조직할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아 연중 내내 노인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꾸준한 명성을 쌓아 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활발히 진행된 홍보 캠페인은 당시 프랑스의 아파트와 주택, 도시와 시골의 호스피스에 숨어 있는 소리 없는 고통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마르키제는 수도원을 자주 방문하는 신비주의자로 예술을 즐기는 귀족이었다. 이런 그가 소외계층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남작 부인이었던 그의 할머니는 1차 세계대전에서 남편과 외아들을 잃었다. 동병상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무일푼이 된…
영화는 망했다. 최소한 극장용 영화는 망했다. 쿠테타가 일어나는 사회에서, 내란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그것이 비록 조기에 진압됐다 하더라도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차대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그리고 매일처럼 헤드라인으로 누구누구가 공조본(공동조사본부)에 소환되고 구속됐다는 기사가 뜨는 사회에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없다. 많을 수가 없다. 고로 한국의 영화는 망했다. 극장도 망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나는 내년 3월말까지 영화의 흥행은 기대하기가 난망인 상황이다. 어떻게 키운 영화산업인가. 1년에 2억명 정도가 극장을 가고 국민 1인 연평균 관람회수가 4~5회인 나라가 아니었던가. 이런 시장을 쿠테타 시도로 한방에 날려 버렸다. 12월 4일에 개봉했던 영화 ‘대가족’은 3일 밤의 내란 소요 사태로 피폭을 당하면서 17일 현재 20만 여명에 그치고 있다. 손익분기점은 260만명이다. 92억원을 들인 영화이다. 투자배급사인 롯데, 영화를 만든 양우석 감독 모두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다. 송강호 주연의 ‘1승’ 역시 30만에 채 미치지 못하고 있다. BEP는 180만명이다. 턱도 안된다. 그나나 곽경택 감독이
말은 달려보아야 그 힘을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고전의 교훈이요. 우리들 체험적 삶의 진실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다. 한 문장으로 쉽게 표현한다면 ‘삶 = 인내’라는 등식이다. 지금껏 내 삶은 작은 물웅덩이 하나쯤 될 만한 눈물을 흘리는 길이었다. 그래서 인생은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며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살이를 할 결단도 버팀의 의지와 능력도 부족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제 각각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다.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는 것. 내가 살아오면서 공부한 인문학과 철학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진정한 철학은 인문학과 공존하게 된다. 인문학은 자유와 평등한 인간애를 생각하는 휴머니즘적 삶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학문이요 공부이다. 그런 가운데 인간으로서 도리를 생각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 윗대 조상들은 어떻게 웃음과 친해질 수 있었으며 허허 허! 하는 마음가짐으로 삶의 무게를 지탱해 왔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또한 헛웃음이든 가짜 미소든 지성적인 유머와 해학이
현재 우리 사회는 혼돈에 빠져있다. 국가와 국민 앞에 잘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연일 뉴스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럼증이 지속된다. 국민을 혼란하게 만드는 위정자들의 모습에 심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이지만 저 멀리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을 다시 한번 세계에 각인시킨 한강 작가의 아름다운 모습과 추운 날씨지만 저마다 개성 있는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와 우리나라가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외침 덕에 우리는 비상계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결론으로 치닫고 있는 정국 속에서 과거의 경험상 우리는 이제까지의 잘잘못을 따지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변명을 난발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어지러운 순간이 오기까지 위정자들에게는 사과의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사과한 경우는 기억나지 않는다. 개탄스럽다. 이런 마음을 담아 사과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국어사전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의미의 사과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소통 방법이다. 성숙한 사과를 통해 실수를 인정하고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