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더 이상 어둠으로 생각되지 않을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고, 날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다.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운명이 보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서로 때리고 괴롭히고 죽이고 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흉악한 강도들도 이런 상태에서는 서로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파스칼) 우리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이내 죽어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이 매일 조금씩 소모되고 쇠약해지는 것을 알고, 언젠가 결국 죽어버리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이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끝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 대해 꽃이 시들거나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그
나는 자주 주검을 마주한다. 요즘 나의 직업은 장의사다. 영구차에서 내리는 유족들을 내가 제일 먼저 맞이한다. 그들은 모두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온다. 삼일간의 장례와 마지막 화장터에서의 이별이 유족들을 탈진하게 만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슬퍼할 기력마저도 남아있지 않다. 영정사진과 위폐와 유골함이 앞장서고 유족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늘어져서 뒤를 따른다. 나는 영정사진 속 고인을 가름한다. 수목장에서 내가 파는 땅은 지름 30센티, 깊이 50센티 정도이다. 먼저 삽으로 뗏장을 둥그렇게 떼어낸다. 뾰족한 모종삽으로 황토 사이에 끼어있는 돌을 골라낸다. 무덤은 좁고 깊다. 반듯하다. 무덤에 한지를 깔고 고운 모래를 부어 주검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화장터에서 나온 골분은 따뜻하다. 영정사진 속 고인만큼 골분의 무게는 다르다. 어떤 주검은 반근 정도의 무게도 안 되게 가볍고 양이 적다. 그러나 어떤 주검은 뼛가루로 남았지만 무겁다. 대체로 한지에 싼 골분을 부을 때 유족들이 오열한다. 그러나 그 곡성은 길게 가지 않는다. 가끔 남편을 보낸 아내가 울고, 가끔 엄마를 보낸 딸이 구슬피 울 뿐이다. 울 힘도 없는 듯하다. 나는 골분을 고운 모래와 잘 섞는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피천득은 쓰고 있다. 연한 살결에 비취가락지를 하고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오월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있어 가정의 달이다. 자식과 부모와 스승이 모두 있는 사람에게 오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꽃을 준비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고르고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남쪽에서의 오월은 분주하다. 고향 이북에는 피천득의 오월에 대한 아름다운 수필도 이벤트도 없다. 그러나 오월에 만들어 먹는 평안도 나박김치가 특별히 맛있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남쪽보다는 훨씬 겨울이 긴 탓에 함경도 지역은 오월이면 마지막 겨울 김치를 먹고 있을 때 서해안에 위치한 평안도는 조금 따듯하니 새싹이 돋아나는 무를 움에서 꺼내 나박김치를 담근다. 물맛이 좋아 물김치를 많이 담그는가보다. 나박김치는 늘 해먹던 음식이라고 평안도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말한다. 봄에 담그는 나박김치는 생기를 얻고자 싹이 돋아난 것으로 골라서 담근다. 바로 먹어야 하기에 얄팍하게 네모지게 나박나박 썰어서 고춧가루를 비벼 색깔을 낸다. 주변의 밭이랑에서 봄기운에 자라는 달래를 한 옹큼 캐서 넣고 미나리도 넣고 마늘과 생강을 넣고 소금물을 슴슴히 가득
지난 주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를 읽고 필자는 놀랐다. 포털을 통해 접했다. ‘“한국이 또 입증할 것” 국내언론과 상반된 해외의 극찬’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기사에 대한 나의 평가가 주관적이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댓글을 확인했다. 4500개가 넘는 댓글이 붙었다. 기사를 다른 사람에게 추천한 독자는 1만3000회를 넘겼다. 댓글은 ‘진짜 기사를 읽었다’는 찬사가 주조였다. 독자들의 반응을 한 번 더 검증하기 위해 오마이뉴스 홈페이지를 통해 기사를 다시 봤다. 기사가 끝나고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기'에는 37만5000원이 후원됐다. 이 언론사 다른 기자에게 확인 했더니 이 금액은 최고수준이라고 귀띔했다. 기사는 ‘어둡던 코로나19 터널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희망을 담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프랑스, 영국과 한국을 비교한 수치(팩트)들은 한눈에 봐도 공이 많이 들어가보였다. 기사는 백신효과를 비롯해 착시효과들을 조목조목 점검해 나갔다. ‘백신접종률’과 ‘2021년 경제전망치’를 들어 두 부분 모두 실패할 것이라는 국내 언론보도들을 반박했다. 백신접종률은 코로나19 방역 성적순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인구 100만 명당 확
완전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하고 현실과 다투지 않으며, 그 현실이 그대로 정의이고 행복이며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진보도 없고 생명도 없다. (아미엘) 개인의 경우나 집단의 경우나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완전성을 향한 추진력은 그 개인과 집단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관념이다. (마르티노) “하늘에 계시는 ᄒᆞᆫ님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신의 완전성, 즉 모든 사람의 최고선에 대한 이념이야말로 전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 언덕, 저 곶, 저 해안을 따라 헤엄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항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득한 별과 나침반뿐이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항상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완전성만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힘이다. 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아니다. 술(術)도 아니요 방편도 아니다. 신앙은 힘이다. 살리는 힘이다. 말로써 영혼을 구원하였다는 일을…
단식 10년 전, 한 단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오십 대초였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놀라웠다.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별한 도전이었다. 2-30대에 술담배를 과하게 했다. 1년에 한두 번은 탈이 나서든 쉴 목적으로든 1주일쯤 입원하면서 일했다. 듬직하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당시 나의 체중은 80kg, 키는 165cm. 이 숫자들은 몸과 정신상태가 좋지도 옳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사의 경계선을 겁도 없이 몰지각(沒知覺)으로 뛰어다녔다는 말이다. 단식 돌입 후 두 달이 되었을 때, 체중은 60kg으로 떨어졌다. 그게 정상이었다. 내 인생 중반에 참으로 쑈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회복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종종 막걸리 한두병쯤 하면서 살지만, 그때는 담배는 물론 술 한 방울도 안하는 일적불음(一滴不飮)이었다. 그랬더니 머지않아 오래 전 나를 떠났던 '조양'(朝陽)이 돌아왔다. 친구들에게 '미스조'가 아침마다 노크한다고 말하면, 소수만 폭소를 터뜨리고 나머지는 영문을 몰라하며 눈만 꿈벅거린다. 몸이 되살아난 것이다. 섭생 그래서 내친 김에, 식생활을 잡식에서 채식으로 변경했다. 일체의 육류는 물론, 좋아하던 바지락 칼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일반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내 생애 첫 이사였다. 온 동네 사람들과 가족과 같은 끈끈함이 있던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한다는 것은 현관문을 열고 밟았던 마당 대신 엘리베이터를 밟아야 하는 낯섦 이상으로 가혹했다. 더 이상 할아버지, 동생과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연탄을 때던 전에 비해 훨씬 따뜻해진 난방에 모든 환경이 훌륭해졌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새집으로 들어와 가구 정리도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밤, 라디오에서 동물원의 '혜화동'이 흘러나왔고, 몇 주 만에 추억이 되어버린 내 동네와 사람들 생각에 눈물이 났다. 옛 동네가 그리웠다. 시간이 흐르고 중학생이 되어 새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새로운 환경에 나름 적응되어 가고 있었을 무렵 다시 한번 내 감성을 주무르는 노래가 나왔으니, 바로 김현철의 '동네'라는 곡이다. 그 앨범이 워낙 명반이라 '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 등의 주옥같은 곡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는 유독 '동네'에 크게 반응했다. 매달 이어지는 시험 점수의 등락에 울고 웃게 되는 이른바 입시 지옥의 초입에 들어섰던 시기였기에, 별 고민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아니 옛 동네의 나를 더욱 그리워했
3년전 들떴던 ‘꽃피는 봄날’ 기억을 되살려 본다. 판문점 도보다리에서의 남북정상간 머리를 맞댄 그 긴박했던 순간들. 추억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할 기회가 이번 5월에 찾아오고 있는 듯하다. 오는 21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될 한미정상회담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문재인-바이든 대통령의 첫 만남인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다시 재 궤도에 올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이든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의 윤곽, 북한측의 미국과 한국정부를 향한 담화문 발표 내용, 그리고 문재인 정부로서는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는 남북관계 재개를 위한 정부의 결연한 의지 등을 종합해 보면 힘들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내용은 트럼프대통령의 빅딜도 아니고 오바마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도 아닌 중간영역의 실용적 접근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서 구체적인 대북협상 방향에 대한 언급 등이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우리 정부의 금번 대미외교의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2일 외교부 북미국장의 담화를 통해 미국 바이든정부의 새 대북정책은 기존의 대북적대
추운 겨울 잘 견뎌낸 마른 나무에게 몸 숨기기 힘겨웠던 산새들에게 한겨울 목숨 지탱한 뿌리들에게 투정하지 않고 겨울잠 자는 동물들에게 꼬물꼬물 애벌레들에게 고마움으로 보내는 감사의 눈물이다 ▶ 약력 ▶김포 출생 ▶『미네르바』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하얀불꽃』, 『신포동에 가면』 ▶서상만 시인 시비 씀
지난 3월 유엔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인 2천 200만 명이 빈곤상태에 빠져있다. 이 숫자는 코로나 19 이전보다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지난 20년 이래 가장 많다. 빈곤상태란 하루 5.5달러(약 6000원) 이하로 살고, 최빈상태란 하루 1.9달러(약 2000원) 이하로 사는 것이다. 유엔은 더 이상 이러한 불평등을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염려한다. 라틴 아메리카 경제위원회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창설할 것을 호소하고, 이 새로운 사회계약이 보다 지속적인 방향으로 설계되길 바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최근 칠레 프에르토 몬트(Puerto Montt)에서 기본소득 회의를 개최하려했지만 코로나가 악화돼 취소했다. 한편, 우루과이는 학계가 나서 기본소득 네트워크를 만들고, 정치그룹 Frente Amplio는 기본소득 법안을 이미 제출했다. 최근에는 기본소득안을 개발 중에 있다. 멕시코 역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크고, 과반수가 넘는 국민의 지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도 상황은 비슷하다. 우루과이나 다른 라티노 국가에 비해 늦깎이지만 최근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물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