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방송과 블로그, 짹짹이와 얼굴책에다 무슨 튜브까지 어마무시 많은 매체(미디어)들이 대중매체(매스미디어)의 왕년 역할을 잠식한다. 돈벌이 짱짱했던 방송사 신문사들 얼굴 샛노래진다. 상상이나 했을까. ‘시민 모두 기자다.’ 외친 오마이뉴스를 넘어, 할 말 있는 모두가 언론사가 된다. ‘언론과의 전쟁’이랄 만큼 일부 매체, 특히 조선일보와 맞짱 뜨기 마다않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는 지지자들에게 ‘모두 언론사가 되어 도와 달라.’고 호소할 정도다. 정치까지, 개벽 같은 변화다. 내 뜻, 내 권리 으르는 집회 많아진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 그 앞줄의 ‘약방의 감초’가 이것이다. 보기 중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귀하는 무엇을 고르실까? △플랭카드 △프랭카드 △플랜카드 △프랑카드... 실은 10년 전 쯤 필자가 ‘미디어오늘’에 썼던 글의 주제다. 말과 글의 시비(是非) 다룬 연재기사였다. 또 이를 쓰는 이유, 우선 아직 ‘이것’이 혼동의 와중(渦中)에 있다. 둘째 할 말 많은 사람, 영향력 큰 (개인)매체 많아지며 ‘이것’의 정치력도 함께 커졌다. 시위나 행진 때, 사람 수는 적어도 이건 커야 한다. 없거나 작으면 ‘그림’이 안 된다. 추상적이지만, 힘은…
매클루언의 통찰 가운데 어쩌면 가장 논쟁적이고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의 구분일 것이다. 미디어 연구자들은 미디어를 핫(Hot)과 쿨(Cool)로 구분하는 발상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엉뚱한 발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까? 국제학술지 《유럽공중보건저널》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의 39개 나라 10대 청소년들의 음주량이 부모 세대의 젊은 시절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웨덴의 연구진은 여러 나라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뷰를 토대로 청소년 음주 감소에 영향을 준 4가지 요인을 확인했다.(한겨레신문 2021년 12월 27일자) 그중 하나로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과 교제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꼽았다.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교제하기보다는 소셜 미디어 등 인터넷 공간의 정보와 콘텐츠를 이용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부모 세대의 지배적 미디어와는 차원이 다른 미디어의 존재가 주요 요인 중의 하나라는 얘기다. 매클루언의 논지는, 미디어가 바뀌면 감각비율과 지각비율에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는 것과 문자로 기록한 글을 읽을 때의 느낌이 다
처음으로 오피니언의 필자로 원고의 한 지면을 맡았을 때 새해에도 이어서 지속적으로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감사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쓰려했으나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2021년을 돌아보며 우선 경기신문에 감사드리며 2022년에는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는 것을 다짐한다. 그동안 겪었던 좌절을 여기에 모두 적을 수 없지만 2021년은 특별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절망했을 때, 원하는 길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행동에 옮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떤 해보다 값지고 보람 있는 것들을 얻었다. 귀한 경험을 얻었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다. 생업을 포기해야 했고 그만큼 가난해질 용기가 있어야 했다. 반듯한 길을 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만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리 수고롭게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으니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잘하려고 노력한 것뿐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 비영리 단체인 ‘내고향만들기공동체’를 설립했을 때 경험도
가장 야만적인 미신의 하나는,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인간은 신앙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미신이다. 언제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보낸 이가 누구이고, 또 그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며, 적어도 그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기를 열망해왔다. 그래서 이 같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인을 하나의 기원을 가진 형제로 결합시키고, 그들의 삶에 공통된 궁극의 목적을 천명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 진정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무한한 삶과의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를 뜻한다. 그 관계가 그의 삶과 이 무한한 삶을 연결하여 그의 행위를 지도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에 있다. 가장 고차원적인 종교에서 가장 야만적인 종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가 그 밑바탕에, 이러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나’의 관계의 수립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장이며 최대의 계몽주의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과 정체성의 이기
새해 잇따라 나온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판세를 예측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관측들이 많다. 대선이 6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야 주요 후보 누구도 40%를 넘어 50%대에 접근하는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윤 후보가 하락‧주춤하는 사이 지지율이 10% 안팎까지 오르는 조사가 나오고 있다. 또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3~5% 수준의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지지 후보를 바꾼다거나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적지않은 유동층을 감안하면 이번 대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지난해부터 이어온 대선정국은 정책대결이 거의 실종된 채 네거티브 공방 중심으로 흘러왔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투표율이 낮아질 것이라는 안타까운 전망도 있다. 국민들은 이제라도 토론회 확대 등을 통해 비호감 선거전을 최소화하고 미래로 가는 싸움에 나서 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마저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자력으로 승세를 굳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여야가 정가의 보도인 짝짓기를 다시 꺼내 들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
이번 대선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두 후보에 대해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의 흠집이 너무나 많고 치명적이라고 서로 공격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지닌 흉터는 흠집이 아니라 상처를 입은 흔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상처는 흠이 생겨 온전치 못한 흠집과 다르다. 흠집은 결락을 지닌 하자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상처는 그가 무엇인가를 한 흔적이다. 일하거나 싸우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는 없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많은 일과 싸움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상처가 많다는 사실이 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한 일과 싸움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오히려 그것은 영광일 수도 있다. 지금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는 빛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통로다.’ 루미의 문장을 빌리면 상처가 많다는 것은 그의 안에 그만큼 많은 빛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된다. 두 대선 후보가 지닌 육체적 상처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열두 살에 소년공이 되었던 이재명 후보는 함석을 다루는 공장에서 찔리고 베여 100곳이 넘는 상처를 입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란 윤석열 후보는 그런 상처를 입을 일이 거의…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 그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시간은 흘러간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본래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탈무드) 시간은 우리 뒤에 있거나 우리 앞에 있지,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나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육체에는 모든 것에 차별이 없다. 물질에는 뭔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에는 영혼에서 나온 것 외에는 역시 차별이 없다. 영적인 생명은 자주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과거와도 미래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모든 중요성은 오직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간은 가장 큰 환상이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존재, 우리의 생활을 분해하는 프리즘이며, 우리가 초시간적인 것, 이념의 세계의 것을 탐구하기 위한 형식이다. 공은 전체로서 존재하고 우리의 눈은 한 번에 그 전체를 다 볼 수 없다. 둘 중의 하나, 공이 눈앞에서 구르거나, 우리가 공 주위를 한 바퀴
상반신의 여인 모나리자. 그녀의 살짝 머금은 미소는 백만 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그 미소를 찾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으로 모여드는 세계인은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다. 500살이 넘는 그녀. 하지만 여전히 젊고 찬란하다. 이 신비의 여인을 탄생시킨 장본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éonard De Vinci). 다 빈치는 프랑세스코 델 지오콩도(Francesco del Giocondo)의 부인 플로랑틴 리자 게라르디니(Florentine Lisa Gherardini)를 보고 이 유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불어 이름은 모나리자가 아니고 조콩드(Joconde)다. 이 조콩드를 프랑수아 1세는 매우 사랑했다. 예술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스카우트된 다빈치.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뚜렌느(Touraine)로 왔다. 그는 여기서 말년을 보내며 왕의 수석 화가이자 기술자·건축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직업은 이 밖에도 과학자, 발명가, 해부학자, 조각가, 도시계획가, 식물학자, 음악가, 시인, 철학자, 작가 등 어마어마하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웠던 다 빈치. 그의 수많은 예술작품과 발명품은 혁명 그 자체였다. 그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는 물론 지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