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우리 애들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 길을 막아선 데모대 앞쪽으로부터 여성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차의 다섯 칸쯤 앞에 있던 승합차 운전자가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서너 번 울리면서 운전석 차창 밖으로 투실투실한 주먹을 내밀어 팔뚝질을 해대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잠잠해졌다. 길은 금세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와! 저년 봐라! 홀딱 벗었네? 완전히 미친년 아냐? 개새끼들하고만 살더니 아주 개가 돼버린 모양이네! 물러가라, 이 개 같은 년아!” 데모대 안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듯 욕설을 퍼대는 사이에 킥킥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냄새나서 못 살겠다, 똥개들을 몰아내자’ ‘주택가 한복판에 개 농장이 웬 말이냐?’ 이면으로 보이는 플래카드 글씨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핸들을 꺾어 오른쪽 나지막한 보도블록 위로 개구리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데모대는 어림하여 이백여 명쯤으로 헤아려졌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두 명의 정복 경찰관들이 보였다. 여성들이 대다수인 사람들을 우회하는 동안 앞쪽에서 여러 마리의 개들이 왈왈 짖어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어수선한 군중 앞쪽에는 뜻밖에도 꽃무늬 비키니 차림의
사과나무를 심으며 /이경화 봄빛에는 중력이 없나보다 땅속에 끌어 올린 생명들 무거운 질고 가볍게 밀어내 얼굴 환하게 깊은 숨을 내쉰다 작년에 냉이 밭에 던져놓고 일상에 쫒겨 생각 없이 버린 계절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밭둑 언저리 훌쩍 자란 마늘밭에 훈풍을 들고 돌아왔다 두꺼워진 삶의 흔적들이 끈적끈적하게 매달려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남아 한풀씩 뜯어내는 맛이 시고 달다 하늘 높이 부메랑을 던진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생각의 늪은 사과나무를 심고 주렁주렁 결실이 달릴 소망에 감사하는 마음 두 손에 모아 새롭게 돋아나는 신록을 꿈꾼다 ■ 이경화 1955년 충남 안면도출생, 방통대 국문학과를 나와 한국신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수원문학과 한국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2017년 계간 수원문학창작지원금 선정 작품시집 ‘고목나무에 핀 새순’을 출간했다. 수원문학인상, 홍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원문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오동나무 /정일남 오래 살아온 오동나무는 꿈이 있었다 가야금이 되어 가야를 노래하거나 거문고가 되어 진랑의 사랑을 읊거나 장롱이나 탁자 문갑 혹은 병풍틀 아니면 나막신이라도 되어 살고 싶었다 오동꽃 호시절이 가고 명이 다한 오동나무는 무엇이 되어도 좋았으나 가난한 시인의 관(棺)이 되었다 오동은 숙명을 받아드렸다 시인의 시를 먹고 시인과 몸을 섞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누구 찾아오지 않아 고적감이 좋았고 나는 오동나무에 등을 대보았다 ■ 정일남 1935년 강원도 삼척출생. 관동대학교 상과 중퇴. 197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1979-1980년 ‘현대문학’ 시 추천. 시집 ‘훈장’ ‘감옥의 시간’ ‘봄들에서’ ‘금지구역 침입자’ 등 다수. 공간시낭송회 상임 시인.
사각티슈 /전다형 뽑아 쓰기 좋은 사람 물 한 방울에 처녀를 주는 사랑 엄밀한 뒤를 보는 유일한 관계 세상 모든 뒤를 훔치는 사랑 편리한 뒤처리가 관건 천년만년 물리지 않을 사랑 유곽遊廓, 사물의 체위 사각지대 휴지통 넘쳐나는 통속적 관계 일회용 사랑 ■ 전다형 1958년 경남 의령출생,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연구저서로 한하운 시의 고통 연구, 시집으로 ‘수선집 근처’, ‘사과상자의 이설’이 있다. 제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현재 부산작가회의 부회장과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언 땅이 풀릴 때 /김완 덕산골 편백나무는 홰친홰친 우듬지를 흔들어 운다 언 땅이 풀릴 때 땅은 제 몸에 박힌 얼음을 깨뜨리고 몸 공양한다 등 굽은 농부의 곡괭이가 채마밭 고랑을 돋우고 참새들 수다는 시작된다 언 땅이 풀릴 때 터지는 속울음이면 남북 관계도 스르르, 설핏 희망을 품어도 되는가 바람은 아직 차지만 여린 햇살에 너덜겅 바위들도 쌓인 눈을 털어낸다 서리서리 너와 나의 가슴에도 오래 참은 봄, 기꺼이 불러낼 수 있겠다 ■ 김완 1957년 광주출생 2009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너덜겅 편지’, ‘바닷 속에는 별들이 산다’가 있다. 2018년 제4회 송수권 시문학상, 남도시인상 수상. 김완혈심내과 원장
당신이었으면 /이복순 누군가 문을 두드려 선잠을 깨우는 밤 홀로 일어나 두 개의 소주잔을 앞에 놓고 대작을 합니다 창밖에 서성이던 달이 슬며시 내 곁으로 다가와 술잔을 들어 줍니다 말없이 웃어주는 달이 당신이라면 좋겠습니다. ■ 이복순 1957년 김포에서 출생했다. 2015년 계간 수원문학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2017년 KBS ‘시와 음악이 있는 밤’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시집 ‘서쪽으로 뜨는 해도 아름답다’, ‘길 위의 인문학상’,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수원문인협회 이사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조록싸리 꽃 필 때 /송소영 조록싸리 꽃이 피고 있다 단정하게 여며 틀어 올린 분홍 머리들이 가지에서 조롱조롱 옛 기억을 연신 내리꿰고 있다 그 곳에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 초여름 궁색한 내 그리움이 며칠 째 서성이며 밤을 지새우고 어느새 꽃잎은 또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데 유월이다 ■ 송소영 1955년 대전출생, 공주교대졸, 2009년 문학·선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교직에 봉직했다. 시집 ‘사랑의 존재’, 백봉문학상, 수원문학인상 등 수상, 제27대 수원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수원영화인협회 부회장과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글밭을 열어가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봄비 /김연화 연못위로 뛰어 내리며 아직 꿈결인 연못물을 흔들어 깨우며 수련의 눈가에 묻은 늦잠을 털어 낸후 연꽃을 타악 터 뜨리고 싶은걸까 꿈에서도 꿈 아닌듯 실눈을 뜨고 잎마다 황급히 켜는 꽃등 ■ 김연화 1959년 전남 화순출생, 고려대 생태작가 아카데미와 수원문학 아카데미수료, 좋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한국 생태환경학 이사, 대한 시문협 이사, 2017 전국예술대회 대상, 수원문인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달팽이 /한빈 묵묵히 땅 위 스치는 달팽이 길이 살풋 열리듯 목 내밀며 한 뼘 한 뼘 더듬이 돛 달고 기어간다 헐벗은 살갗은 앙당그레 하다 세월 부대낀 넋이 스며든다 신선의 느림이 있는 선계의 달팽이 섬 늘, 사심謝心한 섬 둘레 아득히, 보이는 뒷 세상 하늘 색 변하고 바람 불며 풀잎 위 먼길 가다 하품 한다 수줍은 듯 느릿느릿 가다 인간에게 오한이 와 진탕에서 달아났다 할 것 이다. ■ 한빈 1959년 전남 완도청산도 출생, 월간 <문학공간>(시)등단, (사)한국문화예술연대 이사, 한국시인연대, 현대문학사조 회원, 공간마당 동인, 시집《별 헤는 밤》이 있다.
뭉툭 /김선아 한쪽 귀가 떨어진 밥그릇이 다시 나왔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설거지물 아래에서 서툰 열 손가락 안에서 용케 맨살을 비켜 간다 어찌하여 그 손은 멈칫하지 않는가 생채기 난 적 있었지 아무도 모르게 육신에 갇힌 적 있었지 바닷가를 거닐며 어깨를 덮은 숄이 파도에 휩쓸려 갈 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수평선으로 흘러가는 하나둘 별을 보았지 모서리도 닳아서 둥글어진다 다 먹은 밥도 알아서 살 속에 괸다 깨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요 귀를 깨트린 그녀가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 김선아 부산 출생. 2007년 월간 『문학공간』 시로 등단해 시집 『가고 오는 것에 대하여』 외 2권이 있다. 부산여성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부산여성문학인협회 이사장이자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계간 『여기』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