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미디어가 넘쳐나는 미디어 홍수시대다. 정보의 범람이고 미디어의 홍수다. 인쇄매체는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한 인터넷신문으로 말미암아 맞춤법 안맞는 신문기사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력신문의 위치는 아직 굳건하다. 반면 방송미디어는 판의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ICT기술의 발달로 방송에 대한 접근루트가 다양화되고 (플랫폼의 다양화) 아무나 할 수 없던 콘텐츠의 생산과 전달이 누구에게나 오픈되면서 생긴 일이다. 이 시대 우리는 방송문화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인 셈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주나라가 쇠하면서 춘추5패와 전국7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였다가 진시황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되었다. 가히 방송은 춘추전국시대다. 지상파방송도 IPTV,케이블,위성방송이란 플랫폼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볼수 없는 구조이고 플랫폼은 자신이 직접 제공하는 영상서비스를(VOD) 통해 매출을 확대한다. 이젠 OTT라 부르는 넷플릭스가 한국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넷플릭스의 경우 2020년 신용카드 결제액 추정매출이 5173억, IPTV 가입자 동시결제 매출까지 포함한다면 6천억원은 될것으로 추정한다. MBC는 간단히 넘어설 것
진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이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마련이다. (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느질을 잘하고 능숙하게 풀을 베고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과 그 이치는 똑같다. 그것은 바느질을 많이 하고 풀을 많이 배고 글씨를 많이 써본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아무리 애써도, 수없이 해보지 않은 일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고 싶으면 그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일에 익숙해지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해서라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려서, 종종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위장하기 쉽다. (라 로슈푸코)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내부에 뿌리내린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책에서 읽은 남의 사상은, 이를 테면 남의 밥상 위의 먹다 남은 찌꺼기이며 이방인에게서 빌린 옷과 같다. (쇼펜하우어) 진리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현자들은 진리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서 진리와 만나더라도 감사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곳에 누군가의 이름
일반인인 조민씨에 대한 기성 언론의 낙인찍기는 무얼 뜻할까? 그 광기는 그저 하나의 미친 짓에 불과한 것일까? '조민 낙인찍기 현상' 이면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일단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정반대 지점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치 체제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가스실에 몰아넣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 아렌트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명령에 따라 악인 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아이히만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라는 통찰. 그의 죄는 '무사유'였다. 그렇다면 의식적 '사유' 속에서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유태인들을 낙인찍어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이들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 악의 특별성? 누구나 악의 특별성이라고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 특별성을 한국 사회에 대입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특별한 소수의 특별한 악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요소들이 장막의 역할을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원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열린사회란 점도 하나의 장막일 것이다. 그 형식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작용해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느 해 설날 아버지는 내 손목을 잡고 고샅길을 걸으시면서 ‘설’은 ‘서러워서 설’이라고 했단다. 라고 들려주셨다. 묻지도 않았는데 들려주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산촌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며 속상한 일 많을 것이니 미리 짐작하고 서럽더라도 참고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의 이 말씀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억의 저장고 저변에 깔린 이 말씀이 내 삶의 중심으로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그 후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사회에서는 배고파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먹을 게 없고 입을 것 없어 서럽고 슬픈 세상은 아니다. 대신 어떤 죄 닦음인지는 모르나 ‘코로나’라는 역병으로 인하여, 여럿이 술·밥 먹지 말 것이요, 뭉쳐 다니지도 말고 집안에서 자중하며 고독하게 지내보란다. 질병관리본부에서 하는 말이 곧 코로나가 타이르는 말을 대신하는 듯. 이 집이나 저 집이나 TV 시청 시간이 늘었다. 안방에서나 거실에서나 TV에서는 ‘트로트 세상’이다. 장사 안되고 사업망치고 사람도 만나지 말라니 속 풀이나 하라는 듯 10여 개 방송사에서는 눈만 뜨면 궁짝…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건국신화를 보면 옛 조상들은 맵고도 따듯한 성질의 채소를 좋아한 듯하다. 배추와 무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고추와 젓갈을 넣어 김치라는 형태를 가지기 전 맵고도 알싸한 맛과 독특한 향을 내는 갓 종류인 이것은 임금의 수라상에 오를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成聃壽 자는 耳叟)에게 보내며 지은 시 ‘산갓김치를 이수(耳叟)에게 보내다’에서 맛과 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날로 씹으니 어찌나 매운지/산방에서 전하는 묘법에 따라/끊은 물에 데쳐 김치를 만드니/금시 기특한 향내를 발 하네/한 번 맛보자 눈썹을 찡그리고/두 번 씹자 눈물이 글썽/맵고도 달콤한 그 맛은/계피와 생강을 깔보니/산짐승, 물고기의 맛/온갖 진미가 겨를 수 없네...”로 표현하고 있다. 고기에 후추가 필요해 대 항해를 했던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 신토불이 산갓은 맵고도 기이한 향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향신료를 대신했다. 그러면 산갓과 함경도 영채는 무엇이 다른가? 북에서 출판한 백과사전에 보면 “함경도 특산인 영채김치는 영갈채갓김치, 혹은 산갓김치라고 불렀다” 담그는 방법에 대해 “해마다 가을이 오면 산갓의 잎을 따서 소금에…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왜 이성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달콤한 유혹으로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부축이고, 최대한의 노동력을 끌어모아 쓸모도 없는 물건을 생산하고는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굶어 죽든 말든 마음대로 해고해도 되는, 그런 사회체제를 원하고 있다. 흙과 햇빛, 동식물계, 광석층을 비롯한 자연 안에는 무진장한 부(富)가 있어서, 모두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자연 속에는 빈곤을 초래할 원인이 없다. 불구자와 노동자가 가난에 빠질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사람들이 만성적인 가난으로 짐승처럼 타락하지 않는 한, 가정적인 애정과 사회적 동정이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조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사회생활의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회의 특정 계층에 일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예지와 사랑이 그 일에 결집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일을 정치가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부 고급아파트에서 배달노동자들을 짐짝 취급하고 있다는 뉴스가 가슴을 저리게 하네요. 성 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 페스티벌’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도 실망스럽습니다. 우리 국민의 천박한 ‘차별의식’ 잔재를 보여주는 인권 후진국 현상이어서 씁쓸합니다. 인류는 ‘차별’에서 ‘평등’으로 끊임없이 진화해 왔지요. 구시대적 ‘차별주의’는 일소돼야 합니다. 지난해 한 아파트 경비원이 몰상식한 입주민의 반복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이 있었지요. 고통을 호소하는, 고인이 남긴 처절한 육성과 CCTV녹화 장면 속에서 피의자가 힘없는 경비원을 밀치고 때리고 모욕하는 장면은 참담했습니다. 최근 배달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천대한 일부 아파트의 미개한 ‘갑질’ 소동은 어떤가요? 오토바이 출입을 아예 금지해 배달물건을 들고 먼 거리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지요. 배달노동자들을 화물 엘리베이터로 몰아낸다는 소식은 듣는 귀를 의심케 합니다. 배달비 몇 푼 벌려고 시간 싸움을 벌여야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왜 그렇게 못 헤아려주는 걸까요? 오는 4월로 예정된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의 뜨거운 전쟁이 시작됐군요. 그런데 그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는 글로벌 이동 마비와 사회균열 심화, 국가감시의 강화 및 프라이버시 침해 만연 등 국내외적으로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음은 모두가 목도하고 있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따로 놀면서, 코로나가 하루빨리 종식되는 날이 오길 고대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주요 강대국들은 코로나 국면을 패권 장악의 마당으로 삼고 다양한 측면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의 한심한 코로나 대처로 야기된 미국의 국제 리더십의 공백을 파고들어 중국 중심으로 국제질서의 판을 짜려고 부심 중이다. 지정학적 리더십 장악을 둘러싼 각축이 첫 번째 전선이다. 코로나 발생 전부터 중국은 많은 자원을 신흥시장에 퍼부은 결과, 미국의 대안 세력으로 컸으며 신흥국가들에게는 매력적인 파트너로 부상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과거 자연재해나 감염병 등으로 위기가 지속되었을 때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를 쥐고 그 부정적 효과 차단에 주력하여 회복을 이끌었다. Polio Endgame Strategy 2019-2023을 창안하여 아프리카에서 만연한 에이즈 퇴치를 위해 500억 달러를 투입하여 43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고, 2014년 에볼
작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다른 선생님과 복도를 걸으며 아이들이 없는 상황에서 학교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배움이 일어나야 할 곳에 배움의 주체가 없으니 특별한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대화가 길어지며 아이들이 학교에 안 올 때의 장점은 뭐가 있을지까지 이어졌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고 학교 폭력이 없어져서 좋다고 해맑게 말했다. 옆에서 걷던 선생님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 폭력이 없어진 대신에 가정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에게 아동학대를 당하다 시설에서 보호 받게 된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A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동학대 신고로 시설 보호 기관에 갔었다. 어린 A에게 시설에서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들은 너무 엄격했고, 함께 지내는 아이들에게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다. 접견하며 만난 아빠는 다시 학대하지 않겠다고 다짐의 다짐을 했다. 결국 짧은 기간 시설에서 머무르다 다시 아빠와 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하게 A를 학대했다. 학교에 다닐 땐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학대의 정도가 점점 올라갔다. 집안일
재산이나 노동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대선 길목에선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토마스모어의 소설 '유토피아'에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정부차원의 기본소득은 핀란드가 효시다. 코로나 시대 대안으로 도입을 추진중인 복지 선진국 프랑스를 시작으로 핀란드, 미국 알래스카, 일본, 브라질의 기본소득 실태를 전문가를 통해 점검해 보는 '기본소득 세계는 지금' 시리즈를 10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Covid19는 우리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마스크가 필수인 생활을 연출하고 여럿이 모여 식사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디 이뿐이랴. 기존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심한 균열로 몰아가고 있다. 테슬라의 일런 머스크(Elon Musk)처럼 통 크고 미래비전을 설계하는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억만장자가 되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가 될 지경이다. 많은 이들은 코로나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날을 학수고대하지만 이제 그 날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변해가는 세상에 맞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빨리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니겠는가. 코로나시대 대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