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참상 소식 하나가 종일 뒷덜미를 잡는다. 지난 14일, 미얀마 양곤의 시위 도중 한 남성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죽여도 좋다는 군부의 지령을 받은 경찰의 총탄이 계속 쏟아진다. 돌연 물러나는 시위대 속에서 한 여성이 뛰어나와 남성의 몸을 감싼다. 이십 대 청춘이었다. 양곤 의대 1학년이라는 남성도, 생면부지 남성을 위해 총탄을 뚫고 몸을 던진 여성도. 남성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여성은 경찰에게 두들겨 맞으며 끌려가 소식이 없다. 어리고 여린 그들을 총탄 세례 앞에 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에서 답을 얻는다. 어리고 여린 것이 힘이었을 것이다. 혁명가하면 만인을 이끄는 카리스마,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세상에 이름 얻은 혁명가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게 다는 아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젊은 날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많다. 시인의 마음과 닮았다. 실상 시인들 가운데 혁명전선에 섰던 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시인으로는 김남주, 박노해, 김지하가 떠오르고 나라 밖으로는 혁명대열에 동참하다 정치적 망명까지 해야 했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 스무 살 전후 시인을 꿈꿔 시인
K선배가 손을 잡아끌었다. 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 사이 로터리였다. S대 시위대가 남산 쪽에서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나는 순간 겁에 질려있었다. 이미 정보가 샌 듯 로터리에는 백골단과 전경이 쫙 깔려있었다. “광주학살! 진상규명!” “독재타도! 민주쟁취!” 로터리까지 시위대는 밀려왔고 우리는 대오로 들어갔다. ‘펑 펑’ 최루탄이 터졌고 청 커버를 입은 백골단이 달려왔다. 대오는 금방 깨졌다. 그때 K선배와 잡은 손을 놓쳤다. 한국은행 쪽 골목으로 도망쳤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고 있는데 백골단이 다가와 곤봉으로 등짝을 때렸다. “아니에요. 나는 대학생 아니에요. 재수생이에요.” 나는 변명했고 다행히 백골단은 나를 보내주었다. 그때 10여 미터 앞에서 질질 끌려가는 K선배가 보였다. 곤봉에 머리를 맞았는지 머리에 피가 흥건했다. 상의가 거의 벗겨져서 앙상한 갈비뼈가 속옷 사이로 보였다. 안경은 벗겨졌고 기절한 상태였다. 나는 도망갔다. 유다가 예수를 부정한 것처럼. 명동거리를 멍한 상태로 휘적휘적 걷다가 다시 한국은행 앞으로 가 보았다. 상황은 정리되었다. 드문드문 전경이 서 있었다. K선배가 잡혔던 자리에 가보았다. K선배의 검정색 뿔테안경이 다리가 부러진…
- 연재를 시작하면서- '광고로 세상읽기'란 제목으로 시리즈의 문을 엽니다. 매 회마다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드는 광고 작품을 선택한 다음 그에 얽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속살을 살펴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광고를 단순히 제품 팔고 브랜드 이미지 높여주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고는 그런 마케팅 수단의 의미를 넘어 사람들 모듬살이에 중요한 영향 미치는 엄연한 사회적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현대인들에게 샤워와 면도 그리고 양치질 습관을 처음 심어준 것이 바로 광고의 힘이었습니다. 미국의 광고학자 셧 잘리(1990)는 지적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 고유한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형성하는데 있어 광고가 매스미디어 못지않은 핵심 역할을 한다고. 또 한 가지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광고가 ‘세상의 거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입고, 쓰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되비춰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광고는 인간을 둘러싼 당대의 환경들이 교집합된 일종의 종합적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현란한 설득기술의 장막 뒤에 정체를 숨긴 광고의 심층적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이 재미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
친절은 미덕이며 기쁨일 뿐만 아니라 폭력보다 강력한 무기이다. 죄 많고 거짓에 차 있으며, 특히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사람에 대해서도, 아니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해서야말로, 그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친철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만약 네가 세상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고, 또 그들에게 선을 원한다면, 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너를 믿고 이해하도록 그 사실을 얘기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믿고 또 이해하게 하려면 너는 가능한 한 네 생각을 차분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전하도록 애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의견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과는 잘 얘기할 줄 알지만,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아무리 설명해도 동의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거나 우리의 말을 왜곡할 때, 우리는 쉽게 평정을 잃고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화
코로나19 일일 확진자수가 400명대 후반을 지속하고 있다. 3월 28일 00시 기준으로 확진자수 101757명, 사망자는 1722명이다. 언론의 관심과 국민의 경각심이 1년전 이맘때보다 현저히 낮아졌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를 국난수준으로 괴롭히고 있다. 1년전 3월 19일, 첫 사망자가 발생했고 일일확진자 수도 최초로 100명을 넘어선 날이다. 다음날인 20일 이 뉴스를 전했던 신문들은 1면에 머릿기사에서부터 5개 면에서 6개 면을 할애해 보도했다. '텅빈 도심···대구가 멈췄다'는 달구벌대로의 모습을 전하는 1면 사진은 송연함마저 자아냈다. 4·15총선을 20여일 남겨 놓은 시점이었지만 총선관련 기사는 한참 뒤로 밀렸다. 국난이 오래 지속되면서 언론의 코로나19 보도도 여기저기서 문제를 낳고 있다. SNS를 중심으로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이런 가짜뉴스는 정쟁에까지 활용돠고 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다고치자. 그러나 전통있는 언론이 정치인의 발언이라고 검증 없이 보도하는 관행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일부 언론은 클릭수를 늘리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파렴치함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지난 문재인 대통령의 백신접종과 관련된 가
건물 안에는 숨겨진 에너지원이 있다. 추울 때는 열을 주고 더울 때는 찬 기운을 불어주는 난방 기기이며 냉방 기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콘크리트, 대리석, 화강암 등 중량 물질로 구성된 바닥재, 벽체들이다. 이 중량 물질은 단위 체적대비 열용량이 높아서 많은 에너지를 품을 수가 있어 천연 에너지 저장소로 작동한다. 한여름 낮에 대리석 건물에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대리석 표면과 사람의 피부가 복사 열교환을 통해 인체로부터 열을 뺏어가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이 구조체에 흡수된 에너지는 역으로 주변으로 방출된다. 실내공간을 감싸는 구조체와의 복사에 의한 인체의 열 흡수와 방출은 공기에 의한 열교환보다 쾌적감과 건강에 더 좋다. 몇몇 건축가들은 이러한 구조체와 인간의 복사 열교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실내 천정재와 벽체 마감재를 모두 제거하고 콘크리트 표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하곤 한다. 천정재나 마감재가 복사 방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거친 표면의 화강암 보다는 매끄러운 표면의 대리석이 복사 방사율 면에서 더 유리하다. 보기에도 좋고 열쾌적면에서도 좋으니 대리석은 실로 고급 자재인 것이다. 이 천연 에너지 저장소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으나
아.. 나도 투표하고 싶다. 보궐선거 없는 지역에 살면서 지금 서울과 부산의 선거전 양상을 보노라면 참담하다 못해 화가 난다. 이유는 첫째로, 후보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너무 낮 두껍게 한다. “상속받은 땅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사람이 몇 번이나 말을 바꾸다가 이제 와서 “그 땅의 측량현장에 내가 있었다 없었다가 중요한게 아니다”라니 이게 무슨 해괴한 말인가? 문정권의 집값상승은 대역죄라고 몰아세우던 양반이 취임하면 일주일 안에 재건축, 재개발을 풀겠다니, 투기광풍을 기대하고 그 지역에 투자를 해놓지 않은 이상 도저히 내뱉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 부산은 또 어떤가? 오죽했으면 네티즌들이 박형준후보의 재산을 “1일1땅”으로 찾아내고 있는 실태를 일러 박후보가 부산시장에 출마한 이유는 ‘자기도 모르는 숨겨진 재산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한탄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급기야 보도된 박형준후보의 관련재산을 코스로 이어서 방문하는 “탐욕의 성지 순례단”까지 등장했다. 이뿐인가? 박형준후보의 딸 홍대미대 입시청탁 건에 대한 폭로를 보면 대한민국을 뒤흔든 조국 전 장관 딸의 표창장은 참으로 소박하게 비칠 지경이다. 두 번째로 화가 나는 것은, 이런 거짓부렁에도 불구하
탐욕과 망상과 사치와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지혜의 원천이다. 만일 네가 진심으로 정욕을 극복하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정욕에 지배당할 때가 있더라도 너에게는 정욕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부가 단번에 말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고삐를 내던지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면 말은 언젠가는 서게 되어 있다. 정욕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싸움터에서 백만 군대에 이기는 자보다 위대한 승리자이다. 모든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법구경) 남을 자기 자신처럼 존경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인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없다. (공자) 젊은이여! 유흥이나 사치 등의 온갖 욕망의 만족을 멀리하라. 설사 온갖 욕망을 완전히 물리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관능의 향락을 절제하고 미룸으로써, 네 즐거움은 더욱 더 풍성해진다. 즐거움이 수중에 있다는 의식은 그
코로나 19의 최대 격전지는 이탈리아다. 작년 초 밀려온 코로나로 밀라노에서는 순식간에 3만 명이 사망했다. 국토는 봉쇄되고 경제활동은 전면 중단됐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시민들이 즐비했다. 카리타스(Caritas) 수녀회가 운영하는 밀라노의 한 배급소에 식료품을 받으러 나온 65세의 여인 마리아(Maria)는 “참 괴롭네요”라며 수줍어했다. 마리아는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는 라 스칼라(La Scala) 오페라 극장 휴대품 보관소에서 일했다. 그런데 오페라 극장이 문을 닫자 생계는 막막해졌다. 미망인 연금으로 월세를 내고 의약품비로 매월 60유로를 지출해야 한다. 로마 한복판에서 생필품 보급차(Ronda della Solidarieta: 연대 순회차)를 기다리는 50대 여인 아나(Anna) 역시 “생활이 어려울 때 가끔씩 오지요. 창피하네요”라고 말한다. 아나는 가사 도우미였지만 코로나로 직장을 잃었다. 집세를 내려면 식비를 아껴야 한다. 노동조합 콜디레티(Coldiretti)에 따르면, 이 여인들처럼 식료품을 보급 받는 사람은 약 370만 명. 전보다 100만 명 더 증가했다.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학림다방 앞이었다. 다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양희은의 노래가 걸어 내려왔다. 양희은의 노랫소리는 턴테이블에 감긴 LP판 눈금을 따라 천천히 풀어졌다. 다방 앞 횡단보도 역시 불어난 퇴근길 인파로 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술판을 벌였다. 새내기들은 선배들의 기타 반주에 맞춰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술잔이 부딪칠 때, 대학로의 젊음도 덩달아 참방거렸다. 권이 형은 붐비는 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리곤 불쑥 아무 이름이나 불렀다. 그것도 큰 소리로. “희숙아!”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으면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또 다른 이름을 불렀다. 역시 큰 소리로. “미경아!” 그렇게 아무나 부르는 여성의 이름에 누군가 뒤돌아보면, 비로소 권이 형이 움직였다. “이게 얼마만이냐. 오빠는 잘 있지?” 권이 형은 뒤돌아본 젊은 여성, 혹은 여성의 일행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권이 형은 처음 본 여성들을 이끌고 가까운 순대국밥 집으로 왔다. 외상장부를 적고 먹는 몇 안 되는 단골집이었다. 단골이라고 해 봐야 극단 소속의 배우들이 전부였지만, 인심 좋은 할매는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