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 문명권의 충격
우리에게 19세기“근대의 충격”은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진로설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시기 서구는 단연 우리보다 훨씬 앞선 문명체제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는 병자호란 이후 북벌(北伐)의 대상으로 삼아 오랑캐로 알고 있는 청(淸)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는 18세기 말엽의 각성이었다.
“이십년을 힘써 중국을 배운 뒤에 이러쿵저러쿵 해도 늦지 않는다”라고 했던 박제가의 말은 동시대 박지원이 남긴 《열하일기》의 내용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지녔다. “중국 변방의 이런 시골조차 이리도 번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충격은 연암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한다. 물론 여기서 그 배움의 직접적인 내용은 청나라보다는 그곳에 융해되어있던 서구의 지식과 기술체계였다.
그러나 그런 논지는 개혁정치에 무관심했던 주자학이 지배하고 있던 현실에서 제대로 먹혀들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뭔가 크게 사변(事變)적 사태가 일어나야 정신이 번쩍 드는 법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의 습격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마침내 청조(淸朝)의 소멸로 이어지는 아편전쟁(1840년)이나 일본 막부정권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에도 앞바다의 미국 흑선의 등장(1853년), 조선조가 격퇴했다고 오판했던 병인(1866년)/신묘(1871년) 두 번의 양요(洋擾)는 모두 중화문명권 해체의 서곡이었다.
-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일까?
이런 격변을 겪으면서 동아시아 3국이 각기 “중체서용(中體西用/중국)”, “동도서기(東道西器/조선)”, “화혼양재(和魂洋才/일본)”를 주창했던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지켜내면서 변화를 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은 그럴듯해도 물량적으로 압도하는 서구의 위력 앞에서 무력했다.
게다가 용(用)이나 기(器)나 재(才)라는 형이하학(形而下學)적 토대라는 것도 그 사회의 사유방식, 정치사회 구조, 여러 물질적 조건의 역사적 축적이 엉키면서 나오기 마련이니 기존의 체(體)와 도(道)와 혼(魂)을 그대로 움켜쥔 채 이후를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가 겪은 위정척사(衛正斥邪)와 개화(開化) 사이의 쟁투는 그런 모순돌파를 위한 복잡한 경로였다.
바른 걸 지키고(위정/衛正) 잘못된 것은 배척한다(척사/斥邪)라는 위정척사가 주체성에 방점이 있다면 개화는 그 지키려는 정(正)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던 도전이었다. 그러나 과연 뭐가 정(正)이고 뭐가 사(邪)인가? 이걸 판별해내지 못하면 혼란은 지속되고 깊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그래서 판별의 근거가 되는 내용이다. 중화질서의 방어가 정(正)인가, 아니면 그걸 개혁해서 이른바 틀을 바꾸어 새것을 창조하는 “변법창신(變法創新)”을 추구하는 것이 정(正)인가?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이런 논리도 사실은 당대의 현실에서는 “서구”를 논거로 삼는 설정이다. 결국 “근대”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이 모든 사태를 결정지을 수 있다. 사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주목되었던 실학(實學)에 대한 논쟁도 이런 한계에 머물렀다.
- “근대”라는 개념의 문제
왜 그랬는가?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체제가 아니었다면 우리 내부에도 근대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는 주장에 실학이 연동되면서 나온 결론이었다. 실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면 서구의 근대와 다를 바 없는 문명진화의 내재적 힘이 있었을 것이라는 건데 이것도 결국 서구의 발전사를 놓고 사유하는 테두리에 갇혀 있던 셈이다.
1970년대 실학논의에서 대단한 저력을 과시했던 천관우조차도 사실은 실학의 “근대지향성”이라는 개념에서 철저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천관우의 기여는 경이롭고 그 실력의 탄탄하기는 지금도 눈이 휘동그래 해진다. 한편 21세기의 자리에서 실학을 읽고자 하는 임형택의 관점은 그런 근대개념의 한계를 넘는 각도에서 깊이 눈여겨 보게 된다.
그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네 번의 전란(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고 ‘명청(明淸)교체기’라는 중화문명권의 파열과 변화 앞에서 서구문명에 대한 개방적 자세를 토대로 새로운 진로를 뚫고 나가려했던 조선의 개혁적 지식인들의 고뇌와 성찰로 실학을 읽어낸다. 이렇게 보자면 21세기 문명권의 대변동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는 21세기 조선 땅에서 등장해야 할 실학적 차원의 임무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논의가 여전히 그렇게 매력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우리 사회의 실정이다. 조선성리학 연구의 중견 전호근은 그의 《한국철학사》에서 이런 토로를 한다. “조선성리학 공부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80년대 후반, 한국의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에 대한 지성계 일반의 평가는 한마디로 가혹했다. 봉건적 관념론, 체제 수호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 공리공담, 그리고 급기야는 조선을 망하게 한 주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사상적 풍토에서도 우리의 철학과 사유의 본질, 그 역사를 연구해오는 학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에 나왔던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논고》, 이을호의 《한국실학사상연구》나 《한국철학사 총설》같은 서적들은 라캉, 데리다. 뒬레즈, 지젝 그리고 최근에는 라투르 등에 밀리고 밀려 거의 절대 망각의 지대에 존재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이건 제대로 된 사상적 환경이 아니다.
- 조선학의 태동과 정신의 맥락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아 쓴 이후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나 《조선학(朝鮮學)》의 태동에 최남선이 끼친 기여는 뚜렷하다. 1930년대 일본의 파시즘 체제 전환과 만주침략, 좌우 통일전선을 지향했던 신간회의 좌절이라는 역사의 공간에 조선학 운동이 일어나고 그 중심에 최남선이 설립에 일찍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선광문회》가 존재한다.
《조선광문회》는 이 시기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등 조선 고전을 출판하면서 “조선학”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한다. 이런 운동은 결국 자신의 세계사적 자리가 어디인가를 깨우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역사와 지리의 풍토를 알지 못한 채 일구는 사유와 지성은 결국 자신을 놓치고 의식의 종속을 결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에 등장하는 독고준과 그의 친구 김학이 나누는 대화는 대중 가요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소재로 자신의 맥락과 결별한 지식인들의 모습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가로되 ‘니콜라이의 종소리’, ‘성모 마리아’, ‘슬픔의 장미’, ‘낙타와 신기루’, ‘아라비아’ 같은 거. 이런 말은 그쪽에서는 강렬한 점화력을 가진 말이야. 왜냐하면 그 말 뒤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야. ‘니콜라이의 종’ 하면 희랍 정교회의 역사와 비잔틴과 러시아 교회와 동로마제국의 흥망이 그 밑에 깔려있는 게 아닌가? 주민과 풍토에서 떨어진 신화는 다만 철학일 뿐 신화는 아니야.”
이 대목에서 “철학일 뿐”이라는 규정은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지만 일단 그다음 이야기로 이어 나가보자. 독고준은 자기 문명의 기호와 해석을 지니지 못한 지식의 한계에 대해서 논한다.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성감대(性感帶)지. 거기를 건드리면 울고 웃고 발정하고 손톱을 박아오는 그런 지역이거든. 이 성감대가 없고보면 애무는 부자연한 장난이며 실례이며 변태에 지나지 않고 독자들은 게으른 불감증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이렇게 말을 마친 그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규칙에 따라서 경기하는 운동선수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일격을 가한다. 그러니 나이 26세의 차이가 나도 서로 정중하면서도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퇴계 이황과 기대승의 논전이 도리어 이제는 낯설기만 “다른 사람들의 규칙”이 되어버렸고 그 쟁쟁한 토론의 실체는 손에 만져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여행하는 이론들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될 것인가를 놓고 거유(巨儒)와 신진 사대부의 격론이 이제는 왜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아득한 역사의 사소한 장면이 되어버리고 말았을까?
지금 이 세대는 《월터 미뇰로(Walter Mgnolo)》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가지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The Idea of Latin America)》는 서구근대 문명에 내포된 식민지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를 직시하면서 지적 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바로 그 식민지성이 근대성의 포장을 하고 우리 내면에서 끝없이 확대심화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종속이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별반 새롭지 않기도 하겠으나 이걸 우리의 지적 현실에 대입해보면 만만치 않은 과제가 도사리고 있다. 해서 그는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제3세계로 여행을 가는 이론”이라는 제목의 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론은 여행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론은 여행을 하지 못한다. 본래 태어난 곳에서 그냥 평생을 지낸다. 반면에 이른바 중심에서 생겨난 이론들은 여권을 가지고 어디든 간다.” 그것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말이다. 이 여행하는 이론 내부의 식민지성을 간과하게 되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철학자이며 미뇰로와 뜻을 같이 하는 엔리케 뒤셀의 말처럼 “원주민들의 영혼은 착취당하고 기만당한다.”
- 열두 척이 남았더라도 “21세기 조선학”을 향해
결국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먼저다. 그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힘을 익히고 그 힘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배움이 하나가 될 때 정신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기 말로 자기 세계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니면 자기 몸과 맞지 않은 남들이 세운 규칙을 배우고 익히느라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걸 보편의 법칙이라고 착각하고 만다. 서구 제국주의 역사의 산물인 국제법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이에 저항하는 논리와 운동은 깔아뭉개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소리의 세계적 가치를 온 세상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곧 세상에 널리 복이 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인내천(人乃天)”은 우리 안의 민주주의 사상의 뿌리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이 이만큼 놀라울 수 있을까?
“금유전박 (今有戰舶) 상유십이(尙有十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고된 토로이다. “아직 열두 척의 전함이라도 남아 있으니”
우리의 주체적 각성에 이르는 “21세기 조선학”을 탄생시키는 여력이 비록 이처럼 미약하다 해도 문명전환의 대격변이라는 현실 앞에서 비로소 해볼 만한 시기가 온 것이 아닐까? 지금 인류는 더 이상은 산업자본주의의 인간과 자연의 약탈 시스템을 용인하면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함과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아왔던 조선 사상사의 구구절절한 이력은 경이롭다. 지식인 한 사람의 지적 체계 내부에 문학, 철학, 천문, 지리, 경세, 역사, 정책, 병법, 언어, 음운, 토지제도, 선술(仙術)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 이 뛰어넘기 어려운 총체적 인식과 지적 보고를 내버려 둔 채 무얼로 우리를 채우려 드는 걸까?
갈 길은 멀다만, 그 여정에 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이걸 우리의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도록 한다면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풍요해질 것이다.
“의식”은 심리학과 생물학의 차원을 넘어 역사와 지리, 인간과 사회의 씨줄날줄이 담겨 있어야 탄탄하게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