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사면 건의 뉴스가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다. 숱한 이슈를 집어삼키며 우뚝 솟았지만 새로울 게 없다. 시대감각에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인식하고 있듯이 대통령의 특별 사면권은 늙수그레하다. 대통령이 특정인을 지정해서 사면하는 것이지만 그 대상은 전직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 등 소수 특권층에 한정된다. 사회를 통합하고 화해시키기보다 갈등을 더욱 심화한다. 불평등을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하다. 누가 봉건적 군주 시대의 잔재인, 폐지하거나 제한해야 마땅한 대통령의 특별 사면권을 들먹이는가? 당사자가 다름 아닌 민주당 대표라는 점에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의 중요 직책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촛불 혁명은 감각의 혁명이 아니었던가? '저, 궁궐 속 권력 놀음은 너무 천박하고 낡았어! 우리가 다양성 속에서 개성을 즐기고 있는 마당에 쪽팔리게 저게 뭐람?' 시민들의 자신감, 새로운 감각에서 비롯했기에 촛불 혁명은 하나의 축제였다. 폭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가르치려드는 엘리트나 특정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운동권도 녹아들뿐이었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자유로운 개
힘겨운 격동의 시간이 가고 신축년 새해아침이 왔다. 연간지 경기예술이 2007년 중단되었다가 2020년 복간됐다. 경기예술지를 펼쳐드니 ‘예술인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 ‘과연 예술의 장(場)에 기록을 남겼으며, 예술가로서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었는가’ 하는 심사를 가져다준다. 신종바이러스 균으로 혼란했던 격동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미생물에 대한 고민은 보이질 않고, 위기만 모면하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류는 정보화를 넘어 AI문명의 시대가 왔다. 복지문화 혜택을 넘어서 자연의 재해를 이기려는 좋은 정책들도 있지만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유산보다 빚만 안겨줄 정책들이 더 많아서 어떤 두려움들이 밀려든다. 여기에 인간의 잔혹성과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늘어난 모습을 목도하자니 불안하기까지 하다. 신종코로나 확산의 두려움보다 ‘정말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신축년! 따끈한 잉크가 묻어나는 예술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묶어낸 양장본 4백장의 기록을 넘긴다. 복간의 기회를 마련해준 이재명 경기도지사, 장현국 경기도의장, 고군분투하신 김용수 경기예총회장께도 감사를 드린다. 송소영 편집총괄 기획실장과 김영희 편집주간(詩人)을 비롯한 필
자작나무 숲이 눈 속에 묻혀 있는 사진을 본다. 폭설이 주는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겪어보지도 않은 러시아의 겨울인데 상상만으로 이미 샤프카라고 불리는 털모자와 함께 두터운 옷을 당장 꺼내 입어야 할 것 같다. 꽁꽁 언 굵은 수염에 긴 외투를 온통 걸친 장대한 사나이가 거침없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느낌이다. 동장군(冬將軍)이다. 고골의 <외투>는 그런 혹한(酷寒)의 현실에서 태어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단다.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강철같은 바람 가릴 길 없는 빈궁의 구덩이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의 뼈아픈 서사, 그 기원에 대한 증언이다. - 외투를 빼앗긴 사람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만년 9등관 하급관리는 성실하나 남루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고 있던 외투는 더이상 수선해봐야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낡아 그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형편에 넘치는 돈으로 새 외투를 산다. 무척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강도에게 외투를 강탈당하고 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고통이 엄습해온다. 끈많은 상류계급도 아닌 터에 황량한 도시에서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모를 말단관리를 지켜줄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나라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수많은 인파가 새해 출발을 자축했던 1년전과는 달리 극도로 제한된 소수 인원만이 참가하는 조촐한 자축으로 새해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모습은 달랐다. 김일성광장에 수많은 평양시민이 모여 유명 아이돌 야외공연과 같은 경축공연과 불꽃놀이로 새해를 맞이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8차 당대회 참가를 위해 평양에 모인 당 대표자들과 함께 새해 첫날 0시에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는 행사로 새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매해 6시경에 발표했던 장문의 신년사 대신에 단 한 장의 짧은 친필서한으로 신년사를 대신하였다. 지난 해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를 생략하였고 그 이전 해에는 소파에 양복차림으로 앉아서 서구 정상처럼 신년사를 연설이 아닌 이야기하듯 하였었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10대 시절에 스위스 베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물설고 낯설은 이국땅에서의 생활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한 유학생활과는 다른 생활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서구의 생활상이 북한의 생활상과 확연히 다르고 북한의 저개발에 대한 아쉬움
사회적협동조합이란 ‘지역주민들의 권익·복리 증진과 관련된 사업을 수행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협동조합’을 말한다(협동조합기본법). 2020.12월 기준, 사회적협동조합은 총 2572개가 있으며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481개, 교육서비스업 370개, 도소매업 319개, 예술·스포츠·여가 서비스업 247개, 농업·어업·임업 172개, 사업시설관리·사업지원서비스업 151개, 제조업 146개,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136개, 협·단체수리·기타개인서비스업 111개, 전기 가스 증기 수도사업 84개, 출판·영상·방송·통신·정보서비스업 83개, 숙박음식점업 68개, 부동산임대업 562개, 건설업 48개, 운수업 43개, 하수·폐기물처리환경복원업 22개, 공공행정 16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경제 성장과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정관의 주 사업을 관할하는 중앙행정기관장에게 설립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아야 한다. 기관별 인가현황을 보면 보건복지부 823개, 교육부 437개, 고용노동부 309개, 문화체육관광부 193개, 기획재정부 121개, 국토교통부 120개, 농림축산식품부 99개 순이
한 방송국의 심층 프로그램이 촉발한 ‘정인이 사건’에 대한 논란이 새삼스럽게 신년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네요. 고작 생후 16개월 된 아기 정인이가 악마 같은 양모(養母)에게 짓밟혀 사망한 지 8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온 사회가 들고일어난 시끌벅적 난리가 몹시도 불편합니다. 왜냐면, 이렇게 들썩들썩 법석을 떨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돌아서서 까맣게 잊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지요. 눈웃음이 예쁜, 천사 같던 아기 정인이는 과연 누가 죽인 걸까요. 정인이는 2019년 6월에 태어났지만, 친부모 양육이 어려워 그해 7월 일단 위탁모에게 맡겨집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0년 2월에 입양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새엄마 J모에게 입양됩니다. 그런데, 불과 1개월 이후부터 새엄마는 장시간 아이를 빈집에다 버려두는 등 16차례나 방임합니다. 비극은 잇따라 일어납니다. 5월 25일 정인이의 몸에서 멍 자국을 발견한 어린이집 교사가 아동학대 의심 신고를 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잘 키우라는 당부만 하고 보냈습니다. 6월 29일 무더운 날 승용차 안에 방치된 정인이를 발견한 시민이 신고했지만, 이번에도 경찰은 그냥 넘어갑니다. 9
이강석의 돋보기란 코너는 경기신문의 컬럼란이다. 원고지 5매, 1000자를 쓰는데 작은 제목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과 현실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를 의식하면서 정리하는 곳이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장황하지 않은 간결한 사례를 들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에 대한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매주 매일 여러 언론사에서 여러 명의 논설위원들이 그날의 상황이나 시대상을 보면서 역사와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현재는 이러하니 미래에는 잘해야 한다는 글을 쓰고 있다. 회사를 대표하는 사설, 시대를 이끄는 글이니 큰 고민이 담는다는 의무감이 높다.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몇 번 말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이야기 소재가 바닥나면 이미 했던 말이 겹치게 된다. 독자들은 매번 새롭게 보겠지만 편집기자나 담당 기자는 중복되면 지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초벌 원고를 쓰다가 황급히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을 수십년 해오신 언론사의 논설주간, 논설위원님들의 마음속에서는 아마도 좋은 글을 쓰려는 에너지도 있지만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구사하려는 변별력의 DNA도 필요하겠다. 스스로 객관성과 대중성, 다양성에 비중을 두려면 寸鐵殺人(촌철살인)
‘코로나 19 시대 인간 본질 탐구 보도 필요하다.’ 《미디어 오늘》 1281호(2020년 12월 23일자) 사설 제목이다. 고려대 미디어학부 박재영 교수의 “사건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인물이 있고, 인물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질이 나온다.” 라는 글에서 영감을 받은 제안이다. 여기서 본질이라는 것은 물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substance)을 따지자면 주기율표에 기록된 원소들 중에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을 상기하게 된다. 이 원소들은 모두 별의 잔해들이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 본성(nature)의 탐구 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일단 제안을 수정하기로 한다. 코로나 시대와 관계없이 언론 보도에서는 인간 본성의 탐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지만, 기자도 인간 본성의 탐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흥미 본위의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는 보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오돈수의 깨달음도 아니고, 사건의 인물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인간의 본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타고난 것인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인가? 사회과학 연구자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이영춘 약력 『월간문학』(1976) 등단. 시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들풀] 외 다수. 수상 고산(윤선도)문학대상, 유심작품상특별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김삿갓문학상 등
나는 경기도 파주에 산다.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가 이런저런 플래카드를 보게 된다. 거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결사반대” 다. 무슨 화장터, 무슨 특수학교, 무슨 공장 뒤에는 어김없이 “결사” 반대란다. 뭐 반대하는 것이야 민주사회에서 정당한 의사표시니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금 유감인 점은 “결사”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의 무게를 아는 것일까? 진정으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초반, 나는 ‘행남사’라는 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고되었다. 93년 봄, 전국의 해고자들이 모여 ‘전해투’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전국을 돌며 복직투쟁을 할 때의 일이다. 노동청 점거농성을 했는데 청장이 면담에 응하지 않자 노동청 창문 난간에 매달려 투신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3층인가? 4층인가? 막상 유리 창문을 열고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떨어지면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겁이 덜컥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동지들은 벌써 난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비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