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적 생활을 보내는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 행복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부정은 바로 행복이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이다. 만약 그가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더욱 더 선인이다. 나아가서 그가 선을 행한 상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최고의 선에 도달한 것이며, 그 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잇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계속함으로써 받는 고뇌의 증대뿐이다. 또 만약 그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 된다. (라 브뤼에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예수) 아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감옥이 우리의 육체의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아집은 반드시 우리의 행복을 빼앗는다. (류시 말로리)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게…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른다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지식인들의 논리 정연해 보이는 말들은, 때때로 어떻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의미를 언어에 부여함으로써,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고 하는 매우 솔직담백한 말이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 인간의 무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현자만이 도달하는 깨달음의 무지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것저것 거죽만 핥은 얄팍한 지식을 갖고 대단한 학자인 양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바닥 민중은 그들의 허황됨을 알고 경멸한다. 그러면 그들은 민중을 무지몽매한 무리라고 경멸한다. (파스칼) 가장 나쁜 것은 깊이 고찰된 사상에만 어울리는 특별한 언어를 사용해, 함부로 자신의 사상을 얘기하려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쉬운…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시민 15만명 앞에서 행한 그 연설을 지켜보면서, 이제 남북의 실질적 평화시대, 나아가 남북연합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 조였던 기억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분단 70여년의 역사가운데 그 날처럼 한반도 평화의 꿈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실감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문재인정권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해 김정은위원장 신년사와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 이 후 특사파견에 따른 북미정상 만남의 주선과 4·27 판문점 남북정상의 만남에 이은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실현, 결과물인 합의문에서 북이 그간 그렇게도 바라왔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북미관계수립이라는 성과를 얻게 되면서 우리 문재인정부의 중재능력과 대미 영향력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린 결과가 평양 5.1경기장에서의 문대통령 연설이었다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1년 남은 이 정부가 ‘꽃피는 봄날’을 다시 보고 싶다면 현 상황에 대한 바른 인식과 대안책을 강구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지난 달 북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와 이후 최선희 외무성제1부
지난 13일 오전, 일본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발전소 부지 내 탱크에 저장해오던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기로 각료회의에서 최종확정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과 유엔도 유감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내에서의 ‘퍼블릭 코멘트’라는 의견공모에서 조차 “방사성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전 세계인을 피폭자로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70%가 바다 방류를 반대 하였지만 이러한 모두의 우려섞인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한 독선적 판단임이 분명하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명백한 전범국가이다. 본인들의 군국주의 야망에 사로잡혀 전 세계, 특히 동아시아 국가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일으켜 전 세계를 불행의 그늘로 몰아넣은 것이 고작 70여 년 전이다. 전범국으로 본인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며 국제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아 본인들의 과오를 씻어내야 함에도 이번에 일본은 또다시 타 국가에 위해를 가하는 이른바 ‘또 다른 방식의 세계대전’으로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전범국가는 어떠한 태도인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타인을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만인 속의 인간적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 존엄성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칸트) 노동자들의 복지문제에 대해 권력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들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거만하게 말한다. 노동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거만한 말투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욕보다 더 모욕적이다. 노동자를 지극히 동정하는 듯한 그들의 말투 속에서, 원래 노동자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반드시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편견을 엿볼 수 있다. (헨리 조지) 민중에 대한 보호는 어느 시대에나 폭력에 대한 구실이었고, 군주제와 귀족제를 비롯한 특권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구실이었다. 심지어 공화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인간이 가축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나중에 그 힘과 살코기를 이용하기 위해 가축을 보호할 뿐이다. (헨리 조지) 사람들은 소심하여 늘 자신을 비하하기만 한다. ‘나는 존재한다.…
떨어진 목련은 걸음마도 못하고 죽은 아기 발바닥 같다 어떤 어미가 있어 잘 드는 칼로 죽음의 발바닥을 벗겼을 것이다 목련나무 아래 한 겹 두 겹 내려놓고 아장아장 걸어가길 한없이 빌었을 것이다 목련나무 아래 사월에는 발도 없는 아기가 와서 발바닥으로만 발바닥으로만 하얗게 걸어다닌다
“우리 때는 공장에 가는 학생의 수가 많은 대학 순서대로 명문대였는데, 지금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시험도 거부하며 반발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순서대로 명문대다.”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드는 8090년대의 청년들은 이 시대의 20대 청년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1980년까지 대학생들 대부분은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80년대의 대학생들이 제 옷깃에 달았던 대학 배지를 스스로 뗀 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은 80년 5월, 광주가 짓밟히는 것을 외면하고 침묵했던 자신들이 정의와 진리를 표상하는 대학의 배지를 달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80년대 청년들의 힘은 반성을 실천으로 옮긴 결단과 행동력이었다. 모든 언론이 광주민중항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만행으로 도배질을 하고 있을 때,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우다 제적당하고, 감옥으로 간 것이 80년대 청년 학생들이다. 고작 ‘가리방’으로 등사한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개처럼 두드려 맞으며 끌려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검사와 판사들이 구형하고 선고한 형량을 합하면 몇 만 년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감옥으로 간 숫자보다 더 많은 대학생이 졸업장을 포기
지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었는데, 신문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신뢰의 추락이 그것이다. 편파보도와 허위 선동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오랜 불신에 이어서 부수조작으로 더 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최근 드러난 대규모 부수조작은, 지금까지 구독의 대가로 자전거와 비데를 제공하고 나아가 현금 살포로 부수를 늘리는 수준을 넘어선다. 최근 방송 보도를 보니 조중동을 비롯한 자칭 우리나라 유수 신문사에서 발행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문뭉치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팔려 나간다는 것이다. 이제는 심지어 동남아시아로까지 폐지를 넘겨야 할 만큼 발행부수를 더 늘린 셈인가? kg당 5백원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신문의 유료부수를 조사하는 기관인 한국ABC공사가 집계한 각사의 유료부수는 정책광고를 수주하면서 정부로부터 받는 요금을 결정하는데, 이 자료 자체가 엉터리이다. 각 신문사가 자신의 부수를 크게 부풀려 허위보고를 하는데도 이에 대한 실사는 하지 않는다. 발행부수가 모두 유료부수인 것처럼 속여 ABC협회에 보고해도 당국에서 그 실태를 검사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누가 순수 유료부수만을 보고할 것인가? 오죽하면 부수공사 사무국장을 지낸 사람이 이 같은 잘못된 관
20년 전에는 우산 없이 등교해서 비가 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비 사이로 뛰어가는 축지법을 쓰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없어서 그냥 맞고 갔다. 어둑어둑한 학교 정문에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처럼 우산도 데리러 올 부모님도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게 되면 급하게 뛰어서 집으로 갔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우산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벌이는 곳도 있고, 교실에 남아 있는 우산들이 4~5개씩은 있어서 담임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우산을 빌려준다. 없으면 옆 반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아이 손에 우산을 들려서 보낸다. 그러니 아이가 비 맞는 걸 강력하게 원하지 않는 이상 혼자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집에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봄비가 내렸던 며칠 전 일이다. 퇴근하려고 나가는 데 정문 앞에서 3~4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머리를 신발 주머니로 가린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집에 못가나 싶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태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