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로 십장생 중의 하나이다. 그러다보니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풍습은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문화유적 곳곳에서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만날 수 있다. ‘경(敬)은 선비가 깨달음을 얻는 성인이 될 때까지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멈추면 안 되는 것’으로, ‘성인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기 위한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마음가짐’이다. 또한 ‘학문과 도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덕을 쌓는 중요한 기틀’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敬)’자를 바위에 새겼다는 것은 이 곳에서 학문하는 유생들이 풍류를 취하는 그 순간에도 학문을 위한 근본적인 마음가짐만은 내려놓지 않기를 바라는 주세붕의 염원이 담겨있다 볼 수 있다. 주세붕은 “옛말에 ‘경은 구차함의 반대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다면 이것은 곧 불경이다’라고 했다. 이는 실로 우리 회헌(안향)선생이 회옹(주자)과 부합되는 것이니, 더욱 새기지 않을 수가 없다. 사당은 비록 오래 보존되지 못하더라도 이 글씨가 마멸되지 않는다면 1천년 후에 이 바위를 일컬어 경석이라 하는 것에 족하다”라고 바위에 새긴 뜻을 밝혔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같은 바위에다가 ‘백운동(白雲洞)’이라
찬바람 휘휘 돌아치는 겨울이 오면 문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단어가 있다. 따끈따끈한 온기에 언 손 살살 녹아내리는 그 순간의 포근함 같은 ‘아랫목’이라는 단어. 요즘은 보다 발달한 다양한 형태의 난방으로 딱히 아랫목 윗목을 구분하진 않지만 그 옛날 온돌방의 ‘아랫목’이란 아궁이 가까운 쪽의 방바닥을 이르는 말이다. 연탄을 때는 아궁이든 군불 때는 재래식 아궁이든 아궁이 가까운 쪽의 방바닥이 가장 먼저 따뜻해지고 오래도록 식지 않아 추운 겨울이면 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더더욱 비중이 높아지는 아랫목의 역할은 참으로 다양했던 것 같다. 밤늦게 귀가하시는 아버지 고봉밥을 담요에 돌돌 말아 이불 밑에 묻어 둔다거나, 감기로 콜록대는 막내 동생 담요 깔아 눕히고 병간호할 때는 특급 병실로 쓰인다거나, 명절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혜를 만들기 위해 고두밥에 엿기름 섞어 몇 시간이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묻어 발효시키는 공간으로도 활용되는 등등. 그 밖에도 수많은 아랫목의 역할 중에 가장 큰 역할은 가족들의 사랑을 거듭 확인하는 ‘사랑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이 많았던 우리 집은 겨울이면 특히 한 방에서 옹기종기 잠을 잘
11월 27일은 이소룡 탄생 80주년이다. 이소룡 사후에 있었던 신드롬 현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에도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여기저기에서 있었고 그의 탄생 기념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를 기리는 ‘브루스 리 데이(Bruce Lee Day)’ 행사가 있어 왔다. 그동안 그를 모방하는 배우나 그의 영화를 패러디한 영화들이 수없이 양산되었고 할리우드에서도 <드래곤/Dragon> 등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기간 중에 CCTV는 <이소룡전기> 50부작을 방송한 바 있다. 그간 <브루스 리, 마이 브라더/Bruce Lee my Brother>나 그를 등장시킨 <엽문> 시리즈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영화 제작은 비단 과거의 일로 그치질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와 관련해 전 세계에서 신간서적이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그의 화보집이 지금도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책은 인류 사상 가장 많은 종류이며 판매량이다. 그의 캐릭터를 활용한 게임도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는 이소룡낙원(Bruce Lee Paradise)이 지어지고 그의 동상은 여러 곳에 건립되었다. 그중에서도 보스니아 내전 종식과 평화
아침형 인간으로 익숙해진 요즘에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행복이 있다. 어제 보낸 원고가 신문사 인터넷에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했을까 기대에 찬 마음으로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도 현대인에게만 허락된 새벽 삶의 방식이다. 동시에 가스 불에 올린 맑은 물이 소르르 끓어오를 즈음에 볶은 보리 주머니와 통 옥수수 알갱이를 텀벙 넣은 후 사르르르 끓어올라 재료의 색상이 물에 퍼지는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그 향을 느껴본다. 새벽에나 가능한 색과 향의 만남이다. 인간에게는 오감이 있으니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이라 하는데 술을 마실 때 청각이 알지 못해 술잔을 맞대어 짱하고 알려주기로 했단다. 5각 중에 후각이 가장 예민하지만 제일 먼저 마취가 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가 볶은 보리와 옥수수의 향은 주전자에 넣었을 때 잠시 동안만 강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 건배사에 주향천리, 인향만리라 크게 말한다. 이 술의 향기가 천리를 간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은 10배 더 먼 만리를 간다는 말이다. 술에 마음을 담아 더 멋진 미래를 만들어 내자는 다짐이다. 볶아낸 옥수수와 보리 알갱이의 부드러운 향도 주향처럼, 인향처럼 멀리 퍼진다. 곡물의 향을 느끼
코로나 이후 세대는 새로운 여건에서 새로운 사고를 하며 살 것이다, 코로나 위기 속에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다. 사회적 경제조직이 해야 할 새로운 역할들 역시 그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뿐 아니라 기후변화 같은 전지구적 위기는 여러 사회경제적 기회를 낳는다. 새롭게 오는 시대를 새로운 눈으로 봐야 한다. 코로나로 사회안전망이 뻥 뚤렸으니 세계의 시민들은 세금의 사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보장이 약한 나라의 시민들은 나라가 돕지 않으면 전쟁터에서 죽듯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내가 낸 세금으로 기본소득을 달라는 인식이 커져간다. 만일 기본수당을 받아야 할 취약인구가 많아진다면 그만큼 사회적 경제조직이나 시민단체, 비영리기구와 공익조직들이 할 일은 많아진다. 정부는 시민이 낸 세금을 그곳에 투여해야 할 것이고, 그 부분에 해당하는 공공시장은 그만큼 많아진다. 모든 일을 공무원들이 다 할 수 없으니, 행정은 민간의 봉사, 용역을 하는 파트너를 늘일 수밖에 없다. 세금으로 일 없는 시민이 공익적인 근로를 할 수 있도록 고용도 해야 하고, 세금으로 다 할 수 없으니 민간에게 노동을 나눠 맡기고 생계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장해야 한다.
최근 ‘아파트가 어때서’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문명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다’라는 부제의 양동신 님의 신간이다. 나는 작가에 대해서도 모르고 그의 책을 읽지는 못했으나 그 제목과 책을 읽은 리뷰 글을 보고 어떤 관점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그동안 통상적으로 선진국 특히 유럽의 주거 문화와 비교하여 한국 아파트의 고층화에 대한 비문명성과 비인간화에 대한 비평 글들이 많아 왔다. 천민자본주의의 욕망의 상징이며 성냥곽 감방이라는 아파트를 빌런화하는 표현들에 익숙하다. 경제성장이 그렇게 초고속으로 진행되지 않았으면 서울은 녹색 공간이 많고 주택은 유럽처럼 단독이나 저층으로 ‘우아한’ 랜드스케이프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고 독재 개발 역사에 아쉬워하는 문명인(?)들도 있다. 한강변을 보면 유럽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운치라곤 하나도 없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아파트들은 한국의 초고속 성장의 결과이기도 하나 동력이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적은 공간에 많은 우수(?) 인력의 집단 거주를 가능하게 한 건축 양식이며, 무엇보다도 빠른 시간에 시공가능하고 이웃 간 이동도 초스피드로 이루어지게 한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소비
“백신을 찾을 때까지는 이 혼돈에 맞설 최고의 백신은 식량이다” 올해 노벨평화상 주인공인 유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의 구호다. 식량은 생존의 필수품이며,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건강을 지탱해주는 원초적인 안전판이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기아 팬데믹’에 대한 경고음이 들린다. 국제 곡물 시장에서 밀과 콩, 옥수수 등의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생산 차질에다 코로나 여파로 물류난까지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콩.밀.옥수수 등이 20~40% 가까이 올랐고,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집계하는 유엔곡물가격지수도 2년여만에 최고치를 보였다고 한다. 올해는 지구촌 곳곳에서 초대형산불을 비롯해 가뭄.폭우.태풍.한파 등 유례없는 재앙들이 속출했다. 세계 식량 수입 2위인 중국 같은 경우는 양쯔강 유역의 홍수로 농경지가 초토화했다. 이같은 생산 차질에다, 인구가 집중돼 있는 북반부가 추운 계절로 접어들면서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멈춰질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 위협으로 식량을 생산할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고, 그나마 있는 곡물을 이송하려해도 국가간.지역간 봉쇄 조치 등으
수원화성의 4대문을 남문, 북문, 동문, 서문이라 하지만 본명은 八達門(팔달문), 長安門(장안문), 蒼龍門(창룡문), 華西門(화서문)이다. 1794~1796년에 정조, 정약용, 그리고 민초들에 의해 건설된 화성성곽은 5,743m이며 기와 53만장, 벽돌 69만장, 목재 2만6천주에 장인 1,845명이 참여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었다. 6.25전쟁중에 인민군 탱크2대를 숨겼다는 첩보를 입수한 UN군의 포격으로 장안문(북문) 목조부분 절반이 부서졌다. 최근 수원시가 미국의 6.25 전사자료 중에 수원관련 내용을 고증을 거쳐 5분37초로 압축정리하여 발표한 영상을 통해 장안문을 다시 보았다. 절반이 파손된 장안문으로 탱크가 지나가는 장면에 가슴이 아팠다. 이승만 대통령, 처치중장, 맥아더 장군의 모습도 영상에서 보았다. 조선22대 왕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를 화성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릉원이라 했다. 고종황제가 1899년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현릉원도 隆陵(융릉)이라 고쳤다. 훗날 부자가 함께 모셔진 이곳을 융·건릉이라 한다. 용주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갈양사였는데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 正祖(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화산으
월간칼럼이라 뒷북을 칠수 밖에 없다. 그래도 꼭 필요하다 생각하여 이번 칼럼은 대학입시 기회균형전형에 대한 신문의 보도프레임을 말하고자 한다. 교육위 국정감사 시 야당 국회의원의 “민주화운동 전형 특혜” 라는 주장에 대한 많은 신문보도에는 하나의 틀(프레임)이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불공정시비’, ‘부모찬스된민주화운동 전형’ 등 이미 기울어진 시각이 나타난다. 국회에서는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정치적 이슈제기를 하고 정쟁을 목적으로 한 질의가 있을 수 있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게 정치이기 때문이다. 신문은, 언론은 존재의미가 다르다. 정치의 부속품이나 이용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의 감시자다. 국정감사결과를 객관보도 한다고 그대로 옮겨 전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객관을 빙자한 불균형이자 불공정이다. 객관과 공정, 균형은 상치될 수 있다. 국회의원은 면책특권을 이용해 “아니면 말고”지만 신문은 어떤 권한으로 자사의 진영논리로 여론몰이를 하는가? 불공정 보도한다고, 보는사람 줄었다고 공영방송 KBS 수신료 가치를 비난하면서 신문 스스로에게는 사기업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행사하는 건 아닌지? 반대측의 진영논리를…
네이버와 다음의 언론사 진입과 퇴출을 전담하는 뉴스제휴평가위원회가 지난 13일 전체회의를 열어 수원일보 등 34개 언론사를 퇴출시켰다. 저널리즘 가치를 훼손하고 뉴스품질을 떨어뜨려 이용자들의 불편을 초래하고 기사를 위장한 광고행위로 부당한 이익을 추구했다는게 이들의 표면적 퇴출 이유다. 지난해 퇴출 언론사가 9개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올해 34개에 달하는 역대급 규모는 감히 ‘언론 대학살’로 불려질 만큼 중대사안인 만큼 도대체 그 배경은 무엇이며 어떠한 ‘게임의 룰’이 적용됐는지 자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제4부(府)로 지칭되는 언론의 기능을 무력화하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판에 최후변론의 기회는커녕 아예 참석 자체가 불허되고, 해당재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관련 회의록이나 발언록조차 공개되지 않는 비(非)민주주적이고도 폐쇄적인 징계절차와 방식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뉴스 어뷰징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불쑥 설립된 뉴스제휴평가위원회는 사단법인도 아닌 임의단체로 그동안 대한민국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을 해오면서 정작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는 ‘초법적 단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