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빗물에 젖은 낙엽이 사람들 발길에 밟혀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생각 없이 아침 산길에 나섰다 낙엽의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생명의 끝인 허(虛)와 공(空)과 무(無)를 떠올리게 된다. 공부하고 기도한다는 게 결국은 얼마나 부끄러움을 알고 살다 가는가?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헸다. 산길을 돌아 동물원 뒷산 숲 속 휴식공간에 이르렀다. 운동기구와 함께 장의자 세 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 앉으세요. 스티로폼을 놓아두어 젖지 않고 온기가 남아 있네요.”하고서 의자에 앉아 있던 분이 내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히 갈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은연중 그분 뒷모습에 시선을 주고 한동안 서 있었다. 회색 점퍼에 검은 바지, 반백 머리스타일과 하얀 운동화에서 노인의 온유함이 깊게 느껴졌다.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가로 50cm 세로 20여 cm의 직사각형 스티로폼에서는 노신사의 궁둥이 체온이 남아 있었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의 역사는 자리다툼의 투쟁이 아니었을까. 눈비가 내릴 때는 습기가 없는 자리, 추워지면 태양 볕이 잘 드는 곳.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너럭바위의 중심- 농본 사회의 아랫목 자리에서부터 장군의 자리와 졸병의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신의 영혼이 살고 있음을, 너에게 생명을 준 신의 영혼이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영혼이든 신성불가침 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 인간이 죽는 것이나 돈과 집과 재산을 잃는 것은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원래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재산, 즉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었을 때,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함과 분별심을 잃었을 때 비로소 불행해진다. (에픽테토스)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 속의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인간의 최고의 특질은 그가 정신적 안정상태에 있을 때 그 의식이 이성의 원천과 교류하여, 무한한 영적 생명과 융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원천에서 직접 영혼의 양식을 길어 올리려 하지 않고, 마치 거지처럼 고인 물 한 국자를 서로 동냥하고 있다. (에머슨) ‘나마스떼!’ 이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문안 인사드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인사는 ‘(밤새) 안녕하십니까?’이다. 이런 일상의 인사가 개인의 품격과 민족사상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경제
몇 달 전 야당 대표가 평화적 흡수통일이 자신의 통일방안이란 발언에 대해 많은 언론에서 비판이 쏟아지자 큰 혼란 없이 유야무야로 끝난 해프닝이 있었다. 근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의외로 평화적으로 북한을 받아들여(흡수하여) 통일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독일도 그렇게 통일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 오해가 너무 크기에 바른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먼저 ‘평화적’이라는 말과 ‘흡수통일’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흡수통일은 무력에 의한, 또는 북한자체의 혼란, 붕괴 등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전혀 평화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함이 우리 정책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가 최상의 국익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북한정권이 오래지 않아 붕괴할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를 갖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북한체제, 정권, 주민에 대한 바른 인식이 결여된 탓에 국제제재와 경제적 난관, 코로나 상황 등으로 북한정권이 오래 못 버틸 것이라는 기대 섞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의 사후 우리나라 북한전문가 설문조사에서 70-80%가 5년 내
코로나19(COVID19)로 인한 팬데믹(전 세계적 전염병 확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하고 있다. 낯선 숫자인 하루 5000명대의 확진자가 연일 계속되고 있으며 경기도에서만도 지난 토요일 1400명대에 이르렀다. 방역당국은 이번 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했고 경기회복을 간절히 기대했던 수많은 자영업자 절망의 한숨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아프리카발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바이러스의 발생은 우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오미크론 바이러스는 그동안 발견되었던 코로나 변이종인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바이러스의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며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변이 바이러스라고 발표했다. 더욱이 그 확산 속도가 엄청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보고되는 그 순간에 이미 캐나다에서 확진자가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나이지리아를 다녀온 부부에 의해서 오미크론 확진자가 퍼지고 있다. 백신 접종률이 2차까지 80%가 넘어 일상 회복을 꿈꾸었던 우리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전세계에서 우리 정도의 인구와 국력을 가
-드라마 <지옥>의 “시연”, 그 공포 사람이 죽는 걸 모두가 보면서 그를 구하려 들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거나, 또는 그걸 즐기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상황을 압도하면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걸 모두가 무슨 연극을 관람하듯 보면서 즐기거나 환호하기는 어렵다. 혹여 그러는 경우라도 바라보면서 공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공포의 작동과 지배”는 이런 현장을 주도하는 자들의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다.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은 연상호 감독의 드라마 <지옥>이 말하는 “시연(試演)”이 이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죽음이 미리 고지(告知)된 사람이 죽음의 사자(使者)에게 지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생중계하기조차 한다. 고지된 당사자에게 중계료 30억 원이 거래되는 일도 일어난다. 이왕 죽게 된다면 그 돈을 유가족이 되는 아이들에게 주겠다고 마음먹는 어느 엄마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지옥의 사자로 짐작되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이 사건의 비밀은 사실
5일은 1985년 UN이 제정한 ‘세계자원봉사자의 날’(12월 5일)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16회 자원봉사자의 날’ 기념식에서 수원시가 2021 대한민국 자원봉사 대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자원봉사 등 민간협력을 통해 코로나19 대응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수원시는 이에 앞서 2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자원봉사자의 날 기념식’을 열고, 헌신적인 활동을 한 자원봉사자들에게 표창과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수원시공유냉장고 시민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전복례 씨와 수원시다문화협회에서 활동하는 이상란 씨, 수원공군전우회시민봉사단 등이 표창을 받았으며, 예방접종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한 나눔사랑민들레, 나눔·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션킴모터스 등 단체는 감사패를 받았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다. 이들이 있어 사회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된다. 수원시는 우리나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모범적인 도시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빛났다. 마스크 품귀현상이 빚어지자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천마스크 5만 2000여 개와 마스크 분실방지 목걸이 3만 5
불륜과 혼외자. 드러나는 순간 사회적 인간으로서 종신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했다. 더불어 민주당이 대선 영입 인재 1호로 내세운 조동연 씨가 전국에서 날아든 돌팔매를 못 견디고 결국 사흘 만에 자진 사퇴했다. 조 씨 사퇴 후 ‘선출직 공직 후보자도 아닌데 과거의 사생활로 전 국민 앞에서 공격받고 망신당하는 게 온당한가’라는 질문을 곱씹는다. 정치와 국민정서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하자. 이제 그 현실에 손절한 이후의 조 씨와 아들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사회적 사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게 문학과 예술이다. 삶은 수학처럼 공식과 정답이 있을 수 없고 모든 문제는 시대, 문화에 따라 달리 해석되며 인간의 죄 역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이주일 이상 걷지 않고서는 그 인간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인디언 속담처럼 속단하지 말라는 게 문학과 예술이다. 사랑과 불륜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에서도 걸작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배경음악 때문에 나를 미치게 한 페드라(Phaedra)가 떠오른다. 남편의 전처 자식을 사랑한 비극, 그리스 신화 파이드라와 히폴리투스 이야기는 1962년, 미국 천재 감독 줄스 다신에 의해 영화화됐다. ‘천재 감독’이라는 찬사는
오늘날 전쟁이 무익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천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인들에게 그 해결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러 가지 행위를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연구해보면, 결국 다음과 같은 슬픈 생각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지상에서 악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으며, 군대의 존재가 그 악을 얼마나 조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군대제도라는 것은 원래부터 필요 없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 탓이며, 또 그들이 몇 사람밖에 되지 않는 교활하고 부패타락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움과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패트릭스 라로크) 이 지구상의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참으로 어리석고 생각이 얕고 둔감하여, 언론은 매일같이 가상적국에 대항해 군사동맹을 맺으려는 각국 수뇌들의 외교활동과 전쟁준비 기사로 장식되어 있고, 한편으로 국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듯, 마치…
우리 현대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주의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오히려 반역자들로부터 갖은 고문과 심지어 암살까지 당했던 뒤틀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는 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닌다. 76년 동안 민족국가 건설(nation-state building)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분단체제의 제한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주의를 탄압한 자들이 다름 아닌, 분단에 기생해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자들인 상황에서 더 무슨 말을 하랴! 여기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과 민중 생존권 투쟁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큰 틀의 독립운동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등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강제 분할이 만든 현실에서 민주화 운동은 앞으로 여전히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단은 민족을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민주주의를 압살했으며, 민족융성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창조적 에너지를 소진시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분단체제가 철폐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웅변하는 것이다. 허리가 잘린 긴 수난의 세월이 사회 곳곳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