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이은봉 모자가 생겼어요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에요 살가운 누군가 선물로 주었어요 모자를 준 당신이 엄청 좋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구름처럼 넓고 큰 모자 달처럼 높고 깊은 모자 당신을 머리에 쓰고 있으면 안전해요 핵우산을 쓴 것처럼 편안해요 아늑해요 두려울 것이 없어요 모자 속은 그윽한 동굴 속 같아요. 모자를 쓰면 항아리 속처럼 웅웅거리는 말, 안 해도 돼요 이제는 밤이 되어도 시름할 것 없어요 엄청난 모자가 생겼으니까요 모자를 쓰고 있으면 걱정 끝이에요 그래요 바보는 무서울 것이 없어요. ■ 이은봉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삶의문학』과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각각 문학평론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바람, 은여우』, 『생활』, 평론집 『시와 깨달음의 형식』 등이 있다. 가톨릭문학상, 송수권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광주대 명예교수와 대전문학관장으로 있다.
편견 /오세영 동면(冬眠)에서 막 깨어나 바깥세상 엿보다가 남향받이 제 토굴로 다시 드는 산토끼, 뵈는 것 북향능선의 잔설(殘雪) 밖에 없구나. ■ 오세영 전남 영광 출생. 1965~19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해 시집 『바람의 아들들』, 시조집 『춘설(春雪)』 등이 있다. 학술서적으로 『시론』, 『한국현대시인연구』 등 수십 권이 있으며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상 등을 수상했다.
눈물 같은 봄 /구순자 한강이 꽁꽁 얼어있다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강가에 빈 배가 정박해 있다 바람이 부딪쳐 넘어지다가 다시 일어나 눈을 털고 지나간다 얼음의 상태를 보고 가는 듯 하다 아! 이제 봄이오려나 저 눈이 녹으면 저 강이 녹으면 꽁꽁 얼어있던 내 몸이 벌써 내 눈물이 벌써 스르르 녹아내린다 ■ 구순자 1948년 충남 보령 출생. 『문예한국』을 통해 문단에 나와 시집 『겨울을 나는 장미』, 『이것도 시』, 『넝쿨장미가 있는 저녁』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마포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미술협회 회원이자 해바라기 동인으로 있으며 ‘프로스트 상’ 등을 수상했다.
로제타 /송진 치어를 살려주는 로제타 숭어를 먹지 못하는 로제타 우물 같은 배꼽을 지나가는 헤어드라이기 차가운 물속에 잠긴 한 알의 계란 무거운 가스통은 로제타 휴대 물통을 닮았어 로제타 물통은 배꼽을 닮았지 엄마의 젖꼭지를 닮았지 무언가 호스 같은 줄이 탯줄 같은 줄이 연결이 되어있어 물고기처럼 연분홍 아가미로 숨을 쉬어 LPG 가스처럼 연초록으로 타올라 누군가의 등에 기대어 낡은 소음의 오토바이를 타고 박자 틀린 드럼 소리에 맞춰 어색한 첫 춤을 추고 나는 혼자가 아냐 나는 친구가 생겼어 나는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나는 버터에 잘 구워진 토스트에 설탕을 바르고 친구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거야 그렇게 살 거야 그렇게 살 거야 나는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잘 자 잘 자 너, 로제타 나, 로제타** * 영화 ‘로제타(Rosetta)’를 시(詩)로 재구성함. 장 피에르 다르젠, 뤽 다르젠 감독 ** 로제타의 독백 ■ 송진 1962년 부산 출생. 1999년 <다층> 제 1회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집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 『미장센』이 있다. 계간 <사이펀> 책임편집인이자 한국시인협회 회
슬픈 것들의 감옥 /김병해 슬픈 것들은 항시 지름길로 온다 슬픈 것들은 장기투숙을 좋아한다 슬픈 것들은 빠르게 체세포분열한다 슬픈 것들은 입도 없이 왁자하다 슬픈 것들은 야간 통행금지가 없다 슬픈 것들은 슬퍼할 줄조차 모른다 아, 세상 모든 슬픈 것들 한데 모아 저들의 슬픔을 반성할 때까지 슬픈 감옥에 가두고 싶다 단지 기쁨의 열쇠로만 출구를 딸 수 있는 ■ 김병해 1955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서정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대가 나를 다녀가네』이 있으며 ‘미래서정’ 동인,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멸가치 인생 /김승기 누구 하나 따뜻한 눈길 보내주지 않아도 별 가치 없는 존재, 결코 아니에요 맛깔스런 봄나물로 반짝였던 날들 맵차게 그리워도 잊혀진 옛날 전혀 슬프지 않아요 당신만이라도 꼭 기억해줘요 빛이 바래갈수록 다시 크게 쌈을 싸 봐요 널따란 생이파리 하나만으로도 데치고 무치고 볶지 않아도 나물이 되는 우리 사랑 감싸 안을 존재의 이유 여전히 충분하다는 걸, 증명해 줄 거예요 잎이 무성한 여름 지나갈 때면, 보석처럼 빛나는 자신만의 색깔로 향기로 꽃필 거예요 저기 반투명 유리벽 너머 금고에 쌓아둔 지갑 속 행복한 신용카드 맑아졌다 흐려지고 흐려졌다 맑아지고, 우리 사랑놀이처럼 시소를 타고 있어요 한도 초과 않도록 어루만져줘요 그래야 가을에 열매도 예뻐져요 당신의 하얀 손수건으로 밤하늘을 닦아줘요 별 쏟아져 내리고 꽃이 돋아 올라 어두운 숲속을 팡팡 폭죽으로 터질 거예요 ■ 김승기 1956년 강원도 속초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해 계간 『詩마을』로 등단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한국의 야생화 시집 『그냥 꽃이면 된다』외 6권의 저서가 있으며 세계한민족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다 /유승우 푸르고 큰 눈입니다. 눈물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침이면 해를 낳는 기쁨으로 울고, 저녁이면 해를 잃는 아픔으로 웁니다. 울 때마다 피눈물입니다. 바다는 어머니의 눈입니다. ■ 유승우 1939년 강원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인천대학교 교수, 인천시민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인천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사)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한국문인선교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펜한국본부 고문이자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경희문학상, 후광문학상,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 창조문예문학상, 심연수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 『바람변주곡』,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를 출간했다.
버려지는 것들은 /박경남 형체도 없이 태어나 선택 받지 못한 서러움 시간을 멈추려 했던 순간들 쓰레기도 아닌데 환경을, 수질을 오염시키는 것도 아닌 잠시 머물고 싶은 남아 있다고 해도 돌아보는 이 얼마나 되는지 처음의 무소위로 돌아간다. 그렇게 미련 없이 사라진다. 버려지는 것들은 ■ 박경남 1956년 서울 출생. 2010년 아람문학 겨울호 시 부문, 2014년 아람문학 여름호 수필 부문으로 등단했다. 아람문학 카페운영자 및 시 분과위원 감사패를 수상했다. 수원문인협회, 아람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뻘길 /김세영 여자만 갯벌에 핏줄로 뻗어가는 붉은 길 자궁 내막에 뿌리내린 탯줄 같은 뻘길을 따라 몽당다리로 뒤뚱거리는 갓 태어난 거북이처럼 배지느러미 다리로 껑충거리는 망둥이처럼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아득한 내음 모유의 기억을 쫓아서 맨발로 달려가는 돌잡이 알몸이 되어 젖가슴 속에 들어가리라. ■ 김세영 1949년 부산 출생. 2007년 「미네르바」로 등단해 시전문지 『포에트리 슬램』 편집인을 맡았다. 시집 『하늘거미집』, 『물구나무서다』, 『버드나무의 눈빛』 등이 있으며 미네르바 문학상, 한국문협 작가상을 수상했다. 한국의사시인회 고문, 시산맥시회 고문, 성균관의대 외래교수로 있다.
오늘은 방콕에서 동네 한 바퀴 /정대구 그는 하루 한 번씩은 마을 안을 한 바퀴 돈다 아침마다 천천히 천천히 한 시간정도 그때마다 눈인사를 나누었던 녀석들 바로 집 앞에서 반기던 돌멩이 두 점 아랫마을 누런 늙은 길고양이 두 마리 건넛마을에 누렁이와 검둥이 윗마을 흰둥이와 그 새끼 세 마리 밭둑에 웅크린 검은 고양이처럼 보이던 비닐조각이며 늘 머리 위에서 깍깍대던 까치 한 마리 녀석들이 궁금하다 그는 녀석들도 그를 궁금해 할까 기다리고 있을까 빗속에서 비를 맞으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온종일 봄비가 칭얼칭얼 오늘은 방콕에서 동네 한 바퀴 ■ 정대구 1936년 경기 출생,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칼이 되어』, 『흙의 노래』, 『위대한 김연복 여사』, 『바쁘다 봄비』 등이 있다. 산문집 『녹색평화』, 『구선생의 평화주의』, 연구서 『김삿갓 연구』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