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김찬옥 듣기만 해도 좋은데 직접 부르면 더욱 더 좋은데 엄마- 엄마--- 자꾸 부르면 봄 햇살처럼 오시어 언 가슴에 손이 얹힌다 밭두렁에 앉아 풀꽃반지를 끼고 반지가 다 시들 때까지 들추어 본다 한 낮에도 아침 이슬이 풀잎 위에서 뒹군다 홍시 같은 단내가 입술 밖까지 발갛게 묻어 난다 채전 밭의 상치처럼 치마폭을 넓혀주는 이름 몇 억 광년이 지난 별자리처럼 어떤 자리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름 듣기만 해도 몸이 동하는 부르면 뜨거운 눈물이 먼저 답하는 새끼들 이름 앞에서 먼저 불러 볼 걸, 꽃신으로 갈아 신기기 전에 더 많이 불러 드릴 걸, ■ 김찬옥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물의 지붕』 『벚꽃 고양이』, 수필집 『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등이 있다.
젖바위 /강기원 나 죽어 바위가 되어도 젖가슴 한 쪽쯤은 너끈히 내어 놓으리 거무튀튀한 젖물로 갈기 무성한 태양과 알 같은 달을 낳으리 아랫배 차가운 여인들과 수태의 문 닫힌 늙은 여인들에게 마르지 않는 지층의 젖을 물려 가이아로 돌아가게 하리 아득히 돌아올 母神의 날들로 ■ 강기원 1957년 서울 출생. 작가세계를 통해 문단에 나와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지중해의 피>, 시화집 <내 안의 붉은 사막>, 동시집 <토마토개구리>, <눈치 보는 넙치>, <지느러미 달린 책> 등이 있다.
새벽 대청봉 /방순미 양양 산 1번지 첫 봉우리 올라 동으로 파랑물결 위 솟아오르는 핏덩어리 서산 끝자락 걸터앉은 달을 바라본다 달이 물젖은 해를 보고 해는 파리한 달을 보는 그 눈짓 엿보다 어느 곳 어느 방향 나, 갈 길 잃었네 ■ 방순미(方順美) 1962년 충남 당진 대호지 출생. 2010년 『심상』으로 등단해 시집≪매화꽃 펴야 오것다≫ ≪ 가슴으로 사는 나무≫ 등이 있다.2016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한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주자로 나섰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물소리시낭송회 나루문학 당진시인협회 생명포럼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죽비 /이명 서울역 뒤 중림로 오르는 길 구멍가게 앞 인도에 어디서 흘러왔나 축 늘어진 껍질이 수도승 누더기 같은데 정신을 내려놓고 육체를 버리고 노숙하며 벽에 기대 있는 깡마른 꼬챙이 하나 나를 후려치고 있다 ■ 이명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문학과 창작을 통해 문단에 나와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벌레문법』, 『벽암과 놀다』, 『텃골에 와서』, 『초병에게』, 시선집 『박호순 미장원』 등이 있다. 목포문학상을 수상했다.
비 내리는 날 /장진천 낙엽 스치는 소리 머물 곳 없이 떠난 이 오늘 밤에 내린다 호롱불 밝혀 신 새벽 기다리는 소리 없이 수배 당하는 이 함께 이 밤을 부릅뜨고 지내자 바람에 몸 둘 곳 없는 나뭇잎 비 맞아 축축해지는 시간에 우리도 질퍽거리며 비를 맞아보자 이 비 내리면 또 다른 한 계절 이루리니 ■ 장진천 1955년 전북 군산 출생.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석사, 문학광장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포천중 교장을 역임했고, 홍조근조훈장, 문학광장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협회 회원을 맡고 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의 바탕 /권지영 나는 그의 그림을 보네. 겨울을 견디고 2월의 유럽에서 제일 먼저 꽃망울을 틔우는 나무 쇠약한 신경으로 조카의 파란 눈망울을 생각하네. 단단하게 익은 상처의 가지마다 변덕스런 바람이 껍질 사이로 숨을 고르고 설익은 햇발이 연한 봄을 어루만지네. 사랑의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 하늘에 번진 코발트블루의 바탕 사이로 하얀 꽃이 아기 입술처럼 피어나네. 조도에 따라 조금씩 색이 바뀌는 그림들 아기 빈센트, 너는 나의 모든 사랑이야. ■ 권지영 1974년 울산 출생. 시집 『붉은 재즈가 퍼지는 시간』 『누군가 두고 간 슬픔』. 동시집 『재주 많은 내 친구』『방귀차가 달려간다』 등이 있다.
운문사, 봄날에 /김요아킴 담은 야트막하다 아침햇살로 기와를 얹은 성과 속의 경계는 한없이 낮다 수백 년 중생들의 고통을 처진 그리메로 대신한 소나무가 절집 마당으로 환하다 투박하게 합장한 마음은 솔바람 어슬렁거리는 산길을 쫓아와 엷은 풍경소리로 닿는 매화빛 화두, 댓돌 위 가지런히 놓인 비구니의 고무신들은, 벌써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겨우내 소리죽여 터뜨리지 못한 분심憤心들이, 일제히 꽃을 피운다 근엄하지 못한 불전의 대웅이 빙긋 웃고만 계신다 여전히 담장은 낮기만 하다 ■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해,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가야산 호랑이』 『어느 시낭송』 『왼손잡이 투수』 『행복한 목욕탕』 『그녀의 시모노세끼항』과 산문집 『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 서평집 『푸른 책 푸른 꿈』(공저)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며, 청소년 문예지 《푸른글터》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침엽 /김대봉 꿈꾸는 꿈속의 삶 새들이 자다 깬 모습으로 가르쳐준 춤 아프지 않게 아프지 않게 허공을 때려 박자 들썩들썩하는 밤 꿈꾸는 꿈속에서만 피었다 뚝뚝 땀방울 흘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동안 ■ 김대봉 1959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유심으로 문단에 나왔다.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 『테마가 몰려온다』, 『내 고고학의 한때』를 출간했다. 연금관리공단 지사장, 명지대학교 연구위원을 역임했고, 과천시도서관 강사, 한국시인협회 회원을 맡고 있다.
산벚나무 /이정순 도청 길 언덕빼기 벚꽃 축제 현수막이 입질을 한다 해마다 허릿심 근질근질한 산벚나무 가지가 휘도록 분탕질이다 발그레 떨어져 내리는 연분홍 실루엣들 게슴츠레 감겨오는 오감의 눈동자들 으밀아밀 달빛 그윽한 밤 산비탈에 바람 난 그림자 반쯤 벗겨진 치맛자락 펄럭이다 팝콘처럼 흩어지는 꿈, 같은 봄날이 다 간다 ■ 이정순 1962년 강원도 양양 출생.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해, 작품집 <아버지의 휠체어>를 출간했다.현재 수원문인협회 회원, 경기시인협회 회원이다.
봄, 가기 전에 /오현정 꿈은 해일을 넘어서는 생명이다 내 속에서 밀려오는 바라데로의 구름 네 속에서 넘치는 말레콘의 바람과 나란히 방파제를 넘어 은모래 야자수 아래 부르튼 발가락을 편다 모히또 맑은 잔 위에 초록 한 잎 띄우면 생과 사의 멀고도 가까운 마법의 부적 더 멀리 돛배를 저어간다 ■ 오현정 1952년 경북 포항 출생. 숙명여대 불문과를 졸업해 1989년 《현대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했다.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 『몽상가의 턱』, 『고구려 男子』 『봄온다』, 『에스더 편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등 9권을 출간했으며, 애지문학상, PEN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숙명문학상 등 다수 수상했다. 숙명여대 취업경력개발센타 문예창작 강사, 한국문협 이사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