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감정, 생각과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 중 하나이다. 눈물이 흐를 때 슬픔이나 감동을 나타내며 눈이 반짝이는 것은 기쁨이나 흥분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누군가의 눈빛이 차갑고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멀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창이라는 은유는 분리된 두 공간을 전제하지만 그 두 공간은 창을 통해서 소통이 가능하다. 마음의 창인 눈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눈을 통해서 외부의 것을 경험한다. 어떤 사건은 고통스러운 상처로 변환되어 창이 변형되거나 일부 닫히기도 하지만 또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치유가 일어난다면 창이 재건되고 열리기도 한다. 눈은 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발생학적으로 뇌와 같이 외배엽에서 분화되어 발생한다. 청각과 체감각이 관련되는 뇌피질이 전체 뇌피질의 3%와 11% 에 불과한데 비하여 시각정보처리에 관여하는 뇌피질은 전체의 55%를 차지한다, 12개의 뇌신경중 눈과 관련된 신경은 무려 4가지나 된다. 이쯤이면 눈은 뇌의 창이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실제로 눈을 통해서 뇌에 저장된…
허망함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죽음 너머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다. 삶에 발 딛고 죽음과 결별하는 마지막 절차가 장례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끼리 죽음의 아픔을 나누는 것처럼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고인(故人)의 영정(影幀) 앞에 조아리며 절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휘청거린다. 망자의 얼굴을 쏙 빼닮은 자식을 보고 있자면,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내가 당혹스럽다. 이리도 쉽게 화르르 태워지고 사라지는 것이 한 사람의 역사일 수 있을까. 빈소를 걸어 나올 때면,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흔들리는 넥타이 같아서 아찔하다. 진이 빠진다. 길을 잃은 세상에는 내일이 없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고? 한때, 그렇게 믿었던 내가 안쓰럽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사람일 수 있을까.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이 겨울은 내내 불면이다. 귀를 여는 것조차 겁이 난다.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을 조롱하고, 추모를 가장하여 구호품을 싹쓸이하는 그들도 사람이랄 수 있을까. 그것도 모자라 제주항공 참사를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것”이라 말하는 목회자는 또 어떠한가. 그런 목회자를 최고사령관이라 추앙하는 정치
‘악법도 법이다.’와 같은 법언(法諺·법 관련 격언)만 해도 으스스한데, ‘법 위의 법’이라는 헌법(憲法)이 있단다. 계엄-탄핵 사태에 어문학적으로 헌법을 톺아보자. 요즘은 ‘군사경찰’이지만, 예전에 헌병(憲兵)이라면 높고 낮은 계급의 장병들이 괜히 떨었다. 물론 그 이름은 왜놈들 치하의 찌꺼기(잔재)였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에 울려 퍼진 선언, 국민과의 약속을 헌 신발짝 삼은 권력에게 저 위엄은 추상이었다. 그래서 또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다. 헌재는 헌법을 다룬다. 헌병의 ‘헌’도 그 憲자다. 썩었다 싶으면 가을 서릿발처럼 대통령도 패대기치는 ‘어마무시’한 헌재의 시간이 다시 왔다. 다음은 헌법의 (사전적) 의미다. - 국가 통치체제 기초에 관한 근본 법규의 총체. 국가의 법의 체계적 기초로서 국가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법이며 타 법률이나 명령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최고 법규다... 憲자의 고대로부터의 뜻은 ‘법규(法規)’ 보다는 보배우는(보고배우는) ‘모범’에 가까웠다. 배우고 따라야 할 ‘길의 이치’ 즉 도리(道理)의 개념으로 생성(生成)돼 쓰였다(고 본다). 오늘날 憲의 훈(訓)과 음(音)은 ‘법 헌’이다. 法의 한 가
또다시 을사년(乙巳年)이다. 1785년 조선의 대기근,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 강탈,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수교 등 을사년마다 국가미래의 변곡점(inflection point)이 있었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21세기 첫을사년이 “을씨년스럽”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다. 태어난 때와 장소는 달라도 배달민족의 후예다. 부모와 성은 달라도 고유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은 역사적 존재다. 반만 년 전부터 동북아에 터 잡아 살면서 때로는 대륙으로 때로는 해양으로 들고나며 선진문물을 주고받은 사람들의 자녀다.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에도 예의(禮義)를 잃지 않았고, 법(法)과 무(武)보다 덕(德)을 소중히 한 민족이다. 이런 토양에서 위민(爲民)·애민(愛民)·여민(與民)을 실천한 성군(聖君) 세종(世宗. 1397-1450)이 나왔다. 조상들은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 유목과 정착, 농경과 상업 등이 뒤섞이는 오묘한 땅에 나라를 건국했다. 이(異)민족의 지배를 받거나 이(異)문화에 휩쓸린 때도 있었지만 독립국의 자유민으로 대대로 살았다. 3·1운동과 기미(己未)독립선언(1919) 이후 임시의정원과 임시
지난 2024년은 유례없는 폭염, 가뭄, 홍수, 태풍 등 기상이변으로 인해 지구촌은 무척 힘든 한 해를 보냈다. 피해 규모도 커서 유엔기후협약(UNFCCC,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기금의 구체적 제도화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여름도 역대급의 폭염과 관측 이래 최장의 열대야로 기후 위기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체로 이러한 기후변화에 대한 관점은 갈등하는 상반된 두 가지 논쟁으로 설명해 볼 수 있겠다. 기후 위기론과 기후 음모론이 그것이다. 우선 기후 위기가 지구를 종말로 몰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곧 기후 위기론자들의 핵심 논리다. 이들은 경제발전보다 환경보호가 우선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산업 발전과는 대치점에 서 있다. 선진국에서도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개발도상국들은 ‘죽느냐 사느냐’라고 하는 경계에 처해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대표되는 이산화탄소가 줄어들지 않는 한 지구는 금세기 안에 종말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21세기 접어들어 세계적인 흐름을 조성하며 UNFCCC를 통해 기후 위기를 둘러싼 세계 기구와 각국 정부의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젠슨 황은 지난 1월 6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기조연설에서 “인공지능(AI) 로봇의 대중화가 챗GPT처럼 시작되었다”라면서 ‘피지컬 AI시대’를 선포하였으며 AI 로봇개발 플랫폼인 코스모스를 공개하여 관심을 끌었다. 엔비디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이 핵심기술로 부상하면서 AI 반도체 세계시장을 80% 이상 점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올해 1월 3일 시총은 3조 5,38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엔비디아는 한국 기업과도 밀접하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손잡고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와 똑같은 혁신가인 젠슨 황의 말 한마디 파괴력은 크다. 그는 산업변화 흐름을 잘 읽고 있다. 세상은 이미 로봇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AI 반도체도 챗GPT 중심에서 AI 로봇 시대로 이전되고 있다. 이는 AI 반도체 기술이 언어모델 중심에서 피지컬 기능 쪽으로 급속하게 발전한다는 뜻이다. 엔비디아는 AI 개발 프로그램인 쿠다(CUDA)를 오픈소스하여 AI 반도체 시장을 제패했으며 이제 코스모스 무료 제공을 통해 로봇 대중화를 앞당기려고 한다. 쿠다
한국의 정치상황에 가려서 그렇지 프랑스의 시국도 엄청나게 시끄러운 모양이다. 지난 해 마크 롱이 낙점한 중도 우파 성향의 미셸 바르니에 총리를 트로츠키 주의자 출신의 극좌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대표가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과 담합해 불신임안을 성사시켜 몰아 낸 것이다. 이들은 마크 롱 대통령의 퇴진까지 몰아 붙였지만 마크 롱은 다시 중도 우파인 프랑수아 바이루를 임명해 고비를 넘겼다. 나치즘을 옹호하는 마린 르 팽의 국민연합에 왜 사회주의자인 멜랑숑이 협조하는지, 이쯤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상황이다. 정치는 늘, ‘앞단의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전체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프랑스 경제난이 대중들의 불만을 고조 시키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모두 이민자 탓, 자국의 노동권을 훼손시킨 탓이라는 식의 마린 르 팽의 주장은 ‘앞 단을 흐리게 하는’ 선동일 뿐이다. 프랑스 경제난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국 우선주의로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새 대통령 트럼프가 보란 듯이 그걸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이민자 억제, 계층 계급에 대한 차별적 경제 정책
다들 여행을 간다. 침대에 편히 누워 세상 온갖 정보를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현시대에도, 여행 인구는 늘고 있다. 필자 또한 여행을 좋아한다. 길고 짧은 일정, 국내외 할 것 없이 떠나고 싶다는 갈망이 가슴속에 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갈망은 어김없이 여행지에서의 만족감으로 이어지며 여행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할까?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여행길로 이끄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의 행위일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또 다른 이유로는 낯선 환경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은 호기심과 모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행은 해야 할 일을 잠시나마 하지 않아도 되는 ‘휴식’의 개념에서 사랑받는 것 같다. 여행이란, 결국 우리에게 ‘지금은 괜찮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라고 다독여주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남들도 그러하듯(아마도) 좋아하는 만큼, 자주 가지는 못한다. 잘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행동과 그 행동을 하는 빈도수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운동을 좋아하
느긋이 잘 자고 일어났다. 어젯밤 외롭지 않도록 친구가 보내준 음악을 듣고 마음을 정리한 결과이다. 잘 자면 다음 날 아침 기상이 상쾌하고 마음의 결이 부드럽다. 세상 또한 잘 살면 죽음 또한 그럴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오래도록 내 자리요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머물고 싶은 책상 앞에 앉았다. 멀리서 사는 아이들과 내게 강의를 받는 회원에게 덕담 문자를 보내고 산길로 들어섰다. 걸으며 생각하며 때로는 산속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학교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가서 고생하던 때였다. 나 없는 줄 알면서도 시골집을 찾아가 어머니에게 명태를 선물로 드리며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주고 돌아갔다는 배 업 선생이 떠오른다. 내 집 마련할 때 적금을 해약하여 자금을 빌려준 고향 친구도 생각난다. 속으로 이 친구를 만나서 그 말하며 식사라도 하리라고 마음먹고 메모를 한다. 그리고 내가 이 땅에 와 발붙이고 살겠다고 고민하며 힘들어 할 때 손을 내밀어준 분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제 혼자 사는 것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새 아침이다. 집으로 돌아와 올해의 독서 계획을 생각해 본다. '유머가 인생을 바꾼다'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 속에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가짜뉴스’ 대응에 유별났었다.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논란이 그랬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는지 밝히면 그만이었는데, 온 국민이 듣기평가를 하게 만들었다. 언론이 가짜뉴스를 내보내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면서 대통령실, 여당 정치인, 심의위원회 등까지 나서서 대통령을 대신해 언론을 탓했다. 심지어 전용기 탑승 배제라는 조치를 내리면서 “동맹관계를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고 악의적 행태를 보였다”며 언론사를 비판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비판 목소리에도 날선 반응을 보였다. 윤 대통령은 허위 선동과 조작, 가짜뉴스와 괴담이 정부를 흔들고 위협한다면서 반국가적 세력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가짜뉴스와 허위 조작 선동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가짜뉴스가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라는 인식은 상당하게 공감할 부분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생각하는 가짜뉴스 진앙지, 그러니까 허위 정보를 생산하거나 확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곳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던 것 같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유 중 하나로 부정선거론을 들고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부정 선거 의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