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결례? 누가 미안해야 하는가?
외교관계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걸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고 “결례”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최근 이재명 후보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발언에 대한 어느 언론의 공격은 “아는 체한다”였다. 실체도 없는 걸 가지고 이른바 “운동권적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과 세력은 정치적 공격을 위해 엄연한 역사적 진실조차도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더욱 역사논쟁을 벌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간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恩德)을 모르는 망덕(亡德)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는 “역사 지식의 틈새”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틈새”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황무지”다.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역사과목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낼 국민적 상식이 되어야 할 바가 단순 암기과목으로 처리되고 국영수에 밀려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이런 역사왜곡 전문가들의 기만이 통하기도 한다. 역사교육을 쥐고 있는 쪽이 그 사회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중대한 영역을 이 나라 국가교육 체계는 철저하게 외면한 결과 역사의식이 부재한 세대를 기르고 그런 사회를 만들고 있다.
역사의식이 비틀려 있으면 가장 먼저 진실이 타격을 받고 그에 기초해야 할 민주주의는 고꾸라지게 된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가르쳐지지 못하고 있다. 민족사의 비극과 그 비극을 돌파한 투쟁의 기억과 기록을 은폐하거나 짓밟은 일제 식민지의 의식 구조는 여전히 살아남아 위력을 발휘한다.
일제시기 한국의 정신사에 꽤나 깊은 지식과 이해를 보이면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처음 체계화한 다카하시 도루(高橋亨)도 퇴계를 따르던 유생(儒生)들을 가리켜 “한일합방을 전후로 하여 시류를 모르고 비분강개하던 선비들”이라고 비하한다. 여기서 ‘시류(時流)’란 바로 역사적 변화의 진실과 흐름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과연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제의 기만을 가장 민감하고 격렬하게 알아차린 선조들의 투쟁은 실학과 개화사상에 뿌리를 박고 이후 독립전쟁의 실체를 만들어 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지금 이마저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헤겔 변증법을 내놓은 수능 문제와 역사의식의 부재
2021년 수능에는 “헤겔의 변증법” 시험문제가 나와 주목을 끌었다. 헤겔 철학은 그의 신학,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 체계이자 “존재 변화의 운동법칙”을 규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헤겔 철학의 기본 텍스트다. 달리 말하자면 혁명적 사유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헤겔의 본령이고 그에 따라 이 핵심은 그대로 보유한 채 그 사유의 물질적 토대를 파고든 것이 마르크스다.
그런데 시험문제는 다층적 이해가 필요한 표상, 지식, 사유의 개념을 그것도 정확하지도 않은 문항을 내놓고 고르라고 해 수험생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이해가 완전히 결여된 사교육 조장 문제에 불과하다. 역사에 대한 긴장과 그로부터 창출해내야 하는 운동의 실체를 고민한 관점이었다면 이런 문제는 낼 수 없다.
-밀약과 청일, 러일 전쟁 그리고 한일합방
“동양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정 개선에 관해 그 충고를 받아들인다.... 군 작전상 필요한 지점을 일본이 수용하는 것을 대한제국은 받아들인다.”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일본이 한국에게 강압한 1904년 2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핵심내용이자 그 전해인 1903년 체결했던 말약(密約)의 확정본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고 이걸 세상에 알리기까지(8월 29일) 1주일간의 치밀한 정세관리 기간이 있었다. 조약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讓與)’한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황제가 스스로 일본의 황제에게 넘기는 걸로 만든 문건이자 그것도 “완전하고도 영구히”라는 내용이니 누가 봐도 가당치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심이나 간섭 또는 개입이나 제동을 걸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강제합방은 일본의 의사대로 추진되고 만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활용해서 만든 환경의 힘이 작동한 결과다.
달리 말해서 “조선의 식민지화”는 일본 단독의 선택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여기에는 두 번의 전쟁과 중국과 러시아 문제에 이해관계가 걸린 영국, 미국의 일본지원이 가장 중대한 요소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3국 개입”이라는 외교적 압박에 따라 일본은 자기들이 마땅히 얻을 수 있다고 여긴 ‘전리품’을 빼앗긴다. 특히 만주와 중국본토를 겨냥한 거점으로 일본이 획득해보려던 요동반도는 러시아가 대신 차지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적대감이 높아져 전쟁을 요구하는 기운이 비등해졌다. 그러나 곧바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만한 형편이 아니었던 일본은 사전에 외교적 지원 체제를 만드는 일이 긴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이 맺은 동맹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뤄진 외교적 협약이다. 이때 이미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이익”을 인정한다고 밝혔고 어느 일방이 외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지원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대단히 강력한 조약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쪽의 러-일 대치전선이 형성되는 것이 러시아의 힘을 분산, 약화시키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청일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이 종주국 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고 조선의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일으킨 전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일전쟁>의 최고 연구가인 일본학자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의 말대로 “전 아시아를 근대 제국주의 분할 경쟁에 끌어들이고 아시아 민중들을 유린하는 일에 일본 민중들을 동원한 시작”이자 “조선에 대한 일방적 지배권을 확보하는 제1단계 전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른바 “내정개혁”은 “조선 전토를 상품시장으로 개방”하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구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만주 진출”의 병참기지화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로 그 초점이 바뀌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동반도 장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강구하는 방편을 찾는다.
일본의 군국주의 기초를 세운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를 중심으로 펼쳐진 외교는 하바드에서 공부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가 맡았고 그의 대미활동을 통해 일본은 전시채권을 월가에서 풀어 5억 달라의 전쟁비용을 마련하게 된다. 이 시기 총리가 바로 가쓰라 타로(桂 太郎)로 1905년 7월 필리핀 정국 관리차 일본을 경유했던 미국의 국방장관 윌리암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그는 이후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된다.)와 밀담을 나누게 된다.
미국 외교사의 대가 윌리엄 라퍼버(William Lafeber)가 그의 책 <충돌(The Clash)>에서 전하는 이 시기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태프트는 디오도르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Alice)와 함께 일본에 도착했는데 일본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앨리스에게 쏟아졌고 이런 사이에 태프트는 가쓰라와 밀담을 나누게 된다. “태프트-가쓰라 밀약(secret agreement)”으로 알려진 조선-필리핀 지배 정책의 상호 승인이다.
-태프트-가쓰라 밀약
미국의 수정주의 역사가 윌리엄 애플만 윌리엄즈(William Appleman Williams)의 제자인 라퍼버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을 외교적으로 처음 승인했던 미국의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태프트의 일본 방문 목적은 러시아가 일본의 다음 목표는 필리핀이라는 말을 흘리자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본으로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행사에 미국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 밀담을 비망록 형식으로 루즈벨트에게 보고하자 그를 미국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한 루즈벨트는 “그대가 가쓰라와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옳다. 가쓰라에게 그대가 말한 말 한마디 한마디 전부 내가 승인했음을 알리도록 요망. (Your conversation with Count Katsura absolutely correct in every respect. Wish you would state to Katsura that I confirm every word you have said.”)”
이 비밀협약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미국의 역사학자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1924년 미국 의회도서관 루스벨트 문서보관소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 매사추세츠 “정치학회(Institute of Politics)” 회의에서 발표한 뒤다. 세계외교사에서 비밀문서가 공개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로 레닌은 민중들을 기만하는 비밀외교를 반대한다고 천명하면서였고, 공식적으로는 “고립외교(Isolation policy)”를 표방하고 있던 미국이 이런 밀약을 했다는 것이 알려질 경우 루스벨트는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이 사실이 공개되기 전 소문으로 떠돌자 루스벨트는 이를 부인하는 발언까지 했으나 이 밀약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타일러 데닛의 발표 이후 35년이 지난 1959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비망록(memorandum) 수준의 대화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레이몬드 에스더스(Raymond Esthus)는 이 문건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확정되었다기보다는 이보다 앞선 1905년 2월 이미 루스벨트는 확정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이 관점에 따르면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미 기정사실로 된 것을 추후 확인했다는 점을 주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건은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재명의 “태프트-가쓰라 밀약”발언을 공격하는 자들은 레이몬드 에스더스를 인용해 실체가 없는 문건을 가지고 외교적 결례를 했다고 비방하고 있다.
레이몬드 에스더스의 논문은 짧은 분량이지만 매우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쓴 논문이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이미 그전에 정책으로 정했다는 점을 밝혀 일독을 권할 내용이다. 그는 “루스벨트가 일본의 조선지배는 그 자체로서도 좋고 극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괜찮은 일이며 미국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보았다”고 정리하면서, 일본의 조선지배에 미국의 정책이 기본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준다.
우리가 처한 오늘의 현실은 과연 어떨까?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제관계에 의해 비밀리에 결정된 채 우리는 그 패권체제 위에서 말이 되는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럴 때 우리에게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태도가 절실하다. 대선판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논법이 은근히 스며들면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가는 주도권이 엉뚱한 자들의 손에 내맡겨질 수 있다.
진보적 정부가 들어서도 이 문제를 바로 잡아 축을 세우지 않으면 역사는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그저 과거지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