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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4>

‘맨발의 구도자’ 싯다르타-소설가이재운

 

그의 출가가 남과 다른 점은 중생의 구제를 먼저 생각했다는 점이다. 출가는 무한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얼켜있는 무한의 사슬로부터의 자기 해방이요, 생명에 대한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찬다카를 보낸 뒤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맨발로 길을 가는 이름없는 구도자가 되어 구시나가라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갔다. 따가운 뙤약볕을 받으며 맨발로 길을 걸었으며 끼니 때가 되어도 먹지 못하고 밤이 되어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이 당시의 싯다르타가 겪는 어려움은 사실 완전히 그의 탓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자청한 것이다. 왕궁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싯다르타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고난의 바다로, 거친 가시밭 길로 밀어넣었다. 자기에게 어떤 경험을 시켜주는가에 따라 그 ‘주인공’의 미래는 산으로도 갈 수 있고 바다로도 갈 수 있다. 싯다르타의 주인공이 싯다르타라는 육신에게 과연 어떤 경험을 시키고, 어디어디를 끌고 다닌 끝에 부처가 될 수 있게 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싯다르타는 발우를 손에 들고 걸식하면서 동남쪽으로 길을 잡아 구시나가라와 베살리를 지나고 갠지스 강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서울인 라자그라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바가바 선인, 카르마 선인, 라마푸트라 선인을 차례로 만나서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배우고 다시 히말라야 영봉이 바라다보이는 나이란자나 강변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싯다르타가 세 선인에게서 떠난 것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수천 년을 두고 침전된 인도인들의 ‘명상과 사유’의 앙금이 싯다르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수용과 반발을 마친 다음 절대적인 진리의 열매를 거두러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의 6년 고행은 껍질을 깨고 뛰쳐나오는 해탈의 진통으로 일관되었다.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기 위해서 눈의 기능을 철저히 무시하여 심안(心眼)을 열어야 했다. 듣지 못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도 귀의 기능을 부정하고 마음의 귀를 열어야 했다. 이러한 수행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신체의 기능을 부정하기보다는 파괴에 더 역점을 두었는데 그러나 기본적인 사유 기능마저 잃을 위험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싯다르타는 고행에서 실패하고 새로운 수행법을 찾아야 했다.

생로병사와 본능을 지닌 육체를 가지고는 올바른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고행이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은 그것의 극복이 아니라 도리어 육체에 의한 또다른 구속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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