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는 어려서부터 절에 드나들었다. 출가한 것도 열두 살 때의 일이므로 일찍부터 깨달음의 길을 간 셈이다.
마조는 스님이 된 직후부터 남악의 전법원에서 매일 좌선을 했다. 그러기를 수년간, 우연히 들른 회양이 마조를 보고는 그가 큰 그릇임을 직감하고 다가가 물었다.
“애기 스님, 뭘 얻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좌선을 해?”
“부처가 되려고요.” “흠, 그래?”
회양은 바로 나가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가 마조가 보는 데서 바위에 올려놓고 갈기 시작했다. 그럴 뿐 말이 없자 답답해진 마조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 뭘 하시려고요?” “응, 거울을 만들려고.”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나요? 암만 갈아도 벽돌은 거울이 안돼요.” “그렇겠지? 암만 좌선해도 부처가 되는 건 아니지.”
한 방 맞은 어린 마조가 물었다.
이때는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성불(成佛)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좌선도 유행할 때가 있고, 시들할 때도 있다.
“아이고, 스님. 저는 그럼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되겠습니까?”
“마차가 가지 않으면 수레바퀴를 때려야 할까, 소를 때려야 할까?” 마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깊은 뜻에 그만 말문이 막힌 탓이다. “자네는 앉은뱅이 부처가 되려는가? 머물 곳이 없는 게 법(法)이거늘 너는 취(取)하고 버리려는 생각을 했어. 그러지 말아야지. 만일 앉은뱅이 부처가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부처를 죽이는 일이고, 앉아 있는 데만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끝내 통달하지 못해.”
마조는 마치 감로수를 얻어 마신 듯 심신이 다 상쾌해졌다. 그는 얼른 회양에게 엎드려 예를 올리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쓰면 무상 삼매(無常三昧)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회양이 대답했다. “자네가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은 땅에 씨를 뿌려지는 것 같고, 내가 법의 원리를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맞았으므로 머지 않아 도(道)를 보게 될 것이다.”
마조가 다시 물었다. “도(道)는 빛이나 형상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을 보는 눈이라야 도를 볼 수 있지. 무상삼매의 경우도 그렇다.” “도는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까?”
“만일 이룸, 무너짐, 모임, 흩어짐 따위로 도를 보면 그것은 도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내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의 밭에 여러 씨앗 있으니 / 비가 내리면 모두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형상이 없으니
어찌 허물어지고 어찌 이루어짐이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