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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69>-깨달음의 길

남전의 선문답-소설가 이재운

 

저녁이 되어 그 스님이 남전의 방장을 두드렸다.

“화상께서 아까 기왓조각으로 저를 때리심은 깨우치라는 뜻이 아닌지요?”

그러자 남전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한 발을 든 일은 또 어찌하고?”

선사들의 선문답은 두 가지 효과를 노린다. 첫째는 물론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다. 첫째 의도가 빗나갈 때에는 의심으로 콱 박아준다. 그것이 두번째 의도다. 이 두번째 의도 때문에 공안이 자꾸 정리되고 보급되는 것이다.

이 공안을 예로 들더라도 그렇다. 남전이 평소에 노리던 스님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기왓장을 들고 그 스님이 일하는 채소밭까지 갔다. 그래서 기왓장을 던져 일하던 그 스님을 때렸다. 사실은 이 문답은 원래 이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 뒤는 남전의 사족이다. 남전은 불쌍한 제자가 깨닫기는 커녕 의심조차 하지 않으므로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이차 전술을 구사한다. 그게 바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스님 앞에 외다리로 서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렇다 저렇다 반응이 없는 것이다. 의심 또한 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남전은 그것으로 문답을 끝내려 했다.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침 그 스님이 제 발로 찾아와 기왓장의 사연을 묻는다. 묻는 게 벌써 틀렸다. 그래서 스님은 의문이나 박아두자고 외다리 사연을 되물었던 것이 다.

선문답은 선사의 자비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문이고 공안이고 화두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 그것은 답이다. 기왓장으로 얻어맞았을 때 아픔을 느끼는 순간의 자아와 남전이 외다리로 서있는 것을 보고 느낀 자아는 남전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만 분별이 일어나고 말았다. 다른 개념이 끼어들었다. 알음알이가 발동한 것이다. 컴퓨터를 하다보면 다른 화일이 침입하여 데이터를 엉망으로 섞어놓는 일이 있는데 바로 그 모양이다. 알음알이가 달라붙으면 죽은 것이다. 분별은 죽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의문에 의해서만 깨달음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은 중생의 본심이다. 의문이란 생각되어진 의문이다. 의문은 무엇이냐지 무엇이다가 아니다. 생각이라는 작용은 쉼이 없지만 생각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각없는 채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공안의 역할이다. 그래서 공안을 참구하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의문을 일으키고 그 의문을 자꾸 의심하여 더 강한 의문이 만들어진다.

남전은 어느 날 대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왕노사가 몸을 팔려고 하는데 누구 살 생각이 없느냐?”

‘왕노사’는 남전의 성이 왕 씨이므로 붙여진 대명사다. 즉 남전이 자신의 몸을 팔겠으니 누가 사가라는 얘기다. 제자들과 선문답을 한바탕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떤 스님 한 분이 나섰다.

“제가 사지요.”

이미 남전의 머리에선 번개불같은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싸게 주지. 얼마 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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