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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73>-깨달음의 길

진리, 바늘을 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소설가 이재운

 

열일곱 살에 입산하여 형악의 희조(希操) 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나 율행을 버리고 선(禪)을 하기로 결심했다. 율사란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만을 철저히 지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스님을 말한다.

“사내 대장부가 크게 깨달아서 청정하게 할지언정 어찌 사소한 일로 자질구레한 계율을 삼아 얽매인단 말인가!”

물론 선을 율이나 경의 우위에 두려는 선림(禪林)에서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같은 선가의 자세가 후대의 선사들에게 미친 영향이 결코 좋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율이나 경을 무의식적으로 배척하거나 또는 배척하기 위하여 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일부 수자들에게 파계(破戒) 수단으로 이용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 자체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계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깨달음을 속히 이루도록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파계를 미덕처럼 잘못 보인 스님들도 몇몇 있지만 파계 자체는 절대로 정도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선을 하기로 작정한 약산은 곧 석두(石頭) 화상의 문하로 찾아가 지도를 받았다.

어느 날 약산이 잠자코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그 모습이 석두의 눈에 띄었다.

“거기서 뭘 하나?”

“아무 것도 안합니다.”

“그렇다면 한가로이 앉아 있는 것이구먼.”

“한가로이 앉아 있는 것이라면 뭔가 하긴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하지 않는다는 건 뭔데?”

“성인 천 명이 와도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석두는 칭찬하는 뜻에서 게송을 들려주었다.

처음부터 같이 살아왔건만 그 이름도 모르는 채 되는 대로 어울려서 그럭저럭 지내오니 옛부터 성현들도 밝혀내지 못한 것을 범부로서야 어찌 알랴!

어느 날 석두가 이렇게 말했다.

“언어와 몸짓으로는 진리와 교섭할 수 없다.”

약산이 듣고 나서 대답을 지어냈다.

“언어와 몸짓을 쓰지도 않고 교섭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 그곳은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

“바위에 꽃을 재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석두는 약산의 대답이 옳다고 칭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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