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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초대석]차희상 신풍초교 총동문회장

‘신풍의 뿌리’ 후손에 영원히~
 

 

 

 

-신풍초교가 도내 최초의 초등학교인지.

▲신풍초교가 도내 공립으론 최초이고, 사립으론 인천 영화초교(1892년)이다. 1895년(고종 32년) 7월19일, 칙령 145호에 의해 ‘소학교령’이 공포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기초적 초등학교 설립법이 마련됐다. 공포 직후 ‘한국 최초의 관립 소학교가 수하동 장동 정동 제동 소학교가 설치됐고, 뒤이어 수원(신풍) 공주 충주 광주 전주 진주 대구 춘천 평양 영변 해주 함흥 경성에 공립 소학교가 1교씩 개교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풍은 개교 연도에 따른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어 그 보다 1년 뒤(1896년)로 했다. 1896년 관보 제241호에 “수원군 북부면 신풍동 옛 화성유수부 관아의 객사 건물인 우화관(于華觀)을 차용해 ’수원군 공립소학교‘를 개교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개교 기념일 2월10일에 대한 명확한 고증도 아직 밝히지 못했다. 다만 신풍초교 최초의 교원인 이필구(작고)의 발령 날짜에 기준한 것이다. 그래서 올해 개교 111주년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한 역사 때문에 교명도 많이 바뀌었을텐데.

▲최초 교명은 수원군공립소학교(개교 당시) 경기관찰부공립소학교(1896년8월) 공립수원보통학교(1906년) 수원공립보통학교(1911년) 수원신풍공립심상소학교(1938년) 수원신풍공립초등학교(1941년) 수원신풍초등학교(1950년) 신풍초등학교(1992년) 신풍초등학교(1996년)로 변천돼 왔다.

-동문회장 취임을 축하한다. 몇 대 회장인가.

▲지난 25일 만장일치로 추인받았다. 초대 심재덕 국회의원, 2대 영동시장 팔달로 상가연합회장 최칠성, 3대 서후락(본명 서후락 코미디언), 4대 공찬영 선배에 이은 5대 회장이다. 기수는 57회인데 역사로 따지면 정확히 67회 졸업생이다. 일제 강점기 10년은 산입하지 않고 기수를 매기지 않았다. 그 10년은 일제에 의한 왜인들의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치욕의 역사라서 동문회에서 빼기로 했다. 신풍은 애초 칙령에 의해 조선인이 세운 학교였기 때문에 그 정통성이 중요하다.

-역사만큼 동문회 활동이 꽤 활성화 됐을텐데.

▲졸업생이 3만명이나 생각만큼 활성화는 아직 안됐다. 이번에 추대되고 나서 동문회 명단을 훑어보니까 역시 유명인이 많더라. 역사를 재조명하고 후세에 신풍이 전통학교로 영원히 남기 위해서는 정계 종교계 학계 언론계 재계 등 전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문들을 모조리 찾아나설 것이다.

 

김정한 침례교목사, 심재덕 전 국회의원, 박찬숙 의원 등이 동문들이다. 동문회는 지난 1986년 개교 90주년 때 창립했으며 1995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동문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또 그해 가을대운동회와 총동문회 사무실을 개소하고 ‘신풍 100년사’ 책자를 발간했다.

 

각 동문 기수별 동정을 파악하고 유기적 연락망을 취하기 위해 기수별 회장을 선출했다. 100주년 행사 때 모인 동문중에 제일 막내 기수가 57회였는데 추진위에 참여하면서 96년도 첫 동기회장을 맡았다. 2년간 봉사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서 이번에 총동문회장에 추대된 것 같다. 총동문회장의 임기는 2년이며 중임이 가능하다.

- 화성 행궁의 복원으로 그 역사의 신풍초교 터가 없어질터인데.

▲ 5대 회장으로서 가장 크고 막중한 업무가 바로 학교 이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교신도시 내로 이전 계획을 세웠고 큰 문제가 없는한 그렇게 될 것이다. 3만여 동문들한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모교가 이전되더라도 신풍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야하기 때문에 기필코 명품 광교신도시 내로 이전을 성공시킬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광교신도시 사업단과 꾸준히 추진중이다. 만약 입주자들이 ‘신풍’ 교명을 반대하고 지역 이름으로 ‘교명’을 정하자고 우긴다면 논리적 그리고 역사적 전통성으로 설득시킬 것이다. 현재 낙남헌과 후문 쪽 화령전의 중간에 위치해 시야를 막는 교내 예절기념관과 테니스장이 철거 중이다. 개학 전 철거 공사가 끝나면 낙남헌~화령전이 연결되는데 이곳엔 담장을 쌓게 된다.

 

후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신풍초교 전체 1만7천190제곱미터(5천183평) 부지 가운데 현재 1천350㎡(407평)가 철거되는 셈이다. 인근 신풍초교 옆 빌라도 철거한다. 사업비는 도비 30억 시비 30억 모두 60억이 들어간다. 신풍초교 전체가 행궁복원으로 쓰이는 것이다. 올해 별관과 테니스장이 철거되고 내년부턴 보상이 이뤄진다. 후년 2009년 신풍초교는 광교신도시로 이전된다.

 

신풍초교를 수원시에서 매입한 후 그 돈을 갖고 시교육청과 도와 협의를 해서 택지개발지구내 학교 용지를 매입하게 된다. 총동문회 입장에선 환경 교육 여건이 뛰어난 광교신도시 이전을 적극 바라고 있다. 이전 후 학교 터엔 상징적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기념 박물관을 세울 것이다. 도내 최초의 공립학교 터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연륜만큼 애환과 인상깊은 사건이 많았을 것 같은데.

▲故조춘화 선생의 ‘살신성인’ 정신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9년 7월12일, 조춘화 선생은 4학년생(33회)들과 함께 아랫버드내로 근로 동원됐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어린이들이 무더위와 모내기에 지쳐 웅덩이에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조춘화 선생은 그 웅덩이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제자 7명을 구하고 본인은 순직했다. 사고 이후 물을 퍼내고 보니 돌로 쌓은 우물 위의 웅덩이였고 선생은 두 겨드랑이에 제자를 꼭 껴안고 숨졌었다. 이런 참된 ‘스승의 사상’이 면면히 내려오는 것이 ‘신풍의 얼’이다. 선생의 유택은 북한 땅 함경도 성진이다. 조국 통일 땐 만사를 제치고라도 찾아볼 것이다. 현재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7월12일 추모식을 갖고 있다. 추모비는 1964년 그때 생명을 구한 제자들이 세웠다.

 

내 임기 동안 선생의 피붙이를 찾아 나설 작정이다. 비록 선생은 미혼이었지만 가족들은 직계 자손은 없을지언정 형제와 그 조카들은 있기 때문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꼭 찾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개교 기념 땐 별도의 행사 보단 선생의 추모식으로 대신하는 것을 동문회 임원진들과 협의할 것이다. 선생은 ‘신풍초교’의 영원한 ‘정신’이다.

또 1986년 화재도 가슴아픈 사건이다. 새해 첫 날 누전으로 인해 1954년에 지어진 26개 교실이 모두 전소됐다. 그간 모아온 2만4천265명의 졸업생 생활기록부를 모두 태우는 아주 가슴아픈 사건이다. 이 때문에 개학 때까지 학생들의 정상 수업을 위해 인근 수원간호전문대학 교실 10개를 빌리고 강당에 임시 칸막이를 설치, 4개 교실을 만드는 등 모두 15개 교실을 임시로 마련했다.

 

이후 동문회 차원에서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학생기록부 성적표 앨범 졸업장 등을 모두 학교에 헌납하는 행사를 꾸준히 치렀다. 현재 교정에 세워진 ‘사료관’이 바로 동문들이 앞장서 내놓은 기록물로 채운 것이다.

-유서깊은 학교이니까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작고하신 조부를 비롯 고모 숙부 삼촌 모두 이 학교 출신들이다. 조부와 부친, 나까지 3대가 모두 여기 출신이다. 드문 사례다. 100주년 행사 때만하더라도 신풍 동문들이 무진장 많았다. 그러나 연세가 많이 드시 선배들은 이제 고인이 됐다. 흔히 그렇듯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치고 소풍만 가면 비가 오지 않는 학교는 없는 것 같다. 어디가나 있는 전설인데 신풍초교는 사실에 근거한다.

 

해방을 전후한 그때쯤으로 알고 있는데 교정에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있었다. 당시 소사가 이 고목나무를 자르려다가 번개맞아 죽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소풍이나 학교의 큰 행사만 있으면 비가 온다. 또 1990년 초반으로 기억하는데 일본에서 신풍초교로 견학을 온적이 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6년 졸업생 전원 100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제가 돼 언론보도에서 크게 다뤘다.

 

이를 본 일본 학생과 선생들이 직접 현지 확인차 견학 왔었다. 상당히 우수학생들이었다. 20년전 얘기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내신 성적을 준 것 같다. 만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땐 한 학년이 5학급, 한 반은 80명, 전교생이 401명이었다. 콩나물 시룻자루였다. 지금은 한 학년에 1개학급 전체 6개 학급에 불과하다. 영통구 등에 새롭게 택지개발이 되면서 인구가 그쪽으로 밀집되며 상대적으로 외소해졌다.

 

인근 남창초교는 전교생이 2개 학급인데 남창은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때 남창과 신풍을 합쳐서 광교신도시로 이전하자는 계획이 있었지만 동문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신풍은 비록 ‘역사의 터’로 남겨지게 된다. 터가 좋기 때문이다. 맥이 끊기지 않고 이런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대단하다.

-향후 계획은

▲수원에 10대째 살고 있다. 우리 조상은 정조대왕이 도읍을 한성에서 수원으로 옮기려고 성을 쌓을 때 함경도에서 내려왔다. 정조는 당시 전국 팔도의 유명 장인들을 모두 수원으로 불러 모았다. 각기 다른 성씨를 모아서 성곽 내 살기를 원한 것이다. 차씨도 이때 왔다. 함경도 연안이 본관이다.

 

조상은 수원에서 베틀을 짜고 조창을 짜고 직조 공장(부친)을 운영했다. 따라서 누구보다 애향심을 깊다. 수원은 나의 뿌리이고 신풍초교는 나의 유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신풍초교를 반드시 명품 신도시로 이전해 신풍의 뿌리를 후손들에게 이어줄 것이며 왜인에 의해 짓밟혔던 민족정기를 되살리겠다.

수원 신풍초교(교장 최병원)가 개교 111주년을 맞았다. 한 세기를 훌쩍 넘고 11년이란 세월이 더 지난 것이다. 그 오랜 풍상에도 끄덕이지 않고 굿굿이 인재 배출의 요람으로서 그 전통의 이름 값을 톡톡히 해왔다. 수원성의 모태이자 정조대왕의 효의 얼이 깃든 낙남헌과 화령전이 자리한 이 곳은 도내 초등교육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 터는 ‘화성 행궁’이 있던 ‘역사의 명당’, 언젠가 ‘행궁 복원’을 손꼽아 기다려온 ‘약속의 터’. 이제 그 파란만장한 애환과 빛나는 역사를 간직한 신풍초교는 찬란했던 문화유산 ‘행궁 복원’사업에 자리를 넘겨줘야 할 시점이다. 이미 낙남헌~화령전을 연결하기 위해 교내 예절기념관과 테니스장이 철거에 들어갔다. 내년엔 학교부지에 대한 보상도 이뤄지고 후년엔 광교신도시로 옮기게 된다.

 

차근차근 그 이전 움직임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팔달산 기슭, 아늑히 자리잡고 정조의 ‘효심’을 말없이 지켜온 신풍이 ‘역사의 보존’에 맞춘 대역사에 멋지고 화려한 은퇴식을 갖는 것이다. 2009년 신풍초교는 그 전통의 이름을 고이 간직한 채 명품 신도시 ‘광교’로 이전, 제 2의 도약을 꿈꾸게 된다.

*차희상 신풍초교 총동문회장은?

차희상 신풍초교 총동문회장(54)은 10대 째 수원에서 살아온 왕 토박이다. 6, 7대 도의원에 내리 당선됐으며 6대 건설교통위원, 7대 현재 도시환경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4년 건설교통위원 땐 겨울철 도로의 제설제로 쓰이는 ‘염화칼슘’이 ‘중국産’인 것을 밝혀내고 그 폐해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결국 중국산 염화칼슘은 모두 ‘폐기처분’ 됐다.

이 사건은 당시 일파만파 확산돼 국내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나 중국산 ‘염화칼슘’을 다시는 쓰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렸다.

또 지난 해 도시환경위원장을 맡고 나선 팔당상수원의 수질 개선을 위해 동분서주, 소장직을 5급에서 3급으로 격상시키고 예산도 증액시켰다.

김문수 도지사의 첫 도정 현안 사업에 의회 차원에서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이같은 추진력과 집념이 신풍초교 5대 총동문회장에 추대된 이유이다.

신풍초교가 광교신도시로 이전하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건 그의 진실함과 뚝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 생활 20년간, 국회의원 보좌관도 지냈으며 지역의 환경단체 위원으로서 환경마인드를 키웠다. 수원중 수원고(21회) 장안전문대 명지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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