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목숨을 걸고 나서는데 어떻게 잘라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세 분 스님은 길을 떠나지 못하고 하룻밤을 더 묵게 되었다.
영조, 영희는 밤새도록 도반을 위해서 격려해주며 초지일관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부설은 ‘열 사람을 구하려 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말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내가 무슨 도가 깊다고 세 사람씩이나 죽이고 수도의 길을 택하랴!’ 하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설득하는 데까지 설득해보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끈기있게 일을 매듭지은 뒤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튿날 아침 영조, 영희는 도반을 빼앗긴 채 비통한 마음으로 길을 떠나야 했다.
“나는 이미 속세의 인연으로 이 지경이 되었네만 자네들은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법유(法乳)를 흠뻑 마시고 돌아와 이 파계승을 제도해 주게.”
영조, 영희는 눈물로 부설을 이별하고 울면서 길을 떠났다.
입술을 깨문 채 두 도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설의 눈에서도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후 부설은 삭발한 머리가 자랄 때까지 바깥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았다.
솔방울만한 상투를 틀 만하게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부설 거사라 자처하며 선비들을 맞아들여 학문을 교류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부설은 유교, 불교를 두루 포용하여 일대의 명사들 사이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묘화를 어느 정도 설득을 하였는지 결과는 여전히 남편이라는 탈을 벗지 못했다.
아마도 부설은 자신의 업보를 보았던 것 같다.
아니면 결혼 생활을 깨달음의 준비 단계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등운이라는 아들을 낳고 월명이라는 딸을 낳았다. 그 후 몇 년 사이에 구무원과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부설은 더욱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공부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묘화 부인과 자식들이 보는 데서 벌렁 자빠지는 시늉을 하고는 중풍에 걸려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음식과 약도 겨우 먹여주는 대로 받아먹는 시늉을 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