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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138>-깨달음의 길

나옹 최후 설법 후 입적 - 소설가 이재운

 

“서울(개경) 근교에서 저토록 사람이 몰려드는 것은 심히 좋지 않은 일입니다. 임금을 제쳐두고 한낱 중을 찾아가는 인파가 득실거린다면 이는 국권에 크게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옹을 멀리 쫓으셔야 합니다.”

공민왕은 대간의 참소를 듣고 그도 그럴 듯했던지 나옹에게 회암사에서 영원사로 자리를 옮기라고 명령했다. 나옹은 그때 공민왕의 왕사로 있었다. 나옹은 공민왕의 영을 거역하지 않았다. 나옹은 때마침 병을 앓고 있던 중이어서 가마를 타고 떠나야 했다.

삼문을 나와 열반문을 돌아가니 제자와 신도들은 나옹의 입적을 눈치채고 슬피 통곡했다.

“나 때문에 흩어지는 일없이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시오.”

나옹은 가마를 뒤따르는 대중에게 간곡히 부탁하면서 회암사를 떠났다.

도중에 여주 신륵사에 들러 잠시 쉬는데 병이 갑자기 깊어져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호송관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길을 재촉했다.

“스님! 그만 쉬고 이젠 떠나셔야지요?”

나옹은 길을 재촉하는 호송관들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정말 먼 길을 떠나겠으니 너무 독촉하지 말게나.”

나옹은 가까운 곳에 있는 스님들을 불러모으고 신도들을 모아 최후 설법의 터를 마련했다.

“여러분, 자세히 보십시오. 이제부터 내가 열반불사를 마치겠습니다.”

나옹은 조용히 입적에 들었다. 향수 57세였다. 1320년에 세상에 나와 1376년에 온 곳으로 돌아갔다. 무학보다 일곱 살 위였는데 무학이 1405년까지 살면서 조선조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과는 달리 고려하늘에서 석양의 노을을 받아 큰 영예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옹을 일컬어 우리나라 선의 중흥조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아도 무학을 대선사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학은 나옹보다 한 세대 앞인 태고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후예들은 조선왕조 오백 년을 통틀어 억불정책을 꾸준히 썼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성종에서 연산왕까지는 극심한 탄압을 일삼았다. 불교를 사교(邪敎)로 단정하여 사찰을 불태우고 불상을 파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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