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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139>-깨달음의 길

지엄 억불정책 속 정심 화상과 조우 - 소설가 이재운

 

승려는 노소를 막론하고 강제 환속을 시킴으로써 불교의 씨를 말리려고까지 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탄압했던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를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내세워 신봉하고 장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무리수가 불교계에 떨어졌고 그때마다 불교는 잎을 잃고 가지가 꺾이고 기둥마저 썩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오늘날 그 뿌리만 겨우 남은 불교가 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의 피가 흐르고 흘러 마침내 조카를 불태워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한 세조에게 그 맥이 이어진 시기에 지엄은 세상에 태어났다.

당시 김천 직지사에는 벽계 정심(碧溪正心) 선사가 있었는데 그 난리통에도 유일하게 조계의 법맥을 이은 큰 스님이었다.

하지만 정심 화상도 관원의 등살에 견디다 못해 직지사를 떠나 황악산 너머 물한리라는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오두막을 지어 시봉들던 여신도를 부인으로 삼고 나무 장사를 하면서 탄압이 완화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선지식을 찾아 다니고 있던 지엄은 사찰마다 텅텅 비어 썰렁한 바람만이 불고 있는 것을 보고 공부에 인연이 없음을 탄식했다. 선지식은 고사하고 도반마저 만나기 힘들었으며 지엄 자신도 늘 관원을 피해 다니는 실정이었다.

세상은 양반 놀이에 미쳐 돌아가고 있었고 사찰마다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난세라도 선지식은 계시련만....”

지엄은 텅빈 바랑을 짊어지고 터덜터덜 전국을 걸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발도 풀 겸 정자 그늘에 앉아있는 지엄 앞에 다른 스님 한 분이 지나갔다.

그 스님과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중 지엄은 정심 화상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심 화상이 지금은 몸을 숨겨 물한리에 계신데, 나무꾼으로 위장하셔서 조계의 법맥을 지키신답니다.”

“그래요?”

신심이 솟구친 지엄은 단숨에 물한리를 찾아갔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이 전혀 힘든 줄 모르고 첩첩산중을 찾아간 것이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어디서 온 수좌이길래 나무꾼을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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