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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깨달음의 노래, 해탈의 노래<163>-깨달음의 길

효봉, 토굴생활 후 깨달음 얻고 입산 - 소설가 이재운

 

그로부터 장마철이면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농짝을 밤새 져다주기도 하는 등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일하며 목숨이나 붙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 이 모든 걸 다 잊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그는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고행이었다.

그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효봉은 평생 동안 참회의 길을 걸으리라 결심했지만, 무작정 쏘다닌다고 참회를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업장을 풀어내고 죄를 더 깊이 참회하기 위해 불문(佛門)에 귀의하기로 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일 무렵이었다.

석두(石頭)를 은사로 득도한 그는 늦게 출가한 만큼 남보다 배로 정진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손에서 불경을 놓지 않고 가부좌한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굳도록 참선에 열중했다.

입산한 지 여섯 해가 되던 해에 그는 일생 최대의 용단을 내렸다. 늦은 출가에다가 나이만 불어나게 되자 효봉도 큰 결심을 해야만 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작용했던 것이다.

독립 투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판사직을 내던지고 가출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금강산 법기암 뒷산에 토굴을 지었다. 배설할 수 있는 통로와 음식물을 받을 수 있는 작은 구멍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밖에서 모두 봉하게 했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나서 마흔네 살 늦깎이 스님 효봉은 결사적인 각오로 토굴 생활을 시작했다.

효봉이 잡은 공안은 ‘무(無)’였다.

암자에서 밥을 나르는 스님은 하루에 한 번씩 구멍 앞에다가 밥을 갖다놓고 가곤 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1931년 여름의 비 개인 어느 날 아침이었다. 드디어 토굴 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일년 반만에 걷는 걸음은 어린애처럼 비틀거렸다. 햇빛이 눈부셨다. 흙냄새가 향기로웠다. 산바람이 싱그러웠다. 그런 가운데 그는 오도송을 읊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그 뒤 조실부모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 엿장수로 떠돌다가 입산했다는 효봉의 전직이 알려지면서 판사 스님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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