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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과 함께한 오백년의 발자취

향토사료전-맥계 최씨전

청계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여름이면 개천에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재잘대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퍼져나가는 곳. 마음가짐이 넉넉해 이웃 간 정이 도탑고 생계와 땔감을 위해 산을 오르내리며 흥얼거리던 나무꾼소리도 정답게 들리던 곳.조선 개국공신 최유경(金有慶)은 산세 뛰어나고 인심 좋은 현 과천시 과천동 막계리(서울대공원 자리)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로부터 500여년이란 장구한 세월, 자자손손 한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다. 마을사람들은 그런 가문을 언제인가 모르지만 본관인 전주(全州) 대신 막계의 또 다른 지명인 맥계(麥溪) 최씨라 지칭, 최유경을 중시조로 떠받들었다.후손들은 살아오는 동안 마을과 과천의 대소사를 돌보는 과정에서 생긴 문서들을 빠짐없이 보관했다. 조선초기부터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들은 당시 정치, 경제, 문화, 농경사회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7대손 최종수(崔鍾秀)는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져 가보처럼 내려왔던 소중한 문서들을 자신이 원장을 맡고 있는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이에 문화원 주최로 12일~18일까지 7일 간 과천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는 ‘과천과 함께한 오백년의 발자취’의 전시에 대해 살펴보자.<편집자 주>

 

‘과천과 함께한 오백년의 발자취’란 제목의 전시는 부제와 소제목까지 합해 모두 52개 갈래로 나눠 800여 점이 진열돼 있다.

‘맥계 최씨가 효인충의(孝仁忠義)를 가법(家法)으로 삼다’는 1부는 19세기 대학자였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집안 효도하고 어른 공경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 스스로 한 가문의 규범을 이뤘다”는 글로 짐작하듯 가풍에 관한 것들이 많다.

이 가문은 조선 최대 효자로 칭송되는 최사립를 비롯, 12명의 효자와 열녀를 배출, 나라로부터 정려가 세워지기도 했다. 지난 1918~1922년 사이 간찰과 엽서는 비록 친척 간 소통이나 당시 사회상을 엿본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을 받고 있다.

맥계 최씨가의 학맥이 경기 남인계 학자와 깊은 관계를 엿보게 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그중 허전이 지난 1983년 2월 청명일에 쓴 시문 가운데 ‘숲의 뒤뜰에는 가을에 연진의 밤이 익어가고 덮은 이엉이 오랜 전원 집에 연이어 즐비하도다.’는 구절은 비단 맥계정사 뿐 아니라 막계리 전체의 풍경이기도 해 당시 마을 정경을 짐작케 한다.

전시회 타이틀이기도 한 2부 첫 장 ‘고을의 선사(善士)가 되다’는 최씨 집안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손수 써 자녀에게 준 천자문을 비롯, 동몽선습, 계몽편언해, 증보현토구해 명심보감, 율시집, 논어언해, 맹지대분, 주역전의대전, 춘추좌전 등 대대로 전해져 온 학문서도 공개됐다.

조선 말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답안지를 묶어 만든 계연(桂蓮) 책과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준 조흘첩은 대중이 접하기 힘든 것들이다.

신분과 벼슬에 따라 상아, 뿔, 황양목, 소목, 대목으로 재질이 다른 호패와 벼슬을 하지않은 유생은 유학(幼學)으로 명기했다는 점도 생소하다.

이 밖에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온 벼루와 벼루함 연적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지난 1800년대 말 사립학교인 서원(書院)의 증가로 향교는 쇠락의 길을 걸어 효종 때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지방유생은 과거에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 부흥책을 썼지만 명맥은 잃어만 갔다.

‘향교의 중흥’은 향교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최씨가와 유림들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성재 허전의 아들 허익과 향교도유사인 최관철이 향교중수를 주도한 흔적인 과천문묘 성금수납부엔 1920년대 시흥군 주요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개화의 시대에 길을 찾다’편은 천세력(千歲)歷)과 24절기별로 정리된 양력과 월표가 실린 조선민력, 과천공립보통학교 조회 모습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또 실구학 절충론에 기초한 향교 유림들이 명륜학교 설립을 한 과정과 요즘 수학교과서 격인 신정산술, 한국대심원이 편찬한 법률서적인 일한문대조신법률 등을 통해 시민들은 격변하는 당시의 모습을 재조명해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생재(生財)의 마르지 않는 근본이란 양잠법과 근대적 잠업의 대강을 소개한 잠상요의(蠶桑要)義), 누에 실 뽑는 기계 설계도도 소개 돼 있다.

재미난 부분은 1900년대 초 전답을 찾기 위한 해당지주가 아닌 노비가 송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전답의 실측으로 이어진 개화의 물결은 최씨 집안 실측도면에 남아있다. 촌락부근에 자리한 청계산은 주민들의 생계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 청계산이 일제시대 국유림으로 편입되자 땔나무를 채취하던 관행은 통제를 받고 입산을 단속하는 대부업자와 충돌이 잦았다.

1915년 10월에 작성된 탄원서는 이런 위기의식을 대변해주고 있고 주민들이 식림계를 조직, 조림사업을 시행한다는 서약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제시대의 한 단면이다.

송충이 구제경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받은 해당 기관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은 70대 이상 연령층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식민지 시대 편린’은 모든 묘지는 지방공공단체가 설치한 공동묘지에 한한다는 묘지규칙에 맞서 선산을 지키려는 노력과 농지개혁에 따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해방의 기쁨도 채 누리기도 전 찾아온 한국전쟁의 상흔은 이 집안이 간직한 탄두와 파편이 박혔던 저울대 탄약통, 포탄피로 만든 재떨이 겸용 촛대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접할 수 있다.

청계산 자락인 막계리는 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자리한 탓에 해가 잘 들지 않아 응달말이라 불렀다.

제3부는 ‘사라진 응달말을 기억하다’편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초가집이 많았고 한가한 농촌지역이었던 이 곳이 1977년 서울대공원 지역으로 고시돼 조상의 선영을 옮기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떠나야 했다.

최종수 원장은 선대가 그러했듯 사라져가는 응달말의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챙겼다.

농가풍경, 개울가 모습, 이웃집들, 분묘 이장에 따른 임시총회 회의록, 이사도 채 가기 전 지붕높이 만큼 쌓아놓은 흙더미, 시집와 평생을 살았던 집터가 무너진 현장에서 실의에 잠긴 할머니, 이장과정에서 나온 명기(名器) 등등.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사용했던 약탕기, 작두, 화로, 제기, 맷돌, 키, 조리, 절구통, 다식판, 다듬잇돌, 홍두깨, 고드랫돌, 저울대 등도 수집했다.

조개와 오석으로 만든 바둑알은 지금 사람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진기한 물건이다.

13일 전시회장을 찾은 어르신들은 옛 것을 귀중한 보물이나 만난 듯 반가워하며 추억에 잠기도 했다.

최종수 원장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온갖 자료들이 한 집안 내력이기 이전에 과천 역사와 관계가 깊어 개인 서재에 두는 것보다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기증했다”며 “자라나는 세대들이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알고 계승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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