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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 묵향에 실려 온 ‘명필의 진수’

과천문화원 일곱 번째 추사작품전시회

추사 김정희는 1851년 북청 유배 후 부친 김노경의 묘가 있는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스스로 과농(果農)이라 칭하며 여생을 보내다 71세 일기로 긴 잠에 들었다. 그가 서거한지 15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 민족은 한시도 추사를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금석학자이자, 고증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장구한 세월동안 그를 기리는 까닭은 독보적 존재인 추사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추사는 해서, 전서, 예서, 전서를 혼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척했다.

 

가만히 그의 글씨를 보노라면 예서 같지만 예서가 아니고 초서 같은데 초서가 아닌 오묘한 맛과 멋이 깃들어 있다. 김정희는 귀양지의 고난을 학문에 대한 열정 하나로 견뎌내고 추사체를 완성했다. 벼루가 열개 넘도록 구멍이 뚫리고, 천 자루가 넘는 붓이 몽당붓이 되도록 끝없는 정진의 결과가 추사체를 있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 과천문화원(원장 최종수)이 일곱 번째 추사작품전시회로 ‘추사파 글씨’란 타이틀을 달고 늦가을 문화의 향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 추사 글씨의 여러 모습

과천시가 주최하고 과천문화원과 추사연구회가 주관해 지난 5일부터 오는 14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추사의 서화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어떤 이들과 교류했으며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는 자리다.

1부 ‘추사 글씨의 여러 모습’은 추사체의 발전과정과 노년의 소탈한 글씨를 보여준다.

원만하게 깨달은 경지란 뜻을 담은 원각가람(圓覺伽藍)은 담박함과 전체 조형의 통일, 예서와 행서의 적절한 배치 등 어느 한곳 빈틈이 없는 작품이다.

추사가 중국을 다녀 온 후 한나라의 사자성어를 글로 만들어 쓴 한예작구(漢隸作句)는 한나라 기와와 거울, 비석 등에 새겨진 글 공부를 일생 동안 꾸준히 했음을 증명해준다.

‘도는 받을 수 있어도 전할 수 없으니 작게는 안이 없고 크게는 한계가 없네’(이하 생략)

추사 말년 작으로 대흥사 스님에게 써 준 초사구(楚辭句)는 제자들에게 경계시했던 필획구사를 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시절 연습으로 쓴 추사체 행서와 초서까지 선보여 시선을 잡는다.

1809년 생원시에 급제해 같은 해 10월, 동지겸 사은정사 판중서 박종래와 부사 이조판서 김노경 등의 일행을 수행한 연행 나들이는 그에게 있어 어쩌면 행운이었다.

청대(淸代)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과 만남 그리고 조강, 오승량 등과의 교류는 학문과 예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 추사의 가문과 스승으로서의 추사

2부 ‘추사의 스승’편은 그들이 쓴 당호와 독서대련 등으로 글씨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이들 작품을 접한다는 자체가 영광이고 큰 배움이다.

추사의 가문은 북촌에서 행세깨나 한 집안이었으나 글씨는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추사의 동생들과 그 후손들이 필력을 인정받은 중심축에는 그나마 추사가 있어 가능했다.

이들은 추사체를 보면서 학문에 정진한 결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그중 상무의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은 추사의 아들이 쓴 글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추사 가문 사람들’에서는 그들의 글 솜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추사는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스승으로 대하자니 어색하며, 나이는 많으나 서로 꺼려하면 안된다고 교육했다.

▲ 추사, 그와 함께한 사람들과 그림 이야기

4부 ‘종류’(從遊)는 그들과의 얘기다.

추사는 비록 아버지벌인 조광진과 학문을 논했고 같이 앉아 먹을 갈았다.

이런 조광진은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의 동년배로, 김노경이 평안감사 시절 친교를 가졌던 인물이다.

가장 절친한 벗인 권돈인의 행서 편액과 서론은 과거에 함께 급제한 동기다.

5부 ‘추사학파’는 추사를 따르던 제자들의 글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시문과 글씨로 이름을 날린 조면호의 ‘유당’(留堂), 신관호가 쓴 큰 글씨 ‘담박영정’(澹泊寧靜), 추사 정신을 무던히 닮으려 애썼던 서승보의 ‘방완당서’(倣阮堂書)에서는 추사체를 본받으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추사 생전 뵙고 배우지 못했으나 사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것을 일컫는 ‘사숙’(私淑)이 6부의 제목이다. 대원군을 도와 고종 등극에 일조한 조영하와 객관적으로 추사 예술을 논한 오세창, 현대적 시각을 곁들여 추사체를 체계적으로 수집 연구한 이한복, 손재형을 비롯 서화 감식과 서화 수장가로 유명한 이병직 등의 글씨에서 추사는 영원불멸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로 유명하나, 난(蘭)치는 솜씨 또한 예스럽지 않은 것을 보여줘 7부 ‘묵란’(墨蘭)은 추사가 스물여섯 나이에 그린 작품으로 ‘삼절법’(三折法)은 없으나 음양의 조화와 자연스레 휘날리는 난 잎의 표현이 빼어나다.

추사의 영향을 받아 청람의 경지에 이른 대원군의 난초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조희롱의 분란, 허련의 묵란을 비롯 추사가 배우고 익힌 방윤명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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