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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인천시장 외교관 꿈 품고 민주투사에서 시장까지

외교관 꿈 품고 민주투사에서 시장까지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서울, 경기, 인천 빅3지역에서 유일하게 인천의 송영길 후보만이 당선됐다. 서울과 경기도, 인천 등 전통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수도권에서 송 후보만이 당선됐다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앞으로 한국정치에서 40대로의 전면 세대교체 바람 등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송 영길의 인천시장 당선은 무엇보다 민주당 출신 최초의 인천시장이라는 점이다. 인천은 그동안 수도권이면서도 서울과 경기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전통적 야당세력인 민주당이 발붙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송영길이 인천시장에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이 앞으로 인천에 지지세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 수도권 중 유일하게 인천에서 송영길이 당선됐다는 점에서 인천의 정치적 상징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인천은 그동안 같은 수도권 중에서도 수도라는 서울의 상징성과 최다 인구라는 경기도의 규모에 밀려 정치적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송영길이 유일하게 인천에서 당선됨으로써, 인천의 정치적 역할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셋째, 송영길은 이번 인천시장 당선으로 민주당의 차세대 대표주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제대로 된 차세대 주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이른바 ‘조랑말 지도부’로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이 지도부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차세대 주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확고한 차세대 리더의 부재로 전통적인 개혁야당 세력이 국민참여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분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송영길은 수도권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새로운 구심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넷째, 송영길의 당선은 한국정치에서 새로운 40대로의 세대교체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장 송영길과 서울시장 오세훈은 모두 40대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대표하는 차세대 주자라는 점에서, 당과 차기 대선주자군에서도 세대교체 바람이 강하게 불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7,8월로 예정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 기존 지도부의 전면적인 퇴진과 함께 40대 정치인들의 부상이 예상된다. 세대교체 바람은 다른 광역시·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40대 후보들의 선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야당은 지난 70년대 ‘40대 기수론’ 이후 제대로 된 전면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이번 선거에서 천안함 사건을 ‘북풍’으로 이용하면서, 전반적으로 민주당의 수도권지역 약세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 송영길이 당선됐다.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앞바다를 지역구로 갖고 있는 지리적 요건으로 북풍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천에서 송 후보가 당선된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당 보다는 송 후보 개인의 경쟁력을 꼽을 수 있다.

 

<폴리뉴스>가 지난 5월 28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인천의 민주당 지지도는 22.2%인데, 송 후보에 대한 적극 투표층의 지지도는 46.8%로 나타났다. 송영길의 개인 지지도가 당 지지도 보다 무려 24.6%포인트나 높다. 한나라당 안 후보의 지지도는 45.8%로 한나라당의 지지도 44.4%와 거의 동일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천안함 사태로 인한 북풍의 효과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안 후보가 송영길에게 뒤쳐지는 것은 바로 인물 경쟁력에서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다. 바로 이런 송영길의 개인 경쟁력을 기반으로 처음부터 선거구도를 ‘안상수 대 송영길’이라는 인물대결 구도로 몰아간 것이 승리의 주요한 요인이다.

 

안 후보는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도권 시·도지사 중 교체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지난 8년간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해 유권자들이 피로감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송영길은 젊고 개혁적인 40대 후보로서 야권의 명실상부한 차세대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인물론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송영길은 또한 그동안 인천에서 야당의원으로는 유일하게 3선을 기록해 탄탄한 지역적 기반을 다진 데다, 세대교체론의 분위기마저 업어 개인적 경쟁력에서 상대 후보를 압도할 수 있었다.

 

둘째, 지방선거의 특성에 맞게 인천은 독자적인 지역 아젠다(이슈)를 설정하는 데 성공했다. 지방선거는 지역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생활정치의 성격이 강하다. 중앙정치의 이슈에만 기대서는 안 되고, 시·도지사 후보는 지역의 독자적 아젠다를 개발해야 한다. 송영길은 처음부터 인천의 부채 문제와 구도심 소외라는 2대 지역 아젠다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이번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지방선거는 세계 어느 나라나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과 함께, 지방자치단체 운영에 대한 지역적 비전의 싸움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중앙의 정치적 이슈와, 지역의 생활정치 이슈가 중첩되어 진행되는 선거가 바로 지방선거다. 송 후보는 선거초반부터 천안함에 의한 ‘북풍’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기대했던 ‘노풍’에 기대지 않고, 이번 선거를 철저히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라는 중간평가의 성격과 인천의 독자적인 아젠다를 전면에 내세워 선거운동을 펼쳤다. 이것이 송 후보가 북풍이니 노풍이니 하는 외생변수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고 받고, 꾸준히 지지도 상승을 유지하고 있는 근본적 배경이다. 송 후보는 처음부터 외부영향력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비전과 능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셋째, 정통 야당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동교동계 등 민주계의 전폭적 지원을 비롯한 민주개혁진보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후보의 장점 때문이었다.
송영길은 민주당의 정통성 뿐 아니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진보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받는 후보인데다, 전국에서 광역시·도지사 중 가장 먼저 민주진보세력의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송 후보는 민주화와 남북화해협력, 개혁성이라는 측면에서 범민주진보세력의 확고한 구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민주당 고문과 대변인격인 장성민 전 의원이 유일하게 송 후보의 인천 선거 캠프를 방문한 것도 민주당의 정통성이 송 후보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송영길의 이런 진보적 정통성이, 무당파층이 선거 막바지에 대거 한나라당 후보로 쏠린 다른 지역과 달리, 부동층을 광범위하게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넷째,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송영길은 일관된 포지티브 선거운동으로 유권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상대 후보는 선거 내내 정책과 공약의 대결이 아니라, 송영길에 대한 인신비방과 흑색선전으로 일관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의존했다. 이에 대해 송 후보는 일체 대응을 삼가고, 처음부터 정책과 비전을 내세운 포지티브 선거운동으로 일관함으로써 ‘당당한 정치인’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얻었다. 이런 포지티브 선거운동을 통해 젊고 개혁적인 정치인은 역시 다르다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송영길은 역대 한나라당과 안상수 후보가 저지른 가장 더러운 선거판에서 가장 깨끗하게 대응한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수도권에서 천안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천에서 송 후보가 온갖 흑색선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당선된 것은, 바로 이런 후보 개인의 경쟁력과 총체적인 선거 전략 우위, 포지티브 선거전략 등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인천시장 송영길 그는 누구인가
송영길 시장은 1963년 3월 21일에 아버지 송병수와 어머니 김광순 사이에서 4남 2녀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이다.
어렸을 때 그는 붕어 잡는 것을 좋아해 하루 종일 냇가에서 살다시피한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광주로 전학을 와서 할머니를 모시고 둘째형과 광주에서 자취생활을 했었다.  그는 이때에 유난히 만화책과 영화를 좋아했으며 장래의 직업은 강대국을 상대해 담판을 벌인 서희같은 외교관이었다.

 

광주 대동고 재학시절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스승 박석무 선생을 만나게 된다.
4.19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김남주 시인의 선배되는 분으로 영어를 가르쳤었고 그에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한 분이었다.
당시 유신시절이었던 고등학생 시기에 이미 시국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보충수업비 지급이 선생님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재단으로 흘러들어가는 전횡에 대하여 집단시위를 조직하게 된다.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는 민중항쟁이 일어나 공안당국에서는 그 흐름이  광주로 확산될까 노심초사하는 시기인 79년 10월 25일로 10.26사태 전날이었다.
결국 대동고 3학년 재학시절 광주에서 5.18 민주항쟁이 발생, 광주대동고는 최초로 5.17계엄군의 폭력진압을 규탄하는 고등학생 시위가 벌어진 학교였다.
그때를 회고하며 그는 부도덕한 정권은 결국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만이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을 갖게 된 시기였다고 했다.

 

광주항쟁 다음해인 81년에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연세대 특유의 화려한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었고, 청송대에서 쌍쌍파티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고 학교를 그만둘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입학후 5월이 되자 경제학과에 다니는 김태훈이 학교도서관에서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김태훈은 그의 둘째형의 친구였었다.

 

이후 그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며 연세대학교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대학생때에 그는 현재의 부인인 남영신을 만나게 된다.
이화여대 경제학과를 다녔던 아내와 그는 가끔 신촌에서 벌어지는 연합 가두시위를 할 때에 만나서 친해지게 된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1985년, 집시법 위반등으로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 후 감옥에서 나와 인천으로 내려가 주안5공단 시계공장에 다녔고, 그의 아내는 신명전기라는 회사에 현장노동자로 취업했었다.
잔업이 끝난 그는 동암역에서 전철을 타고 구로역까지 가서 전철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으며 데이트를 하고 했었다.

 

그러다가 1986년 전두환 암살 음모혐의 사건으로 안기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게 되는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었고 그때 가장 큰 의지가 되어준 사람이 아내였었다고 회고한다.
이 후 인천으로 내려온 송영길과 그의 처는 월세 단칸방에서 동거생활을 하며 지역노동운동을 하게 된다.

 

인천에서 대우차 건설현장 배관용접공, 택시기사등을 하며 7년 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으며, 나이 서른에 이르자 직접적인 노동운동에서 노동자, 서민들의 인권 침해와 부당한 대우에 맞서기 위한 힘을 갖고자 사법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한다.
억울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서 무료상담, 변호 등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공천으로 인천 계양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 석패했으나 그 후 2000년, 2004년, 2008년 인천 계양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3번 연속 승리한다.

 

국회의원 시절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활동과 일본교과서왜곡시정대책특위 활동, 이라크전 반대, 당내 한미FTA 특위, KIKO 등 환헤지피해대책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비전과 소신을 보여주었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재정경제위원회를 거쳐 현재 보건복지가족위원회·정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3선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을 맡게 되면서 386 민주당 국회의원의 리더로 활동한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야권단일후보로 인천시장 후보로 출마해 2000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맞상대했던 2선의 안상수 한나라당 후보에게 이기며 인천시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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