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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cess & Life] 박해진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젊은이들이여! 젊어서 승부하고 도전하라!

박해진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65)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성공한 인생’이다. 평생을 경제계에 몸담아 오면서 갖은 풍파 속에서도 남다른 열정과 추진력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인생을 따라가노라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읽을 수 있고 굴곡진 삶을 지혜와 인내로 성공한 인생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성공한 인생에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도 읽어낼 수 있다.

 

/대담 글  김진호 논설위원 /사진 이준성기자 oldpic316@kgnews.co.kr

 

 


거물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박 이사장은 1966년 고려대 법대를 졸업과 함께 당시 고시보다 어렵다는 해군 OCS장교로 임관했다.

3개월의 단기 훈련과정을 거쳐 해군장교로 임관하는 OCS장교는 당시 선망의 대상으로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이 박 이사장의 1년 후배다.

박 이사장은 소위 임관과 동시에 해군 정보참모장 부관을 거쳐 김규섭 해군참모총장 부관으로 보임됐다.

1970년대 전후 군(軍)은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 집단으로 시스템 역시 당시 우리나라 파워집단 중 가장 선진화된 곳이었다.

군이라는 특수집단의 최고 정점에서 박 이사장은 국가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는 훈련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기르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박 이사장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의 만남이었다.

1970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박 이사장은 당시 행정대학원 학장이던 이한빈 전 국무총리의 추천으로 박태준 사장의 수행비서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박태준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밀명과 강력한 후원아래 포항제철을 건설하는 국책사업을 수행중이었다.

박태준 사장에 이어 박재홍 비서실장(전 국회의원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장조카), 박해진으로 이어지는 ‘3박(朴)’은 포철건설의 핵심이자 중추세력이었다.

민족의 최대사업을 추진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이들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과 서독 차관을 기반으로 영일만 매립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야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과 포항제철 건설사업을 “국가를 말아먹을” 사업으로 규정하고 반대운동에 총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박 태준 사장은 이들 사업을 ‘민족의 내일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강한 소신과 국가관 속에 추진했고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된다.

박 이사장은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30살도 안된 나이에 거목들의 정치행태와 미래에 대한 그들의 혜안, 그리고 애국심은 현재의 나를 이루는데 충실한 자양분이 돼 주었다”고 말한다.

특히 미군이 폐기 직전에 내준 중고 헬기를 타고 서울부터 포항을 찾는 현장행정은 지금의 경기신용보증재단 경영에도 그대로 접목돼 있다.

박 이사장은 향후 농협에 입사해서는 1993년 한호선 중앙회장의 비서실장을 맡아 농협의 심층부에서 농협을 진단하고 농협의 핵심인재로 성장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박 이사장은 인생의 고비마다 조직의 최고 정점에서 파워엘리트로 성장하는 기회를 맞았다.

 

 


인생의 황금기, 농협시절

박 이사장은 포철 건설작업이 한창이던 1971년, 농협 입사라는 인생의 지도를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박태준 포철사장과 주변에서 극력 만류했지만 포철 급여의 2배라는 농협의 대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특히 신임 서봉규 농협회장은 당시 국책은행으로 젊은이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불리우던 한국은행을 이겨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계획이 ‘청년 박해진’을 움직였다.

서 회장은 ‘2급 을류’라는 간부 선발시험을 통해 인재를 영입하고 이들을 내세워 국내 최고의 조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밀어붙였다.

박 이사장은 19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3만여명이 응시하는 격전을 치루고 드디어 농협으로 둥지를 옮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현재 아내인 조미란 여사와의 열애도 한 몫했다.

농협으로 자리를 옮긴 박 이사장은 30세가 되기 전, 지점장급인 인천 송림동 지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대한민국 최연소 지점장’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에 앞서 농협 최연소 과장의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최연소 지점장에 이어 최연소 1급 승진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했고 드디어 40대의 나이에 임원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농협에서 쌓은 찬란한 신화

박 이사장의 눈부신 승진을 뒷받침한 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의 실적이다.

그의 신화 같은 성적표는 안성군 지부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는 농협 안성군 지부장시절 처음으로 종합실적 전국 1위에 올랐고 안양시 지부장 시절에도 경영평가 전국 1위를 달성했다.

이때부터 박 이사장 주변에서는 시기와 함께 ‘일 잘하는 박해진’이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1994년 그는 중앙회장 비서실장을 마치고 농협 경기지역본부장으로 부임한다.

이 곳에서 그는 현재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야전용 점퍼를 입고 아침부터 밤중까지 지휘본부를 중심으로 독려작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현장을 확인하고 직원을 격려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가 ‘워커홀릭(일 중독자)’라는 구설수에 오를 무렵, 성과는 나오기 시작했다.

1994년 경기지역본부장 첫해, 경기지역본부는 농협평가 전국 1위를 기록하더니 내리 4연패를 달성했다.

물론 이 기간 박 이사장도 최고우수경영자상을 4년 연속 수상하게 된다.

이같은 성적은 현재 농협에서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데 “다시는 불가능한 실적”이라는게 농협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농협은 타 기관과 달리 독특한 성적평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 해 최우수기관으로 선정이 되면, 다음해 실적평가시 최우수기관 선정당시의 최고점을 기점으로 평가를 시작하기에 연속해서 실적 1위를 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꿈을 향한 비상과 좌절

뛰어난 실적은 초고속 승진으로 이어졌고 드디어 그에게 농협의 ‘톱맨(Top Man)’을 꿈을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다.

40대의 나이인 1997년 농협중앙회 부회장보(기획담당상무)로 샐러리맨들의 꿈인 임원이 된 것이다.

그는 별(임원)을 단지 불과 1년만에 농협중앙회 부회장으로 신용대표이사가 된다.

그는 농협의 신용부문 대표로 시중은행장 같은 자리를 맡아 여기서도 금융기관중 국민은행과 함께 ‘유이’하게 흑자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다음 중앙회장은 박해진’이라는 소문이 농협을 진동시켰다.

특히 당시 원철희 중앙회장이 곳곳을 다니며 “다음 중앙회장은 박해진”이라고 못박아 소문은 정설이 돼갔고 이때부터 주변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때 원철희 중앙회장의 정치권 입문 소문과 함께 검찰의 비리수사가 시작됐다.

100일간의 수사에도 특별한 비리혐의를 찾지 못했으나 원 회장은 현행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원 회장의 구속으로 농협은 신임 중앙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농협 주변에서는 당연히 박해진 이사장의 출마와 당선을 예상하고 있었다.

대세론과 함께 원철희 회장에 대한 농협 내부의 동정론이 불면서 박 이사장의 ‘출마는 곧 당선’이라는게 농협 직원들의 여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생겼다.

권력 핵심부에서 박 이사장에게 불출마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박 이사장이 고심하는 시간을 보내자 박 이사장과 주변 인물, 특히 가족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고 가족들은 계좌까지 추적당했다.

이같은 외압 속에 출마의 뜻을 접은 박 이사장은 농협대학장을 거쳐 조용히 퇴직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도전, 그리고 또 하나의 신화창조

2년여의 재충전 기간을 거쳐 박 이사장이 경기신용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는 2005년 당시, 경기신보는 총 인원 70여명의 소규모 지역보증기관으로 직원들이 연루된 금융사고 마저 터져 벼랑 끝의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박 이사장 주변에서도 농협중앙회 금융담당 부회장까지 지낸 사람이 가기에는 ‘옷이 너무 작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박 이사장은 “사고가 났고 키워야 할 단체이기에 일할 보람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과감히 수락했다”며 “잘나가는 기관이라면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 이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경쟁과 평가에 따른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제시했다.

당시 경기신보는 각 기관에서 온 비전문가들이 많아 금융기관의 전문성으로 발휘할 수 없었고 특히 조직원들 자체가 패배주의와 적당주의에 젖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징계와 조직다잡기에 앞서 직원들의 급여부터 인상했다.

‘받는만큼 일한다’는 농협에서의 경험과 함께 조직을 1류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인재영입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좇아오지 못하는 직원, 조직을 떠나라”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객관적이고 철저한 평가 후 “좇아오지 못하는 직원들은 조직을 떠나라”고 일갈했다.

아침 7시30분부터 시작되는 그의 열성적인 업무스타일은 직원들을 감동시켰고 패배적이고 무소신에 가득찼던 조직분위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다고 무사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공세적 업무스타일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이끌었다.

그가 부임 전 3천억원 보증에 328억원 적자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던 경기신보가 1조8천500억원 보증에 적자도 24억원에 불과한 우량 보증기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지점도 경기도내 19개로 급증했고 경기신보는 경기도평가에서 4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받았고 박 이사장 역시 CEO에 대한 평가가 실시된 3년 연속 최고등급인 S등급을 획득했다.

평가당시 도내 모 기관장이 100점 만점에 30점에 머물 때 박 이사장은 98점을 얻었고 작년 평가에서는 100점 만점을 받는 신화를 이룩하자 김문수 경기지사의 공개적 칭찬이 이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박해진 이사장을 “소리없는 독재자 같은 인물”로 묘사한다.

업무는 소리나지않게 조용히 추진하지만 조직 장악력은 누구도 따라올수 없을 정도며 업무성과는 늘 최고를 기록한다는 의미란다.

그러한 박 이사장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젊어서 승부하고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의지와 아이디어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히 조성돼 있다는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도 40대 후반이 넘어서면 노후에 대해 불안해 한다”며 “어느 처지에 있는 젊은이건 더 늦기전에 창업하고 노력하라”고 부연한다.

특히 젊음을 무기로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면 우리 사회의 구조가 성공을 담보하고 있다는 박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끌려가지 말고 주도권을 쥐고 인생을 설계하라”고 충언한다.

경기신보 아이디어 전국으로 확산

박 이사장 또한 지금도 현업에 매진하면서도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이를 사업화하는데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농생명기업협약, 녹색기업협약, 일자리 창출협약 등은 박 이사장과 경기신보의 아이디어로 청와대가 벤치마킹해 전국적 사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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