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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4월 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등 요인으로 활동하면서 의열단 활동을 지원한 김대지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이세영 공군소령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백구부대 조종사로 적진 격파 공로

이세영 소령은 1927년 5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3년 평양 제3공립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조국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북한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숙청대상으로 몰리자 단독으로 월남해 1948년 10월 대한민국 육군 항공사령부에 입대, 1950년 4월 공군소위에 임관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찰기를 조종해 적정 정찰, 전단 살포, 적 지상군 공격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수십 회의 정찰비행을 통해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1년 3월 대위로 진급, F-51전투기 조종사로 기종 전환 훈련을 마친 후 우수조종사로 선발되어 공군 제1전투비행단(일명 백구부대)으로 전속 됐다.

1951년 4월 3일 철원 서북방 이천지역에 대한 적 보급로 차단작전을 시작으로 첫 출격한 이세영 대위는 적 트럭 42대와 보급품 집적소 11개소 파괴, 적 군용건물 44동 파괴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1년 4월 21일, 이천 서북쪽의 적 진지 격파임무를 부여받고 출격한 이세영 대위는 이천 상공에서 공격 목표물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후 적 후방 보급로 차단을 위한 마지막 공격을 하던 중 적 대공포에 피탄되어 귀환이 불가능해지자 적 보급품 집적소로 돌진하여 24세를 일기로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51년 5월 1계급 특진과 함께 동년 7월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무장항일투쟁 헌신한 임시정부 요인

김대지 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선생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한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1905년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고향인 밀양에서 비밀결사조직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만주로 이주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했다.

한편 중국 동삼성, 북경, 길림, 상해를 왕래하면서 비밀결사조직의 구성원, 연락기지, 무기, 자금 등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마침내 1919년 11월 의열단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나갔다.

이후 1926년 영고탑으로 옮겨 1929년까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통합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김동삼이 밀정에 의해 체포되고 김좌진 마저 피살되면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선생은 항일독립운동 전 기간을 통해 특정계파나 주의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균형 감각을 지니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무력투쟁과 혁명을 통한 완전한 자주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 활동했다.

1942년, 선생은 이역만리 만주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선생은 국내외를 오가며 오직 우리 힘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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