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이달 17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거행됐다. 순국선열의 날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념일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올해 기념식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이종찬 광복회장의 요청으로 육사 교정에서 처음 진행했다. 독립유공자 유족, 정부 인사, 육사 생도까지 800여 명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육사 교정에는 독립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있다. 2023년 8월에 국방부와 육사가 이 흉상들을 이전하겠다고 했다가 찬반 의견이 대립하고,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크게 일었다. 긴 논란 끝에 2025년 5월에야 육사가 모든 흉상을 현 위치에 그대로 두기로 했으니, 이종찬 회장은 육사 교정에서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거행함으로써 독립군의 정신은 광복군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 국군이 그 뜻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했다.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선생은 이종찬 광복회장의 조부다.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우당 6형제는 온 가족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가산과 전답을 급히 처분해 자금을 마련, 1910년 12월에 일가 40여 명은 북풍한설의 지린성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논밭을 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명문가 후손으로 유복하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삶을 버리고 막대한 가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면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6형제 가운데 해방된 조국 땅을 다시 밟은 이는 다섯째 이시영 뿐이었고, 나머지 형제들과 후손들은 타국 땅에서 배고픔과 고초를 겪으며 죽음을 맞았다.
우당의 손자 이종찬 회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왕의 항복 소식을 들었고, 그해 11월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1960년 육사 제16기로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그는 안기부장에 임명되었다. 그 때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개편,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정보는 국력이다’는 그의 뜻을 원훈에 담았다. 제11대부터 연이어 네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도 지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대선후보에 김영삼과 맞대결하게 되자, 불공정 경선이라며 이를 보이콧, 민자당을 탈당했다. 새한국당을 창당한 이후 민주당과 합당하였고, 정계 복귀한 김대중,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등, 2000년에 정계를 은퇴하기까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을 오갔다.
그의 자서전 '숲은 고요하지 않다 1, 2'(제2판, 2024)를 읽어보면, 이종찬의 정치 여정은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며 자유롭고자 하였다. 스스로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을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실수와 한계에도 솔직했다. 격랑과 같은 정치 여정 중에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友堂 정신 때문이었을까?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했을 때도, ‘돈이 없어 육사에 간다는 생각은 말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선조 정신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안되겠느냐’ 하신 부친의 말씀을 역사를 꿰뚫은 友堂 정신으로 가슴에 새겼으리라.
정계 은퇴 후 이종찬 회장은 종로구 자택에 우당 기념관을 만들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로 제7회를 맞은 우당상 시상식 및 장학금 수여식에서 그는 이 행사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정신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友堂 정신을 이어가는 그의 용기가 조국의 미래를 위한 한 줄기 빛이 되기를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