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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나자마자 포로로 끔찍한 고문 치열한 전투 희망으로 견뎌낸 그날들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⑦ 최 종 환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최종환(87) 옹은 1927년 황해도 금천군에서 태어났다. 금천군은 지금의 개성시에서 북쪽으로 30~40㎞ 떨어진 소도시다. 최 옹은 부모님과 6형제와 함께 행복하고 유복한 어린시절을 지냈다. 금천군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1945년 중학교 재학 중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당시 북에서는 부유한 가정은 모두 함경북도로 강제 이주시켰다. 부르조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청소가 시작된 것이다. 그 해 12월쯤 온 가족이 야밤 탈출을 할 계획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빈 몸으로 38선을 넘었다. 예상치 못한 월남으로 최 옹과 가족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운명도 이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황해도서 유복한 어린 시절

北 강제이주 조치에 가족 월남



육군 정보과 사병으로 입대

위험 임무 마다치 않고 충성



전쟁 발발하자 북에 끌려가

악명 높은 38보안대 고문 당해

기지 발휘해 죽을 고비 탈출

해주 수향산에서 숨어지내다

UN 군부대 만나 합류

피난민 대열 북한군 색출 작업



중공군 공세 맞서 임진강 전투

서부전선서 영국군과 남침 저지

적 보급창고 점령 뜻밖의 수확

1954년 제대… 가족 생사 몰라



現 참전유공자회 안산 지회장

지역 학교 방문·초청 안보강의

6·25 의미 알리며 노익장 과시
 

 

 


■ 1사단 입대, 전쟁과 동시에 포로생활

최 옹은 1948년 8월 육군 1사단 11연대 정보과 사병으로 입대했다. 부대 소재지는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우포리 예성강지구. 최 옹은 몇 년 전 강제 이주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북한 정권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보수집 임무에 충성을 다했다.

“나는 군 사기에 일조했다고 자부하고 싶어요. 시시때때로 월북해 적군의 활동사항 및 지방 정치 보위부 활동사항과 귀순 공작, 납치 공작 등 정보 수집에 필요한 일이라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어요.”

최 옹은 북한군이 6·25전쟁 전부터 수 없이 많은 소규모 침략을 강행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예성강지구 인근을 지키는 경찰 지원 병력이 있었는데 북한은 이미 그 때부터 우리의 유선전화를 도청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경찰지원병이 타고 오는 트럭을 공격하고 심지어 경찰의 목까지 잘라가는 악독함을 범했지요.”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평화가 깨졌다.

1사단 11연대 정보과 사병으로 근무중인 최 옹은 전쟁과 동시에 분견대로 파견돼 본격적인 대북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적군은 개성을 먼저 침략했어요. 북쪽은 자연 고립 지역이고 내가 있던 예성강지구는 오후 5시쯤 북한이 탱크를 앞세워 남침했어요. 그것이 바로 남침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전쟁 준비태세를 마치기도 전에 북한군의 침략으로 최 옹은 포로가 됐다. 전쟁 발발 1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당시 최 옹은 1사단 11연대에서 대북공작 등 독립기능을 수행하는 분견대 소속이었다. 체계가 갖춰지지 않아 2~3명의 인력만 있던 터였다.

“갑자기 수백명의 북한군과 탱크가 내려오는 거에요.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았지요. 총 쏠 겨를도 없었어요. 우리 군의 모든 서류가 적들의 손에 넘어가 불리한 처지가 되고 보니 설상가상의 상황이 닥쳐온 거죠.”

최 옹은 황해도 해주시로 이송됐다. 북한 정치보위부에 수감된 것이다. 그리고 악명높은 38보안대로부터의 고문이 시작됐다.

38보안대는 주로 습격만 하는 특수 임무 조직단체다. 한국군의 복장과 M1 소총으로 위장해 납치 암살과 남한 시설 파괴가 그들의 주요 임무다.

고문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맞아서 아픈 고통보다 앞으로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소총 개머리로 구타는 물론 우리 해방군을 몇 명이나 죽였나며 물고문까지 시키더라고요.”

물 한 사발을 4인이 나눠마셨다. 누군가 한사람이 더 마시면 마지막 사람은 못 마신다. 잡혀온 남한군 수도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최 옹은 각 지역에서 온 아군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북한군은 머리가 나빴어요. 한글을 몰랐거든. 고문을 하려고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들도 정신이 없어 우왕좌왕 했어요”

그리고 10월 초 어느날. 정치보위부 군인들이 밤 12시쯤 갑자기 포로들을 기상시키며 한 사람씩 끌어내 철사 줄로 포박했다. 그리고 5명씩 연결포박해 군용트럭에 태웠다. 총살현장으로의 이동이었다.

그 순간 하늘이 도왔다. 한국군을 돕던 미군폭격기가 해주 시내를 감시하기 위해 조명탄을 쏜 것이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밤하늘이 대낮 같이 환해졌어요. 직감적으로 미군폭격기인줄 알아챘지요. 하지만 미군폭격기는 우리를 구출하기 보다는 감시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탈출할 수 없었고 또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어요. 그래도 목숨은 연장했지요.”

다음날 최 옹과 수백명의 국군 포로들은 다시 북한군 형무소로 이송됐다. 꼼짝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최 옹은 기지를 발휘했다. 밥에다 수면제를 탄 뒤 잠이 들면 불태워 죽이려는 북한군의 정보를 입수한 것.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서 밥을 먹으라는 거에요. 수면제를 탄 밥을 먹게 하고 불을 질러 몰살 시킬려고 한 거에요. 허나 우리들은 그들의 수작을 뻔히 알기때문에 한사람도 먹지 않았어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북한군은 무작정 작전을 수행했다. 형무소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형무소 다른 동에 수감된 아군들이 출입문을 부수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각각의 동의 창문사이로 돌을 넣어줬다. 형무소는 일본군이 지은 건물이라 굉장히 튼튼했다고 최 옹은 설명했다. 탈출구는 오직 출입문 뿐이었다. 그 돌로 문을 부수자 한 사람이 경우 빠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됐다. 최 옹은 소리쳤다.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하면 전체가 몰살 한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간다.”

형무소 수감자들은 일렬로 서서 한사람씩 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동참해서 탈출에 성공했다. 4개월간의 형무소 생활이 끝이 났다.

■ UN군과 북한군 색출

1950년 10월. 최 옹은 형무소에서 함께 탈출한 전우 5명과 한동안 황해도 해주시 수향산에서 숨어 지냈다. 아무 도움 없이 남한까지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수향산은 산세가 험하고 봉우리가 높아 적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리고 최 옹은 황해도 해주시까지 적진한 UN군의 도움을 받는다.

“산에서 숨어 지내다 UN군부대를 발견하고 찾아갔어요. 신분을 확인하고 다행히 병력이 부족했던 터라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반갑게 맞아주었죠.”

UN군은 피난민 대열에 속한 북한군을 색출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해주시는 UN군의 최대 진격지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십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지역이다. UN군은 최 옹에게 색출작업을 도와줄 것을 건의했다.

“북한군이 민간인 옷을 입고 피난민 대열에 오른 거죠. 우리가 잡아내지 못하면 적군을 남한으로 보내주는게 되니까 밤낮없이 색출 작업에 임했죠.”

UN군은 피난길 길목에 원형 철조망으로 통로를 설치했고, 미군병사 3명을 지원했다. 최 옹은 능숙하게 북한군을 색출했다.

“옷은 피난복인데 눈빛은 영락없는 북한군이었죠. UN군의 눈에는 쉽지 않았지만, 지난 4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통해 똑똑히 봐왔기 때문에 저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최 옹과 UN군은 2일간 군용차 4대분의 인민군을 색출해냈다. 며칠 후 UN군의 전진명령으로 작별을 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남한 땅을 밟게 됐다.

■ 서부전선, 생생한 임진강전투

1951년 최 옹은 파주시 문산읍 1사단 15연대로 배치됐다. 포로생활의 고통도 조금씩 잊혀지고 있었다.

그 해 4월 임진강 전투가 시작됐다. 1951년 4월 파주 설마리에서 벌어진 임진강 전투는 영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한 대표적 고립방어 전투다.

북한은 중공군 인해전술의 힘을 빌렸다. 포병과 전차의 화력지원에도 인해전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국군과 연합군은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거듭해 전세가 위태로웠다.

“임진강 전투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군은 낮에는 진격하고, 밤에는 철수하는 방식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했어요. 우리도 영국군을 도와 서부전선을 지킨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서부전선 공격은 거셌다.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은 이미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어 서부전선이 마지막 침략 가능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최 옹이 속한 15연대의 임무는 영국군이 중공군과 대치를 벌이고 있는 사이를 틈 타 침략을 노리는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전우들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빗소리와 벌레 소리에도 총구를 겨눠야 했다.

사상자도 넘쳐났다. 임진강은 중공군 시체와 중공군이 보급품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랑말 사체로 넘쳐났다.

며칠 후 UN군의 탱크 지원으로 북한군의 침략은 다소 지체됐다. 최 옹이 속한 15연대는 중대, 소대별로 나눠서 필사적으로 적진을 공격하며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켰다. 공격만이 최선의 방어였다. 중공군의 기세도 꺾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뢰가 변수였다.

북한군은 전투가 비교적 덜한 밤 시간대를 이용해 서부전선 주요 전투지역에 지뢰를 설치했다.

“땅속에 묻는 지뢰는 찾기가 쉬어요. 아침이 되면 흙 색깔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터지는 지뢰가 있어요. 바로 옆에만 지나가도 터질 수 있지요. 아주 무시무시했어요.”

어느날 최 옹이 속한 15연대는 뜻밖의 수확을 올렸다. 적진 침투 과정에서 중공군의 보급창고를 점령한 것이다. 식량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보급창고 점령은 큰 수확이었다. 동시에 중공군의 공격흐름도 끊어 놓을 수 있었다.

“중공군 창고를 점령했는데 아주 컸어요. 큰 옥수수마대와 오리알까지. 당시 놀라웠던 것은 오리고기를 상하지 않게 처리한 거에요. 트럭 여러대 분량으로 기억하는데 굉장히 오랫동안 유용하게 먹었어요.”

그 해 6월 총성이 끊이지 않았던 서부전선은 수만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제대 그리고 제 2의 인생

최 옹은 1954년 1사단을 제대했다. 가족의 생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최 옹은 군대 동기들을 찾아 다니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최 옹은 미군부대에서 식당일부터 시작해 돈이 되는 일은 모두 찾아 나섰다. 1957년에는 결혼을 하고 가정도 꾸렸다.

그리고 6·25 전쟁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지난 2005년부터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안산시 지회장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안보 의식을 알리기 위해서다.

최 옹은 현재 안산지역 초·중·고등학교를 방문하거나 초청해 안보 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회 회원들과 통일전망대 전적지 순례를 다니며 다시 한 번 6·25전쟁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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