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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삼켜버린 눈물의 ‘형제애’

해병대 지원한 동생 혼자 보낼 수 없어 동반 입대
인민군 남침 3일 만에 서울 점령
주민 사상교육 하다 수백명 총살
동생과 인왕산서 3개월 숨어 지내

 

1950년 봄. 당시 28살이던 이필문(91)옹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건어물가게를 운영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옹은 북한에서 내려오는 북어를 사들여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납품 및 판매를 했다. 당시 남과 북 사이에 38선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돈벌이로 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도 충분했다. 사업 수완이 좋아 거래하던 북어의 양도 마차로 옮길 정도로 늘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 북한의 남침, 공산주의 사상교육

1950년 6월 28일. 6·25발발 3일 만에 인민군은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 이 옹은 민보당이라는 사회민간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옹이 속한 민보당원 수십명은 인민군 남침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며 나라를 지키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무기가 없어 대응할 능력이 떨어져 며칠만에 해산했다.

이 옹은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인근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다.

“인민군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어요. 다만 밤만 되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놓고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주입시켰죠.”

인민군은 경찰과 군인, 그리고 국회의원 가족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사상교육을 시작했다.

“그들의 사상내용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김일성 장군은 가난한 사람들도 살기 좋게 만들어 준다고 했죠. 남보다 북이 살기 좋다고 매일 얘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상교육이 좀처럼 확산되지 않자 인민군은 시민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옹은 동생(필순)과 함께 동네 뒷산인 인왕산으로 도망쳤다.

이 옹과 동생은 어머니가 인민군의 눈을 피해 늦은 밤 가져다주는 밥을 먹으며 숨어 지냈다.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밥을 가져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지 않아 밤에 혼자 집에 내려가 봤습니다. 집에는 밥이 다 떨어져 없었고, 어머니는 누워계셨어요.”

이 옹은 이렇게 굶어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먹을 것을 구하러 마포 나룻터로 향했다.

마포 나룻터에서 이 옹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인민군들이 잡아온 국회의원, 군인, 경찰을 조기 엮듯이 엮어서는 그대로 총살하는 겁니다. 시체는 강가에 버렸죠.”

이 옹은 충격에 빠졌다. 수백여명의 총살로 마포강물은 빨간색으로 변했다고 이 옹은 설명했다.

이 옹은 다시 인왕산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다시 힘겨운 은둔생활을 지속했다. 그리고 9월 28일 라디오를 통해 국군과 UN군의 서울 수복소식을 접했다.

UN군의 지원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국군은 그 기세를 몰아 육군은 평안북도 중강진까지, 해병대는 함경도 원산까지 진격해 나갔다.

이 옹과 동생은 3개월 만에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동생의 해병대 자원 입대, 동생따라 해병대 5기로

 

 

 

1950년 12월 어느 겨울날. 동생(필순)이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겠다고 이 옹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동생의 입대를 말렸죠. 전세가 역전됐으니 이제 아무일 없을 거라고요. 그런데 동생은 이같은 고비가 또 있을 거라며 입대를 서둘렀어요.”

이 옹은 동생이 라디오를 통해 해병대 박정모 소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옹은 동생의 입대를 더는 말릴 수 없어 배웅 차 신체검사 현장인 서울 일신국민학교까지 따라갔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순간 이 옹의 생각이 바뀌었다.

“동생을 데려다 주고 나오는데 생각이 바뀌었죠. 도저히 아우만 보낼 수 없더라고요. 나도 바로 달려가서 신체검사를 받았어요.”

하지만 이 옹은 해병대에 입대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교관이 몇 살이냐고 묻기에 처음에는 28살이라고 했죠. 그러니 나이가 많다고 입대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탈락자 줄에 서 있던 이 옹은 다시 교관의 눈을 피해 신체검사 줄에 섰다.

“두번째는 나이를 속였죠. 23살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합격줄에 섰습니다.”

그렇게 형제는 함께 해병대 5기로 입대했다. 해병대 5기 1천272명의 신병교육은 진해에서 진행됐다. 신병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진해 경화 국민학교(당시)로 이동했다.

신병 교육은 또 다른 세계였다.

무엇보다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양은 양재기에 시래기국과 주먹밥이 전부였어요. 3~4번 마시면 바닥이 드러났죠.”

고된 훈련은 계속됐다. 교관들은 신병들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강행했다.

훈련 15일째.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사격 훈련이 있었다. 이날 이 옹에게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동생이 너무 배고파했어요. 결국 동생은 저녁 시간을 틈 타 훈련장 옆 민가에 가서 밥을 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주민이 교육사관에게 신고를 한 거예요.”

그날 저녁. 사관이 말했다.

“해병대 얼굴에 먹칠 한 사람 나와.”

동생은 사관으로부터 엎드려 자세로 수십대의 몽둥이질을 당했다. 이 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형 입장에서 정말 그 장면은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동생은 그날 후로 사흘 동안 앓아 누웠죠.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신병들은 20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각자 자대로 발령 받았다. 이 옹과 동생은 강원도로 배정받았다.



■ 양구 도솔산전투

1951년 6월 4일. 이 옹이 속한 해병대 1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는 양구 도솔산으로 적진 침투 명령을 받는다.

해발 1천미터가 넘는 도솔산은 철원, 양구, 양양을 잇는 삼각지대의 요충지다.

“도솔산은 동부전선의 핵심요충지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동시에 인민군의 중요 통로이기 때문에 이곳을 끊어야 했죠.”

인민군 2개 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은 국군에 앞서 미군 5연대가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나 해병대가 지원사격에 나선 곳이다.

계속된 강우와 짙은 안개로 항공 및 야포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돌격 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1소대는 야간 공격을 택했다.

“그날 비가 굉장히 많이 왔어요. 비오는 날을 택한 이유는 소리가 덜 나기 때문이에요.”

1소대는 인민군 적진의 8부능선까지 올라갔다. 그 때 소대장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이 옹과 소대원들은 M1소총의 방아쇠를 잠그고 총구 밑으로 대검을 장착했다.

1소대원들은 수류탄 투착과 동시에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또 해병대 포중대의 지원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폭우로 무전기가 빗물에 잠겨 통신이 두절됐다.

“전장에서 통신두절은 사람으로 보면 맥이 끊긴거에요. 이미 8부 능선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소대장은 후퇴가 아닌 돌격 앞으로를 외쳤죠.”

지원사격을 하던 후방 포중대와 연락이 끊어지면서 포중대는 계속해서 적진을 향해 포를 쐈다. 아군의 포에 아군이 죽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인민군 벙커 안으로 숨었죠. 어떻게 정복한 정상인데요. 그런데 갑자기 후퇴하던 인민군이 재돌격을 하는 거에요.”

해병대는 대검을, 인민군은 창을 들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군 완장이 보이지 않으면 무조건 대검을 휘둘러야 했다. 순간, 이 옹은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적에게 가슴을 찔린 것이다.

“인민군에게 찔린 줄도 몰랐어요. 순간 정신이 희미해지더라구요. 도솔산은 워낙 경사가 급해 그대로 밑으로 구르고 말았죠. 그리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장대비를 얼마나 맞았을까. 정신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을 거예요. 정신이 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옆에서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지만 모기소리처럼 약하게 ‘나 좀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 옹은 나뭇잎으로 빗물을 받아 먹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몰라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흐른피가 허리에서 더이상 흘러 내리지 못해 묵처럼 굳어있었어요. 총과 철모는 다 없어지고 다행히 붕대는 남아 있어 가슴에 붕대를 감았죠.”

방향 감각을 잃었지만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칠흑같은 어둠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인민군 1개 분대와 마주친 것이다. 이 옹의 몸상태로는 도망갈 수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인민군은 이 옹의 목에 총을 겨눴다. 이 옹은 기지를 발휘했다.

“문천에 가면 가족이 있다고 말했어요. 국군이 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들도 속아 저를 부축하고 그들이 있는 의무대로 향했죠.”

아무말 없이 인민군과 걷기 시작했다. 칼에 찔린 이 옹은 걷는 것 조차 힘들어 인민군과의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국군포가 앞에 가던 인민군 1개 중대를 정확하게 명중한 거에요. 일부러 조준하고 쏴도 그렇게 명중하기란 쉽지 않을 정도였죠. 포가 또 날아올까 포 떨어진 자리에 숨었죠. 포는 한 번 떨어진 자리에 다시 떨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후 주변이 고요해졌다. 이 옹은 다시 능선을 찾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 후 직감적으로 8부 능선쯤 도달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적진을 탈환한 해병대 6중대를 만났다.



■ 동생의 전사(戰死) 소식 그리고 제대

이 옹은 춘천에 있는 해병대 연대본부로 후송됐다. 연대본부는 논 위에다 천막을 치고 있을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

이 옹은 부상 정도가 심해 진해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어느날 군의관으로 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한다.

동생의 전사 소식이다. 바로 옆 중대에서 서로를 의지했던 동생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함께 했던 어린시절과 전쟁 후 동반 입대해 도솔산 전투에서도 적진을 향해 진격했던 동생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죄책감과 후회로 이 옹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정말 괴로웠죠. 도솔산 전투가 승리로 끝나 어딘가에서 잘 지낼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병대 입대를 말리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웠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이 옹은 진해에서 6개월간의 치료를 받고 1952년 봄 대청도로 파견됐다. 심신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중대장이 고생 좀 그만하라고 대청도로 파견시켰죠. 대청도는 그나마 치열한 전투지역이 아니라 마음도 한결 편했습니다.”

이후 이 옹은 대청도, 서부전선 장단 지역에서 군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소식을 접했다.

“휴전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벙커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기뻤어요. 인민군과의 거리가 얼마 안돼 서로 같이 살자고 손짓했던 기억도 납니다.”

휴전 후에도 이 옹은 4년간의 군생활을 더하고 1957년 제대했다.



■ 그리고···

이 옹의 집안 거실에는 참전용사 증서와 젊은시절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그만큼 6·25참전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옹은 참전용사를 향한 후손들의 마음이 해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1950년 12월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해병대 5기의 명단이다. 지금은 당시 입대한 1천272명 중 약 40명의 연락처만 남아 있다.

이 옹은 현재 상이군경회 수원지회 모임에 매달 참석하고 있다. 6·25 참전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오늘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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