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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전쟁⑨ 류오희 옹

잠시 다녀온다며 용인 집 나섰다 아비규환 생지옥 속으로… 어느덧 백발이 된 열일곱 소년병

 

1950년 가을 용인. 당시 17살이던 류오희(81) 옹은 중학교 3학년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지만 용인지역은 피해가 적은데다 어린 나이였기에 본인이 전쟁에 참전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또 당시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UN군의 서울 수복 소식을 접하며 전세 역전으로 곧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류 옹은 국가에서 소집한 국민병(국민병대)으로 착출됐다. 잠시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 류 옹은 그날로 소년병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 소년병 착출, 힘든 기초군사훈련

1950년 12월. 류 옹은 군번도 없는 신분으로 각지에서 소집된 소년병들과 함께 용인에서 경남 고성 삼천포까지 행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신병 군사훈련이 시작됐다.

“어디로 가는줄도 몰랐어요. 무작정 삼천포까지 걸어갔죠. 내 또래부터 30세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삼천포에 마련된 국민학교 임시훈련장에 모였어요.”

신병교육은 기초적인 제식훈련과 정신교육, 간단한 소총 분해·조립 등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연필을 잡아야 할 손에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신병 교육은 또 다른 세계였다. 교실마다 수십명의 소년병으로 가득찼다. 매서운 한파를 온몸으로 견뎌내기에는 소년병들은 너무 어리고 나약했다. 불편한 잠자리는 물론 하루에 1~2끼의 식사만 제공됐다.

“전국에서 모인 소년병이 하루에 300여명씩 들어오는 거에요. 교실 하나가 금방 꽉 차더군요.”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도 무엇인지 모르는 소년병들은 그렇게 낯선 세계와 첫 대면을 했다. 무엇보다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느날, 한 소년병이 훈련장 옆으로 지나가는 장사꾼의 수레를 뒤엎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훈련병이 갑자기 길가던 장사꾼 수레를 뒤엎는 거에요. 그러더니 너나할 것 없이 달려가서 먹을 것을 훔쳐 먹었죠. 그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어요.”

고된 훈련은 2개월간 계속됐다. 그 사이 앳된 얼굴이지만 어리광은 싹 사라졌다.

2개월 후 류 옹은 다시 동기생들과 배를 타고 제주도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2개월 훈련을 마치고 전투지역으로 배정받는 줄 알았는데, 다시 제주도로 이동하는 거에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군번이 부여됐죠.”

류 옹과 동기생들은 육군 군번을 부여받고,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다시 4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군번이 부여되니까 하루 세끼의 식사가 지급됐습니다. 하루 세끼의 식사를 준다는 것만 해도 정말 행복했어요.”

류 옹과 동기생들은 이미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터라 비교적 수월하게 4주간의 교육을 마쳤다. 그리고 각자 부대로 발령받았다.

■ 강원도 양구전투

1951년 5월. 류 옹은 강원도 양구 소재 육군 7사단 3연대 1대대 본부중대로 발령 받았다. 이곳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동부전선 지역이다.

동부전선은 철원, 양구, 양양을 잇는 요충지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류 옹이 처음 배정받은 임무는 중대장 지원 업무였다.

“다행스럽게 적진 침투가 아닌 중대장을 돕는 업무를 맡았어요. 나이가 어려서 아마 그쪽으로 배정된 거 같아요.”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합작 공격으로 소대 전멸 소식이 이어지며 인원 부족으로 류 옹도 적진 침투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류 옹은 양구 북방 문등리의 양갈래 고지 지역을 배정받았다. 양갈래 고지는 숲이 무성해 적진 침투가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드디어 총알받이로 나가는구나’ 생각했죠. 신병들의 경우 하루 평균 10명 중 9명은 죽었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어요.”

류 옹은 트럭을 타고 적진으로 이동했다. 트럭에서 내리면서부터 여기저기서 총성과 고성이 울려 퍼졌다.

곧바로 본부 중대로부터 인민군이 주둔해 있는 500고지를 침투하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됐다.

그리고 낮 12시 정각 공격이 개시됐다. 국군 폭격기와 포병대는 공중공격을, 류 옹이 속한 중대는 지상공격을 각각 배정 받았다.

“지상공격 20~30분에 앞서 공중폭격과 포병대의 포 지원 사격이 시작돼요. 그리고 곧바로 육군이 수류탄을 던짐과 동시에 포복으로 적진을 침투합니다.”

그런데 사인이 맞지 않았다. 국군 폭격기가 포탄 투하 위치를 잘못 알아 1개 중대의 80%가 국군의 공중폭격에 목숨을 잃었다.

“등에 ‘X’자의 대공표시를 한 군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 ‘X’표시는 공중에서도 쉽게 보이죠. 국군 폭격기가 대공표시 200~300m 앞에다 포탄을 투하해야 하는데 잘못 투하한거죠.”

살아 남은 중대원들은 적진에서는 인민군들의 공격이, 공중에서는 국군의 계속된 오발로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훈련소에서 배웠던 군사훈련은 통하지 않았다. 쉴새 없이 수류탄을 던지는 것만이 최선의 방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우들의 얼굴이 바꿨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더욱 강행했다. 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적진 탈환을 노렸다.

■ 미 2사단과의 합동공격 그리고 부상

1951년 7월. 육군은 미 2사단의 지원을 받는다.

“양구전투는 동부전선 전투중에서 가장 치열하다 보니 미군의 지원이 있었어요. 미군과의 생활은 또 다른 경험이었죠.”

육군은 미군과 합동으로 양갈래 고지 점령에 나섰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이길 방법은 이 방법 뿐이었다. 미군의 지원은 전세 역전에 큰 보탬이 됐다.

“다시 능선을 따라 적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당시 총이 있는 중공군들은 드물었어요.”

중공군과의 전투는 육박전의 연속이었다. 눈앞에 수십, 수백명의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밀려왔다. 총을 쏠 시간도, 수류탄을 투척할 시간도 없었다. 먼저 때려야만 했다.

류 옹은 중공군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도 없을 만큼 적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공격만이 최선의 방어였다.

“한참을 정신없이 육박전을 벌였죠. 누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만큼은 아픈줄도 몰랐어요.”

전투의 시작과 끝은 없었다.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이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소강상태가 생기면 인민군은 어김없이 선전방송을 틀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손들고 북으로 넘어오면 잘살게 해준다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방송을 했어요.”

미군과의 생활은 류 옹에게 신세계였다. 식사 배급조차 불안정한 국군과 달리 미군은 식사 외 각종 보급품 지원이 원활했다.

“미군 보급품은 정말 좋았어요. 군복, 우비 등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낫죠. 당시 육군은 광복천을 군복으로 썼는데 질감이 하늘과 땅 차이었어요.”

하루는 1개중대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노무자들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운반을 통해 식량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노무자들이 이동 중 인민군의 총에 맞은 것이다.

“전방까지 차가 못 들어오니 30~40대의 노무자들이 밥과 실탄을 옮겼어요. 그런데 하루는 오지 않는 거에요. 노무자가 오지 않으면 해당 중대는 밥은 물론 실탄을 보급받지 못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습니다.”

해당 중대는 식사는 물론 실탄이 없어 며칠간 숨죽여 지내야만 했다.

어느날, 인민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됐다.

류 옹은 여느 때처럼 수류탄과 총을 메고 적진을 향했다. 인민군은 직전 공격에서 피해가 심했는지 육박전을 피하고 15~20m 가량 떨어져 수류탄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희뿌연 연기로 가득찼다. 류 옹은 후퇴를 선택했다. 순간, 바로 옆에서 공격을 하던 전우가 류 옹을 붙잡았다.

“도망가려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붙잡는 거에요. 언뜻 보니 저보다 1~2기수 앞선 전우였어요. 적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테니, 제게 안전핀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참으로 용감했죠.”

류 옹은 안전핀을 제거해 전우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우는 적의 공격으로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수류탄이 터진 곳은 가파른 계곡이었다. 류 옹은 그 전우가 죽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도망치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순간, 희뿌연 연기가 눈앞을 가득 메웠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류 옹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1시간 가량을 정신 없이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1시간쯤 달리다 보니 땅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감각도 점점 사라졌죠. 신발을 벗어보니 피가 고여 있었어요. 그제서야 다리에 파편이 박힌걸 알았죠.”

류 옹은 울산 27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리고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하루 아침에 목발 신세를 져야 했기에 류 옹의 마음은 참담했다. 장애는 아픔보다 더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날, 병원에서 낯 익은 사람을 만났다. 3개월전 양구 전투 계곡에서 함께한 전우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있는 거에요. 순간 눈물이 쏟아졌죠. 그 전우의 얼굴은 상처로 형편 없었어요. 서로를 한참 동안 껴안고 울었어요. 그 전우도 내가 죽은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또 다시 기약없는 작별을 했다.

■ 제대 그리고 제2의 삶

울산 27육군병원에서 치료 후 퇴원한 류 옹은 원호대(839부대)로 발령 났다. 원호대는 부상 당한 군인들을 위한 별도의 부대다.

류 옹은 그곳에서 잠시 생활하다가 1951년 12월 명예 제대했다.

류 옹은 1년 만에 고향인 용인 마평동으로 돌아왔다. 집은 폭격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했다.

8남매 중 장자였던 류 옹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원주 미군부대에 취업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공부도 다시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류 옹은 지난 2011년부터 6·25참전유공자회 용인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병역 의무가 없었던 소년병들의 권익을 되찾아주기 위한 ‘6·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두달에 한 번씩 소년지원병 전우회 모임에 참가해 참전 소년병들과 관련된 제도가 마련될 수 있도록 국회 건의활동을 하고 있다.

군번 없이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동료들의 애국정신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류 옹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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