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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특별기획,나의전쟁⑩ 김진하 옹

의사의 꿈 접고 해양대 진학
전쟁 일어나 새로운 목표 물거품
육군 종합학교 입교 소위 임관

 

1950년 봄 전북 군산. 당시 23살이던 김진하 옹(86)은 해양대학교에 재학중인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김 옹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김 옹은 해양대로 진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목표를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꿈은 꿈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 육군종합학교 입교

1950년 7월. 6·25 전쟁 발발로 김 옹이 있던 군산도 전시상황에 직면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학도병으로 차출돼 군산 소재 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소집됐다. 김 옹은 해양대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해군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김 옹은 갑작스런 학도병 차출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학도병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각종 증빙 서류를 준비하고 관계자를 찾아갔다.

“나는 대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간다고 했어요. 다행히 가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김 옹은 부모님이 계신 서울 당산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집 주변은 이미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김 옹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숨어 지내며 상황을 살폈다.

“인민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단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 집을 찾아갔어요. 인민군은 물론, 국군의 눈에 띄면 의용군으로 징집되기 때문에 꼼짝없이 숨어 지냈죠.”

김 옹은 1~2개월가량 숨어 지내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김 옹은 큰 결정을 내렸다.

“가만히 보니 전쟁이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 않았어요. 어차피 군대에 소집될 나이였기 때문에 육군 종합학교 시험에 응시했죠.”

김 옹은 공부에 소질이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12월 김 옹은 부산 소재 육군 종합학교 17기생으로 입학했다. 곧바로 부산 동래여고로 소집돼 군사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장교였기 때문에 화기 사용은 물론, 행정업무와 지도 읽는 법 등 심도 있는 훈련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듬해 2월 김 옹은 소위로 임관했다. 동시에 전방으로 발령 났다.

◇ 육군 3사단 배치, 가리왕산 전투

1951년 2월. 김 옹은 강원도 횡성 소재 육군 3사단 22연대 1대대 2중대 1소대장으로 발령 받았다. 발령과 동시에 적진 침투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총이 없었다.

“원래 장교에게는 권총이 지급돼야 하는데 사정이 열악해 지급받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일반 병사들 총을 뺏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 옹은 대검을 들고 소대원들의 장비상태를 확인한 후 적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김 옹과 소대원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해야 했다. 김 옹이 속한 3사단이 인민군의 전술에 힘없이 무너지며 후퇴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3사단은 그날로 충북 제천까지 밀려 내려갔다. 그리고 며칠간 다시 정비를 갖춘 후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정선으로 향한 3사단은 가리왕산 전투를 맡았다. 해발 1천500m 높이의 가리왕산은 산세가 험해 적진 침투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다시 교전이 시작됐다.

이미 1천500m 고지를 점령한 인민군은 1~2m 깊이의 연락호를 파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평지가 아닌 높은 곳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적진 침투가 쉽지 않았다.

“매일 매일이 교전이었어요. 대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잠시라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죠.”

국군과 인민군은 매일 쫓고 쫓기는 교전을 벌였다. 총알이 빗발치고 사방에서 쉴 새 없이 고성이 울려 퍼졌다.

전투보다 더 힘든 것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정말 추웠어요. 허리춤까지 눈이 내려 이동도 쉽지 않았죠. 식사는 노무자들이 가져다주는데 산속에서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아 사나흘씩 굶기도 했습니다.”

김 옹은 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강해져야 했다. 대치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돌격뿐이었다. 김 옹은 소대원들을 인솔하며 적진을 향했다. 하지만 적진 탈환이 쉽지 않았다.

“산악전은 폭이 좁은 능선으로 다니기 때문에 맨 앞의 전초병이 총을 맞으면 뒤따라 오는 대원들 모두 후퇴할 수 밖에 없어요.”

김 옹은 결단을 내렸다. 기존의 전초병 진격 방식에서 벗어나 1천500m 고지 앞에서 분대별 분산 작전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산세가 높고 험해도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경사가 완만해 집니다. 인민군 역시 연락호를 길게 파서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가 분산 공격해야 그들의 공격도 분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 옹과 소대원들은 분산 작전을 펼쳐 인민군을 교란시켰다. 새로운 전술 적용으로 적진을 비교적 쉽게 탈환했다.

◇ 가리산 전투

1951년 4월. 가리왕산에서 승전보를 올린 김 옹의 소대는 오대산을 거쳐 강원도 홍천 소재 가리산으로 향했다.

해발 1천m의 가리산은 가리왕산 보다는 산세가 험하지 않았지만, 계곡과 암벽이 많아 적진 침투가 쉽지 않은 지형이다.

전투에 자신감이 붙은 김 옹은 여느 때처럼 적진 공격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작전이 개시됐다.

“작전명령을 받고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데 인민군과 마주친 거에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다음 공격을 준비했죠.”

김 옹은 중대본부에 연락해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당시 중대본부에는 박격포가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지원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김 옹은 연락병을 보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연락병마저 연락이 두절됐다.

그 사이 김 옹은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눈앞에서 3분대장이 총에 맞았어요. 처음으로 내 부하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습니다. 처참했지요.”

김 옹은 달라졌다. 평소 시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김 옹은 부하의 죽음을 목격한 뒤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소대원들과 남아있는 모든 수류탄을 던졌다. 지형이 좋지 않아 육박전과 사격으로는 인민군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류탄에서 튄 불꽃이 가랑잎에 붙어 산불이 났다.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한쪽에서는 공격하고 한쪽에서는 불을 끄고 불바다가 따로 없었죠.”

전투는 계속됐다.

동부전선은 철원, 양구, 양양을 잇는 요충지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인민군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장시간 계속된 전투에서 결국 인민군이 무릎을 꿇었다.

“전투능력은 인민군이 우리보다 우수했어요. 다만 식량 보급이나 총기 등이 국군이 좀 더 좋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죠.”

그리고 몇 시간 전 그렇게 기다리던 연락병이 풀이 죽은 채 전장에 모습을 보였다.

연락병은 김 옹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김 옹은 연락병으로부터 씁쓸한 소식을 들었다.

“연락병이 그러는 거에요. 중대에 가니 모두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고. 본인도 무서워 도망가려고 기다리다 총성이 멈춰 다시 왔다고 하더라구요.”

아침이 찾아왔다. 김 옹은 전사한 3분대장을 모포로 싸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다.

3분대장의 전사로 소대 분위기가 다소 침울해져 있었다. 김 옹은 다시 정비를 갖췄다.

며칠이 지났을까. 다시 본부 중대로부터 작전 명령이 하달됐다.

김 옹은 고민에 빠졌다.

“1개 중대가 가도 침투가 쉽지 않을 지역을 1개 소대로 침투하라는 내용이었어요. 막막했죠.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생각했어요.”

김 옹과 소대원들은 적진 침투 준비를 시작했다.

수류탄과 실탄만 챙기고 배낭과 모포는 모두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쪽 고향을 향해 인사를 했다.

“소대원들도 이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모두 땅만 쳐다보고 있었죠. 적막감이 감돌았어요. 하지만 저와 소대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에 나섰어요.”

김 옹은 적진을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대본부에 4.2인치 포 지원을 부탁했다.

포 지원은 김 옹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공격권이었다.

적진으로 향한 김 옹과 소대원들은 적이 주둔한 고지 밑에서 포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중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지막 위치 확인을 위해 예광탄을 쏘라는 명령이었다. 김 옹은 예광탄 10발을 쐈다.

잠시 후 중대장으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너희들이 있는 곳이 목표다.”

무전을 듣자마자 김 옹과 소대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인이 맞지 않아 소대와 본부중대의 적진 목표가 달랐던 것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죠. 아군의 포에 아군이 몰살할 위기였던거죠. 중대장이 예광탄을 쏘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에요.”

김 옹과 소대원들은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다.

◇ 중공군 개입, 포로 생활

1951년 5월. 중공군 개입이 거세졌다.

“중공군은 UN군이 있는 지역은 공격하지 않았어요. UN군 화력이 좋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든요. 인민군과 중공군은 동부전선에서도 국군 주둔 지역 위주로 공격을 강행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인민군과 중공군 5만여명이 동시에 남하했다.

“당시 7사단과 5사단이 서북쪽을, 9사단과 3사단이 동북쪽을 맡았죠. 그런데 인민군과 중공군이 7사단과 5사단이 있는 곳을 공격하며 우리가 있던 지역은 자연 고립 됐어요.”

9사단과 김 옹이 속한 3사단이 중공군 개입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김 옹은 후퇴를 하던 작전계 병사를 붙잡았다. 작전계 병사는 인민군과 중공군이 밀고 내려 온다는 말만 남기고 줄행랑을 쳤다.

“1초가 몇 시간 같았죠. 국군 수만명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정신 없이 도망쳤습니다. 뒤섞여서 누가 누군지도 모를만큼 남쪽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김 옹은 1분대와 2분대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 옹은 적과 마주칠 것을 대비해 옷에 붙어있던 계급장을 모두 떼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골짜기에 다다른 김 옹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500m쯤 밖에서 보니까 군인들의 행동이 이상했어요. 국군은 아무리 위급해도 약진을 하지 않는데 제가 본 병사들은 약진을 하고 있었죠. 인민군들이었죠.”

인민군들은 이미 중공군의 힘을 빌려 강원도 인제 지역을 점령했다.

인민군들은 국군에게 총을 쏘지 않고 포로로 만들기 위해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마구 쐈다. 김 옹은 3소대장과 함께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함께 도망치던 3소대장이 갑자기 가시덩굴로 숨는 거에요. 육감적으로 앞에 인민군들이 있다는 걸 알았죠.”

김 옹은 3소대장을 구하기 위해 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저까지 가시덩굴로 들어가면 둘 다 죽은 목숨이죠. 총을 버리고 가만히 앉아 항복했어요.”

인민군은 김 옹을 끌고 임시수용소로 향했다.

심문이 시작됐다.

“한 인민군이 다가와 ‘앞에 있는 사람을 아냐’고 묻더라구요. 선임하사로 보이는데 전 모른다고 답했죠. 저는 일반 연락병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김 옹은 신분이 탄로날까 노심초사했다.

인민군은 포로로 잡은 국군들을 모아 놓고 본격적인 사상 교육을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일성 장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미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함께 해방전사가 되자고 했죠.”

인민군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신 교육을 시켰다.

김 옹은 탈출을 계획했다. 장교 신분이 탄로나면 북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서둘러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인민군의 감시가 비교적 허술한 새벽시간을 틈타 전우 3명과 함께 힘을 모아 탈출에 성공했다.

김 옹과 전우들은 도망치던 길에서 미군부대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낙오병으로 분류, 대구 보충대에서 심사를 받고 다시 원대로 복귀했다.

◇ 제대, 그리고…

1953년 7월. 김 옹은 강원도 양구에서 휴전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김 옹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쉬움이 가득했다. 통일에 대한 아쉬움이다.

김 옹은 8년간 군 복무를 더하고 1961년 제대했다.

그리고 6·25전쟁의 의의를 알리고 참전용사들의 권익을 위해 지난 2009년부터 올해 봄까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용인시지회장을 역임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나라사랑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 옹은 오늘도 인근 초·중학교를 찾아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국가의 소중함을 알리는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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