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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바친 풋풋한 젊음 백발 용사 조국애는 계속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나의전쟁 ⑫ 정 택 진 옹

 

대학 1학년 재학중 전쟁 터져
그해 12월 입대 열흘 기초훈련
소총 방아쇠 당기는 법만 배워

치악산서 치른 첫 전투 ‘아찔’
UN군 직사포에 아군 맞을뻔

산악지대 불량 보급품 악조건
군화 밑바닥 닳아 맨발 드러나
중공군 시체 신발 벗겨 신기도

국군 육탄전만 고집 사기 저하
포탄 파편에 맞아 3개월 치료

1952년 소위 임관 공비토벌 임무
게릴라전 투입 목숨 건 싸움 계속
휴전 3년 후 1956년 중위 제대

현재 참전용사 시흥시지회장 맡아
회원 복지·권익향상 위해 동분서주

1950년 6월. 정택진 옹은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당시 정 옹은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정 옹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충무로에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군인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며칠 후 새벽 6·25전쟁이 발발했다. 며칠 전 불길했던 직감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 하루 아침에 피난길

1950년 6월 28일 아침. 가족과 함께 집에 있던 정 옹은 ‘쾅’ 소리에 크게 놀랐다.

“집이 쾅 하고 울리는 거에요. 유리창이 모두 박살날 정도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국군이 인민군에 밀리자 한강다리를 폭파한 거였어요.”

미아리에서 한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몇 시간 동안 진격을 못한 인민군은 남양주 홍릉 방면으로 2대의 전차를 우회 기동 시켰다. 후방에 전차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미아리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한강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

며칠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하자 정 옹은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 외가집으로 향했다.

정 옹과 가족들은 서울 대흥동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꼬박 4일을 걸었다.

“양수리까지 하루가 걸렸고, 양평까지 이틀이 걸렸죠. 문막까지 3일, 그리고 나흘째 도착했어요.”

정 옹과 가족들은 3개월간 원주에서 숨어 지내며 전황(戰況)을 살폈다.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대흥동으로 향했다. 서울 수복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은 불에 타 없어진 뒤였다.

“서울 수복 소식을 접해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집이 불에 타 무너져 내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어요.”

정 옹과 가족들은 절망에 빠졌다.



◇ 육군 입대…치악산 전투

그해 12월 정 옹은 군대 소집 통보를 받았다.

함께 살던 정 옹의 형은 12월 18일에, 정 옹은 닷새 뒤인 12월 23일 입대했다.

정 옹이 속한 023부대 수천명의 예비 훈련병들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 구포국민학교로 향했다.

“한 교실에 수백명씩 들어찼어요. 말이 좋아 학교지 일제시대 때 지어진 소학교로 판자로된 건물이에요.”

곧바로 신병 기초 군사훈련이 시작됐다.

하지만, 훈련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교육내용과 교육일정 등 정해진 것은 없었다. 전방에서 인력을 요구하는 무전이 오면 그때 그때 지원되는 식이었다.

“훈련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소총 방아쇠 당기는 법 빼고는 배운게 없었어요.”

무엇보다 어린나이에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배급되는 식량은 정해져 있었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쌀과 보리를 넣고 불려서 주었죠. 무엇보다 솥밑에 돌이 한뼘 가까이 쌓일 정도로 많았어요. 밤에 몰래 나와 누룽지를 훔쳐 먹곤 했는데 밥이 아니라 돌에 가까웠죠.”

정 옹은 10일간의 기초군사 훈련을 마치고 1951년 1월 10일 육군 군번을 부여 받았다. 그리고 대구보충대를 거쳐 강원도 영월 소재 3사단 23연대 2대대 8중대로 배정 받았다. 8중대는 화기중대였다.

 


“맨 처음 접한 전투가 치악산 전투였어요. 병과가 박격포로 최일선은 아니었지만, 인민군이 이미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데다 악산으로 경사가 높아 공격이 쉽지 않았어요.”

어느날, 본부중대로부터 적진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정 옹이 속한 중대는 8부 능선을 목표로 설정하고 고지를 향했다. 눈이 가슴까지 쌓여 진격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인민군의 눈을 피해 8부 능선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진격이 힘들었다.

“8부 능선까지는 점령했지만 그 후로는 경사가 수직에 가까워 더 이상 갈 수 없었어요. 경사가 수직에 가까울수록 인민군들이 우리를 공격하기가 쉬웠죠.”

정 옹의 중대는 UN군에 직사포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직사포는 말 그대로 포탄이 직진으로만 발사됩니다. 그런데 UN군은 후방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포탄이 적진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벽을 때려 되레 아군이 파편에 맞을 뻔했죠. 아주 아찔했어요.”

불량 보급품은 또 하나의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험한 산악지대를 몇 번 올라 다니다 보면 군화 굽은 쉽게 닳아 없어졌다.

하지만 보급품은 추가 지급되지 않았다. 일부 병사들은 군화 밑바닥이 달아 아예 없어져 맨발이 드러나기도 했다.

“주변에 중공군 시체가 있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신발을 벗길 정도로 군화 밑창이 쉽게 닳았어요. 눈 쌓인 산을 올라야 하는데 맨발로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고픔에 시달리다 참지 못한 병사들은 마을에 들어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급하게 피난길에 나서다 보니 옷가지, 음식류를 땅에 묻곤 했어요. 먹을 것이 나오면 좋으련만 인민군 시체가 나오기도 했지요.”

어느날 밤, 정 옹은 낮에 겪었던 전투를 생각하며 허탈감에 빠졌다.

“UN군과 미군은 인력을 중요시 했어요. 전세가 역전되면 장비를 버리고 도망가는 식이었죠. 하지만 국군은 스파르타식으로 인력의 중요성은 커녕 맨주먹으로 싸우는 육탄전만 고집했죠.”

정 옹은 사기가 떨어졌다. 사기진작 없이 전투에 임한 정 옹은 포탄 파편에 맞는 사고를 당한다.



◇ 야전병원에서 치료…소위 임관과 동시에 공비토벌 임무 수행

포탄 파편으로 대퇴부에 상처를 입은 정 옹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말이 좋아 병원이지 국민학교 건물로 유리창은 모두 깨지고 없었어요.”

시설은 좋지 않았지만,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사고 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3개월 후 치료를 마친 정 옹은 대구 보충대로 발령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력조사 및 특기조사를 통해 육군본부 부관참모부로 뽑혔다.

“대학생 신분이어서 그런지 보직이 괜찮았어요. 몸도 회복하며 동시에 행정 업무도 배우는 계기가 됐죠.”

정 옹은 부관참모부 중에서도 발간 업무를 맡았다. 발간 업무는 모든 행정을 아우르는 보직이다. 정 옹은 그곳에서 약 1년동안 행정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갑종간부 후보생 시험에 지원, 합격해 1952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정 옹은 임관 후 남원에 있는 육군 남부지부로 발령났다. 남부지부는 경비사령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부대로 공비토벌이 주 임무다.

정 옹은 수색작전에 동원됐다. 수색작전은 기습과 습격을 감행하는 전투형태인 게릴라전으로 진행됐다. 적이 오는 길목에 숨어 기습 공격만이 유일한 작전이었다.

“게릴라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시 하루살이 소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낮과 밤이 뒤바뀌었고 생명을 담보로 싸워야만 했다. 특히 정 옹이 속한 남부지부 56연대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UN군 시설을 경비하는 업무도 맡아야 했기 때문에 부담감은 더욱 컸다.

하루에도 몇번씩 전우들의 얼굴이 바뀌었고 눈앞에 수십, 수백명의 인민군이 개미떼처럼 밀려 내려와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정 옹은 인민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공격만이 최선의 방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공비토벌 임무에 적응이 될 무렵 휴전이 찾아왔다.



◇ 휴전…참전용사들의 복지향상에 주력

휴전 소식을 접한 정 옹은 담담했다. 총성이 멎었을 뿐 부대정비와 복구사업 등으로 정신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3년 후인 1956년 5월 중위로 제대했다.

제대 이후 사업을 시작했으며, 지난 2009년부터는 6·25참전용사 시흥시지회장을 맡으며 회원들의 복지 및 권익향상을 위해 힘쓰고 있다.

정 옹과 시흥시지회 회원들은 1년에 두 차례씩 안보의식 강화 및 회원 상호간의 결속과 단합을 굳건히 하기 위한 전적지 순례를 다니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제대로된 역사교육을 통해 6·25 전쟁에 대해 정확한 인식만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것이 정 옹과 시흥시지회 회원들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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