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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 매설해 인민군 초토화 연이어 승전보 울린 주인공

 

1948년 가을. 최한성(86) 옹은 안성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던 평범한 스무살 청년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최 옹은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골목 한 켠에 주민들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최 옹은 그곳에서 낯선 얘기를 들었다. 바로 공산주의 정권·사상의 내용을 담은 이념교육이다. 그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 이념교육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순간, 겁이난 최 옹은 자원입대를 결심했다.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⑮ 최 한 성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1948년 스무살 청년 자원입대
육군 1사단 지리산 공비토벌 임무
6·25 하루 전 인민군 움직임 수상
38선까지 내려와 라이트 비춰
본부에 보고 묵살… 국군 무방비

이튿날 불길한 예감 현실로
인민군에 잡혀 끌려가다 도망
혼성부대 합류 남쪽으로 후퇴
수원 농업고에서 식량 보급 맡기도
적군 공세 8월 국군 낙동강까지 밀려

그해 창설된 1사단 공병대 발령
인민군 최후 방어선 낙동강 침투
아군 사격 피해 엎드려 지뢰 묻어
강 건너온 적군 참혹한 시신으로
수적 열세 대구서도 지뢰공격 성공

이듬해 임진강 도하작전서 총상
1952년 통영 육군병원서 명예제대

現 참전용사 안성시지회장
학교 방문 6·25 바로 알리기 노익장

◇ 1948년 자원입대…공비토벌 임무 착출

1948년 12월 최 옹은 안성 소재 육군 1사단 13연대 1대대 3중대로 입대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 옹은 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임무에 착출됐다.

공비들의 활동이 격화된 1949년 봄, 국군은 군·경합동으로 대대적인 지리산지구 토벌작전을 단행했다.

“농사일만 하다가 총을 들고 공비들을 잡으러 다니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 손으로 공비를 잡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죠.”

공비토벌 임무는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했다.

일부 공비들이 각 지역의 산악지대로 잠적해 그곳에서 현지의 부역자 및 또 다른 공비들과 합세해 새로운 비정규전 조직을 구성해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5개월 후 최 옹은 임진강 지역으로 발령났다. 공비토벌 임무 수행 중 다행히 부상은 없었다. 부대 복귀 후 최 옹은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특별히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최 옹은 개성 송악산 전투 지역으로 발령났다. 송악산은 3·8선 인근으로 당시 1사단 13연대의 주둔지였다.

◇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4일. 보초를 서고 있던 최 옹은 평소와 다른 인민군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인민군 군용짚차 수십대가 38선 바로 앞까지 내려와 남쪽을 향해 한 동안 라이트를 비췄어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죠.”

최 옹은 곧바로 육군 본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인민군측의 기동훈련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최 옹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24일 남·북 대표단 회의가 있었어요. 서대문 형무소에 잡혀 온 조선공산당의 이주하, 김삼룡과 평양형무소에 잡혀 있는 민족주의자 조민식 선생의 포로 교환이 있어서 육군본부측도 단순하게 넘긴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날 포 소리와 함께 6·25전쟁이 발발했다. 최 옹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 당시 최전방에 있던 군인들은 전날 대표단 회의가 진행됐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 감행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국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후퇴한다는 연락병들의 보고와 국군 수백명이 죽었다는 무전이 빗발쳤다.

최 옹은 소대장을 찾아갔다. 소대장 역시 전시 상황을 판단, 남으로 가기 위해 부대원 40여명을 집결시켰다. 소대장은 대대본부에 있는 군용 트럭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소대장이 ‘손들고 나와’라고 명령했는데 다들 가만히 있더군요. 제가 손들고 차를 가지러 내려갔어요.”

대대본부까지는 약 1㎞. 최 옹은 방아쇠와 총구의 간격을 짧게 잡고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인민군 시야에 노출됐다.

“비가 많이 내려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어요. 주위를 둘러 보니 50m 앞에서 인민군이 저를 조준하고 있더군요.”

대대본부로 가는 길목은 이미 인민군들이 차단하고 있었다. 인민군 1개 분대가 최 옹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와 꼼짝 없이 잡힐 수 밖에 없었다. 최 옹은 결국 손을 들고 항복, 포로가 됐다.

인민군은 최 옹과 또 다른 국군 포로들을 잡아 어디론가 향했다. 함께 잡혀온 피난민이 앞쪽에, 국군 포로는 뒤에 섰다. 순간, 피난민 한 명이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민가로 도망쳤다. 최 옹도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민가로 도망쳤다. 다행히 뒤따라 오는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의 눈을 피해 남으로 향하던 최 옹은 혼성부대와 합류했다.

“전쟁중에 본인 소속 부대를 잃은 사람이 오죽 많았겠어요. 이곳 저곳에서 모인 병력들이 뭉쳐져 하나의 혼성부대가 만들어졌죠. 특별한 작전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뭉쳐서 싸우는 수 밖에 없었어요.”

◇ 남(南)으로 남(南)으로…

혼성부대는 일산으로 향했다. 이후 영등포를 지나 양화교에 다다를 때쯤 최 옹은 1사단이 노량진 전투를 맡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최 옹은 1사단으로의 복귀를 희망했지만, 부대 후퇴로 인해 수원에 머물게 됐다. 그리고 수원 농업고에서 보급업무를 맡았다.

“주 임무는 수원과 용인 일대의 전투지역을 찾아가 식량을 보급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차가 없어 용인까지 자전거를 타고 식량을 보급했죠.”

당시 수원과 용인을 잇는 도로는 비포장 도로였다. 최 옹은 자전거를 타고 용인으로 향했다.

“도로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도착해서 열어보면 싣고 온 주먹밥이 모두 뭉게졌어요.”

경기도 지역은 전투가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복병이 숨어 있었다. 인민군들의 항공 공격이다.

인민군 비행기는 아군과 적군 구별 없이 상공에서 마구잡이식으로 포탄을 투하했다. 비행기는 공격 범위가 넒어 지상전 보다 더 위험했다.

“정말 무식하게 공격하더군요. 인민군 주둔지에 포탄이 투하되면 국군은 환호성을 질렀죠.”

하지만 그 해 8월 국군의 후퇴로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1950년 8월. 인민군의 기습공격에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국군의 피해도 커 1사단 13연대는 없어지고 대신 1사단 공병대가 새로 창설됐다. 최 옹은 공병대로 발령났다.

“낙동강에서 막지 못하면 더 이상의 반격은 없었어요. 방어만이 최선의 공격이었죠.”

어느날 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달빛이 환하게 낙동강을 비쳤다. 최 옹은 낙동강 철교 밑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순간, 인민군들이 강을 넘어 침투해 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달빛이 굉장히 환해 인민군들이 침투하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 보였어요. 수백 명은 족히 넘어 보였어요.”

당시 낙동강 강물은 메말라 수위가 깊지 않았다. 가장 깊은 곳이 목부분에 그쳤다. 인민군들은 총을 머리위에 지고 낙동강을 건너왔다.

최 옹과 1개 소대는 곧바로 지뢰 매설 작업을 시작했다.

순간,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갔다.

“뒤에 있던 아군들이 인민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개시했어요. 고개를 들면 곧바로 아군의 총에 맞아 사망인 상황이었죠. 겁먹을 틈도 없이 바짝 엎드려 지뢰를 매설했어요.”

지뢰 매설 후 몸을 숨긴지 얼마나 지났을까. 강을 건넌 인민군들이 지뢰를 밟자 여기 저기서 폭팔음이 울렸다. 그날 밤. 인민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지뢰를 묻은 곳에 나가보니 인민군 시신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어요. 팔, 다리가 잘린 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에요. 참혹했죠.”

낙동강에서 승전보를 울린 공병대는 대구 가산(山)으로 향했다.

최 옹과 부대원들은 대구에서도 낙동강에서 사용했던 지뢰 매설 공격을 개시했다. 수적(數的)으로 국군이 밀리기 때문에 육박전과 기습전은 통하지 않았다.

최 옹과 부대원들은 인민군들이 넘어오는 길목에 지뢰를 매설했다.

잠시 뒤, 멀리서 인민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민군들은 곧바로 공격을 하지 않고 혹시 모를 역공을 대비해 주변 지형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뒤, 멀리 서 있던 한 인민군 병사가 꿩 울음소리를 냈다.

“꿩 울음소리를 내더니 옆에서 개 짖는 소리를 내는 거에요. 얼마 있다가 또 다시 닭 울음 소리를 내더라구요.”

최 옹이 들은 소리는 인민군들의 공격 개시 암호였다.

닭 우는 소리가 그치자 인민군 수백명이 돌격해왔다. 하지만 미리 매설한 지뢰로 인민군들은 초토화 됐다. 현장은 시체로 가득했고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대구에서도 승전보를 올린 최 옹과 부대원들은 이후 1·4후퇴를 겪고, 1951년 8월 임진강 도하작전에 파견됐다.

최 옹은 도하작전에서 적의 총에 맞아 마산 26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마산 26육군병원에서 치료 중 병상이 모자라 다시 통영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리고 1952년 7월 그곳에서 명예제대를 하고, 1953년 2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 현재

“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피하면 죽는다.”

여든을 훌쩍 넘긴 최 옹은 지금도 가슴 한 켠에 전장에서 한 상사가 남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 옹은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6·25참전용사 안성시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1990년 16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안성시지회는 한 때 회원수가 900명을 넘었지만, 현재는 400명만이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최 옹과 지회 회원들은 시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기적으로 정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최 옹은 이와 별도로 ‘6·25바로알리기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 4개의 인근 초·중학교를 방문,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6·25의 역사적 의의를 알리는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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