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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추홀’ 자긍심, 동북아 중심도시로 이어간다

 

백제 옛 도읍지 ‘미추홀’
고려 태종 때 인천군 명칭
‘7대 어향’ 자긍심 높던 곳
문학산 인근 인천 문화 태동지

인천향교 1398년 중수
지금도 매년 춘추 석전대제

세조대 도호부 승격
관아 인천도호부청사 일부 보존
객사·동헌·공수 등 7동 복원

전쟁·무분별한 도시개발 등
문화유산 파괴… 아쉬움 남아

2014인천AG개최·GCF유치
수도권 변방에서 주역으로


인천의 뿌리와 문화유산

인천사람들은 인천을 백제의 옛 도읍지 ‘미추홀(彌鄒笏)’이라 생각하고 있다.

주몽의 아들 비류(沸流)의 백제 건국무대가 ‘비류 미추홀’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추홀의 규모는 문학산 주변과 동쪽으로 인천의 진산인 소래산까지, 서쪽으로 영종도까지 포함하는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현재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있는 문학산성(文鶴山城)이 비류의 옛 성이며, 성안에 비류정(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미추홀부터 이어져오는 인천의 역사와 소중한 유물들을 들여다 봤다.

7대 어향… 인천의 자존심과 긍지

고려 인종 때 인천은 인주(仁州)로 승격됐고, 공양왕 2년(1390)에는 경원부로 승격됐다.

태종 13년(1413)에는 인천군이란 명칭을 갖게 됐으며, 세조에 이르러 인천도호부로 승격됐다.

고려사 지리지에 인천은 본래 고구려때 매소홀현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때 소성현이 됐다.

숙종조(1096~1105)에 이르러 경원군으로 승격됐다. 이는 숙종 모후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시대 문종~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80여년간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으로서 경원(慶源)이라 했다.

7대 어향(御鄕)이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한 지역이었다.

문학산 인근 지역은 인천의 역사와 문화의 태동지로서 정체성을 갖고 싶어 하는 시민의 소망과 희망과 자긍심이 얽혀있는 곳이다.

일제시대 당시 문학산 인근은 인천부 부내면(府內面)으로 불리었다.

 


인천향교

인천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학교조’에 의하면 조선시대 1398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학후묘(前學講廟) 형식으로 조성된 곳이다.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수 없으나 1398년 중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 군현에 설립된 국립초·중등학교 관학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 유교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기에 학교에서 이뤄지는 모든 수업은 4서5경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18현 위패를 모신 동서무 배향 건물과, 윤리를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의 배움 공간 동서재(東西齋)강학 건물로 구성돼 있다.

지금도 인천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기리는 춘추 석전대제를 매년 지내고 있다.

학산서원

1702년(숙종 28년) 인천의 선비 이정빈(李廷賓) 등이 국왕에게 상소해 인천부사를 지낸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는 서원의 건립을 청원했다.

그러나 흉년으로 건립이 지연되다가 1708년에 이르러 완공돼 숙종이 ‘학산(鶴山)’이라는 액호를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1786년(정조 10년)에 인천부사를 역임한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를 추가 배향했으나, 1871년(고종 8년) 단행된 서원 철폐령에 따라 혁파됐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학산 방면 고적 전설 조사’에서 그 터가 확인됐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 표석을 세웠으나 방치돼 2002년 개통된 문학터널 건설 공사에 의해 유적 자체가 훼손됐다.

현재 문학터널 동쪽 등산로 초입에 2004년 인천시 남구와 학산문화원이 건립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모지 고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이 부평의 별리현(別離峴)을 넘고 또 이 고개를 넘어서 서해안의 능허대(凌虛臺)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사신을 배웅하는 가족, 친지들이 별리현에서 이별을 나눴다.

거기서도 헤어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 고개까지 따라와서 멀어져가는 사신들을 크게 세 번 외쳐 불렀다고 해서 ‘삼호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이 고개만 넘어서면 울창한 숲이라 멀어져 가는 사신들의 자취가 영영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못내 그리워 사모한 고개(思慕之峴)라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학익지석묘(鶴翼支石墓,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4호)와 남구 숭의동의 주안지석묘(朱安支石墓)가 있으며, 이것들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다.

문학교정의 인천도호부 청사

인천도호부는 이 지역에 있던 지방행정기구로 종3품 부사가 고을수령이었다.

원래는 부근에 있는 부평도호부가 한강 이남 강서지역을 관장했기 때문에 큰 고을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조의 비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이었던 까닭에 세조대에 도호부로 승격됐다,

관아 보수 당시, 지붕의 기와에서 발견된 명문에 강희 16년이라는 명문을 통해 숙종 3년(1677)에 수리했음을 추정하고 있다.

‘인천부승호기(仁川府陞號記)’에 1424년 이미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전에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인천도호부는 당초 왕권의 상징인 객사(客舍)를 비롯해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다.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돼 있다.

지금 현재 복원된 건물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 동헌, 공수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그 외에도 원도사 제의라는게 있었으며, 지금 용현5동이 원래 조선시대에 원도(猿島)라 불리던 낙섬 지역이다.

서해, 남해, 동해를 대표하는 각 지역의 수령이 임금을 대신해 국가의 안녕과 풍농, 풍어, 무액, 무병을 기원하는 행사를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해안에서는 원도사 제의라 해 인천도호부사가 주관이 됐다.

제사를 지낸 이후 농민과 어민이 청황패로 나뉘어 놀이를 지냈으며 이때 지냈던 놀이 행사가 청황패 놀이라 전하고 있다.

최초의 이야기들

인천은 개화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며, 세계 각국의 조계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최초’라고 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애관극장은 우리나라 신극사에도 기록될 만큼 그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곳이다.

1895년 현 애관극장의 전신(前身)인 신식 공연장 ‘협률사(協律舍)’는 우리의 힘으로 세운 최초의 신식 공연장이었다.

개항기에 철도, 야구, 커피, 전기, 전신 등의 서구 문물이 최초로 들어왔으며, 제물포항구는 돈과 사람으로 넘쳐났다.

월미도와 송도에 당시 수도권 최고의 리조트 시설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과거 유산 역사의 소멸의 안타까움

문학산 인근에는 능허대, 대진, 삼호지 고개등 유서 깊은 지역이 있으며 이곳은 삼국시대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통로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개성이 넘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인천에도 수많은 자기의 흔적들이 남았을 가능성이 많았다.

이토록 중요한 문학산 인근 대중국 해상통로 지역에 삼국항쟁과 관계된 유물, 유적이 인천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도천현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십제고도 문학산성(十濟古都 文鶴山城)’ 표지석과 ‘문학산성동문(文鶴山城 東門)’ 표지석은 1960년대 군부대 조성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산업발전을 위한 무분별한 매립과 개발로 인해 반만년 역사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6·25 전쟁, 1960년대 미군기지 등 군부대 건설로 파괴됐다.

또 물자수송과 생산기지로 전락하게 된 인천은 전국의 노동자와 이주민들의 집결로 인해 토착성이 무너지고 정체성 손실까지 겪게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급속한 도시화는 역사를 잃어버리고 공해도시로서 인천 이미지만을 남겨 놓았다.

원인천 지역의 쇠퇴

1883년 개항을 시작으로 인천과 부평은 급격한 변모를 겪게 된다.

제물포 개항장 인근에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해 새로운 행정, 감찰, 사법등 업무가 감리서에서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문학도호부 중심 원인천 지역과 계양산을 중심으로 했던 부평도호부 지역은 쇠락하게 됐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쇠락은 더욱 가속화됐으며, 제물포 일대의 신흥인천이 번성하면서 원인천의 토착 세력은 완전히 와해된다.

제2의 도약을 꿈꾸며…

현재 인천은 자기의 뿌리와 정체성을 역사 속에서 찾으려고 해도 문헌을 통한 추측에 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프고 쓰라린 인천의 역사는 이제부터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수도권의 변방으로 뒤쳐지던 인천이 지난날의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는 역량 있는 도시, 녹색기후기금 GCF를 유치한 도시 송도, 세계 최고의 관문으로 인천공항을 안고 있는 영종 신도시가 있다.

인구 300만의 거대 도시로서 성장하면서 ‘제1광역시 경제수도 인천’이 되기 위해 시민 모두가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인천=윤용해기자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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