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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7개월 ‘거리의 교사’… 아이들 위한 제도·정책 배웠다

 

인천시교육감 당선자

이 청 연, 그가 걸어온 길

 

 


교실 바람만으론 학교 변화 너무 더뎌
교육 현실 벽 넘고자 교육의원 활동도
자원봉사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깨우침
인성공동체 바람 교육감 당선 꽃피워

 


 

 


전교조 활동으로 4년 7개월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던 이청연 당선자. 충남 예산 출신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챙기기를 좋아했던 골목대장, 교육현장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투쟁도, 설득도, 의정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청연. 소외되고 차별받는 아이들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고민하고, 단 한명의 학생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그간의 모든 시간과 경험이 인천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인성공동체’를 만들기를 바라며 그의 이야기를 실었다.



■ 사과향기 그윽한 예산 골목대장 시절

이청연 교육감 당선자는 충남 예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흔히들 충청도 사람을 ‘우직한 놈’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가 그렇다. 그는 오지랖도 넓다. 그래서 어린 시절 그는 항상 주변에 친구들로 넘쳐났다. 기를 못 펴는 친구, 외롭게 제외되는 친구 등 이놈 저놈 다 챙겨야 직속이 풀리는 ‘골목대장’이었다.

그렇게 잘 놀고도 다행히 공부도 그럭저럭했다. 없는 살림에 홍성으로 중학교 진학을 했다. 사람 좋기만 하고 부양능력은 좀 모자랐던 부친을 대신해 형님이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던 유년시절이었다. 성인이 돼 고향에 내려갈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뭘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빨간 홍옥을 한 소쿠리 내오곤 했다.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이 나면 사과 향기가 절로 난다고 한다.

 



■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없는 살림에 홍성까지 ‘유학’을 갔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가도를 달려줬으면 좋았으련만,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고등학교에서의 그는 역시 그 다웠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정신이 팔려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시절 함께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은 여전히 그가 무엇을 하든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는 든든한 지원군들이다. 2010년,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도 캠프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사무장은 그 시절 친구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시기를 통틀어 그가 가장 잘했던 일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친구들의 어려움에 함께 나서는 것이었다. 덕분에 재수 끝에 인천교대에 진학을 했다. 교사가 돼 그 일을 평생에 걸친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 열정 하나를 무기로 시작했던 교직생활

교사 적체 현상으로 교대를 졸업하고 나서 1년 반이 지난 1976년 6월에야 첫 발령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개월 만의 일이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교단에 서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은 지금도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첫 부임지인 경기도 연천은 농촌마을이라 시골 촌놈에게는 고향처럼 편한 곳이었다. 방과 후 아이들 웅변지도를 담당하는 등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의욕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당시 학교는 병영식 학교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인가 보다는 생각이 컸다. 대신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아이들과 교직에 있던 기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했던 학급문집 만들기, 어린이날 편지쓰기 같은 것은 교직생활 초기에 시작한 일들이다. 지금도 그 시절의 문집을 들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면, 교사생활을 헛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 전교조,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

교육현장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목격할 기회는 정말 뜻하지 않게 사소한 계기를 통해 찾아왔다. 6월 민주화대투쟁에 이은 노동자대투쟁으로 전국 곳곳이 들썩거리던 1987년 9월, 주안5동 성당에서 뜻있는 교사들과의 모임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학교현장을 바꾸려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1989년 교육현장의 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전교조가 설립됐고, 그는 주저 없이 그 일원이 됐다.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이던 교사 1천500명이 대량 해고된 그 해, 그도 해고를 피할 수 없었다. 1994년 복직될 때까지 4년 7개월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다. 2001년에는 전교조 인천지부장직을 맡았고, 교육위원에 당선돼 교단을 떠나기 전까지 전교조는 항상 그의 활동의 뿌리였다.



 

■ 학교를 넘어선 새로운 도전, 교육의원 활동

다시 한 번 그에게 도전과 결단의 시기가 왔다. 교실에서 일으키는 바람만으로는 학교의 변화가 너무 더디다는 공감대가 전교조를 비롯해 동료교사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2006년, 결국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교직을 떠나겠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교육현실 앞에 놓인 거대한 벽을 한번 넘어보자고 결심했다.

남동구와 연수구 학생들의 학부모들에 의해 교육의원에 선출됐다. 총 9명의 교육의원 가운데 그를 포함해 평교사 출신은 2명밖에 없어 의정활동은 하루하루가 희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다행인 것은 교직생활 기간 동안 몸에 배었던 아이들, 동료들과 소통하는 자세 덕에 공무원들과도 눈높이를 맞춘 대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또 교육의원 활동을 통해 소외되고 차별받는 아이들을 위한 제도와 정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 학교와 지역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배운 자원봉사센터 활동

그의 인생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인천시 자원봉사센터 회장으로 활동한 지난 3년의 시간이다. 지금까지 25년을 ‘교육현장’에서 살아왔다면, 자원봉사센터 활동은 시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경험이었다.

자원봉사는 원래는 시청, 구청, 교육청 등과 같은 공공기관의 책임영역에서 나타나는 공백을 민간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메우는 것이다. 그만큼 공공기관들이 무엇을 잘못 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만을 강요하는 교육현실에서 어떻게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인성을 키워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이 됐다. 그리고 이 모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과 깨우침’이 지금의 이청연을 만들어 냈다.

/인천=이범수기자 l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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