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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지에서 ‘낭만의 언덕’으로… 옛 화가들 숨결을 느껴보자

 

 

12세기 전 성지 순례지였던 순교당,

프랑스 초대 주교 ‘생 드니’ 신부가

가톨릭 전파하다 순교한 곳에 세워져



정상에 솟아있는 성심 성당 정면에

‘생 루이’‘잔 다르크’ 청동동상 눈길



떼르트르 광장의 수많은 그림 ‘눈 호강’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라뺑 아질’‘물랭 드 라 갈레트’ 보며

100년 전의 낭만 그려볼 수 있어

오는 2016년은 한국과 프랑스가 수교를 맺은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과 프랑스는 수교 130주년을 계기로 양국 국민 간 상호 이해와 우의가 더욱 높아질 수 있도록 2015~2016년을 ‘상호교류의 해’로 정하고 관련 행사를 진행 중이다.

양국은 올해 9월부터 내년 8월까지 프랑스 내에서 ‘한국의 해’를, 2016년 한 해 동안 한국 내에서 ‘프랑스의 해’를 지정했다.

한국과 프랑스는 1886년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올해까지 129년간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의 첫 접촉은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발생한 ‘병인양요’라는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줄곧 우호 관계를 맺어왔다.

프랑스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와 공수부대 출신 등으로 구성된 지상군 3천400여 명을 한국에 파병해 262명이 전사하고 1천8명이 부상했다.

프랑스는 미국, 일본과 함께 우리나라에 원자력 발전소 관련 기술을 전수했으며 고속열차 KTX도 프랑스 알스톰사가 제작한 TGV를 기본으로 설계·제작한 것이다.

본지는 2015년과 2016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프랑스에서 23년 간 생활해 온 현지 테마여행가의 글과 사진을 통해 한달에 한 번 프랑스 명소는 물론 그에 대한 문화와 역사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과 130년간 돈독한 우정을 이어 갈 프랑스에 대해 보다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편집자 주>



 

 

 

테마여행가가 들려주는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

몽마르트르 언덕은 속세의 형식적인 삶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들의 고향이었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있는 낭만의 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 곳은 역사적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했거나 갈로 로마 시대부터 신전을 모시던 장소였다.

해발 130m의 낮은 구릉이지만 사방 100㎞ 안에 이보다 높은 산이 없어 현지인들에게는 산으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이 곳은 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던 곳으로, 프랑스 초대 주교인 ‘생 드니(Saint Denis)’ 신부가 가톨릭을 전파하다가 부 주교 두 명과 함께 순교했다.

Mont(산)과 Martyre(순교자) 두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Montmartre’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생 드니 신부는 잘린 자신의 목을 들고 6㎞를 북쪽으로 올라가서 죽는데, 그 자리에는 프랑스의 왕과 왕비들이 묻히는 곳으로 세계 최초로 고딕양식이 시작된 ‘생 드니 성당’이 세워졌고, 12~13세기에는 전 유럽의 성지 순례자들이 순례하기도 했다.



◇순교당(Martyrium)

생 드니 신부는 언덕을 오르기 전에 조그만 ‘Yvonne Le Tac’ 길의 11번지에서 목이 잘렸고, 9세기에 한 신부에 의해 전설이 알려지면서 순교당이 세워진다.

1096년 성지 순례지로 지정받은 순교당은 백년전쟁 당시에 미치광이가 돼 쓸쓸히 생을 마감한 ‘샤를르 6세(Charles VI)’가 종교의 힘으로 이성을 되찾고자 순례를 했던 장소이다.

1611년에 순교당 건물 지하에 납골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옛날의 본래 지하 묘소가 발견되면서 더욱 순례지로 중요성을 인정 받게 되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매년 이곳까지 순례를 하고 있다. 파리의 주교는 주교전을 거행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생 드니 신부의 순교를 추모하는 미사를 거행한다.

정작 ‘몽마르트르 언덕’의 낭만과 명성 때문에 이 언덕을 꼭 올라가서 화가들의 광장, 성심 성당과 거리의 예술가들을 보고, 바가지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낭만을 이야기하고 프랑스 문화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이 언덕의 유래가 되고 12세기 전 유럽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지 순례지였던 순교당은 관광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성심 성당(Basilique du Sacre Coeur)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성심 성당은 프랑스에 거의 유일한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호국적인 성격을 띄고 건설됐다.

1870년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가 전쟁에 승리하고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하지만, 파리 시민들이 승복하지 않고 171문의 대포를 끌고 몽마르트르를 점령해 최후까지 항쟁했다.

이런 시민군들을 기념하고, 프랑스의 번영과 안녕을 염원하는 의미로 성도 40만 명이 보낸 성금으로 완공한 건축물이 성심 성당이다.

1876년 건축가인 ‘아바디(Abadie)’가 착공해 1914년에 완공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축성식은 1919년에 가졌다. 프랑스 남부 지방의 ‘뻬리그(Perigueux)’ 도시의 ‘생 프롱(Saint Front)’ 성당을 모방해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돼 있다.

정면에 두개의 청동 동상은 프랑스에 가톨릭을 장려하고 신실한 신자였던 루이 9세인 ‘생 루이(Saint Louis)’의 동상과 백년 전쟁 당시에 ‘샤를르 7세’를 도와 영국군과 싸웠던 ‘잔 다르크’의 동상이다.

지상의 권세를 가진 생 루이 왕은 칼날이 땅을 향해 있고, 하늘의 권세를 받았던 쟌 다르크의 칼날은 하늘을 향해 있다. 내부에는 길 잃은 어린 양들을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예수님의 천정화가 특이하다.

◇수녀원(Abbaye de Montmartre)

1133년 ‘루이 6세’ 때에 건설 된 수녀원은 몽마르트르 전체를 차지하고 야채 밭과 포도밭을 갖고 있으며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던 곳이었지만, 대혁명 때 수녀 원장이 처형되면서 국가로 귀속되고 지금은 조그마한 돌 벽돌 집으로 수녀원의 명맥을 잇고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베드로 성당’은 갈로 로마 시대에 건설된 신전 기둥을 사용해 재건축됐고, ‘파리 꼬뮌’ 시절에는 봉제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떼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화가들이 모이는 떼르트르 광장은 루이 14세 때만 하더라도 교수형을 처하는 장소였지만, 현재는 수 많은 식당과 무명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초상화는 60달러 정도 하는데, 동양인의 골격구조를 잘 잡아내지 못하고, 나이보다 젊게 그려 주기 때문에 종종 시비가 붙는다.

정식 화가들은 발 밑에 자세히 보면 10원짜리 만한 동그란 놋쇠가 박혀 있고, 번호가 새겨져 있다.

광장 뒤편에는 초 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는 ‘몽마르트르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에서는 역사와 유래를 배우고,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당시에 가난하고 무명이었던 수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논쟁을 하던 ‘라뺑 아질’을 보고,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풍차가 남아있는 무도 회장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보면서 100년 전의 낭만을 그려볼 수 있다.
 

 

 


◇물랭루즈(Moulin Rouge)

1860년 경 파리 시로 행정구역이 편입됐지만, 성 밖으로 취급돼 술에 부과되는 주세가 낮아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서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물랭루즈.

최초의 카바레인 물랭루즈는 빨간색의 풍차라는 뜻으로, 1889년 문을 열고 지금까지 프렌치 캉캉으로 유명한 카바레다.

화가인 ‘뚤루즈 로트랙(Toulouse Lautrec)’이 남긴 작품들에서 당시의 무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뚤루즈 로트랙은 어릴 적 낙마 사고로 발육이 정지된 상태에서 절망하다가 몽마르트르의 선술집과 카바레에서 방탕과 화려함의 뒷면을 살아있는 필치로 작품을 남긴다.

“작업을 위해 매일 술집에 간다”라고 말하던 그는 술집 여자, 거리의 창녀들의 친구가 돼 스스럼 없이 그들의 생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묘사하게 된다. 물랭루즈의 댄서들을 그린 걸작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세탁선(Le Bateau Lavoir)

무명 시절에 빵 살 돈도 없는 가난한 화가들이 방값이 싼 몽마르트르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떼르트르 광장이 화가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에밀 구도 광장(La Place Emile Goudeau)’에 위치한 세탁선은 버려진 선술집을 개조해 가난한 화가들이 정착해 작업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많은 화가들이 작업해 현대 미술의 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곳을 거쳐 간 화가들 중에는 큐비스트(입체파)의 양대 산맥인 ‘조르쥬 브라크’가 있는데, 너무 가난한 나머지 침대가 하나 놓인 방에서 낮과 밤에 서로 교대로 침대를 이용했다고 한다.

입체파의 주요 인물인 ‘파블로 피카소’도 1904년 세탁선에 정착한다. 피카소는 이 곳에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는 이 시기 절친한 친구인 ‘카사헤마스’가 1901년 실연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우울함을 청색 빛으로 표현하던 ‘청색 시대’의 작품 세계에서, 운명의 연인인 올리비에와의 사랑으로 ‘장미빛 시대’로 작품 세계를 넘기게 된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처녀들’도 이 시절에 완성하게 된다고 한다.

◇활동한 예술가들

몽마르트르는 인상주의의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느와르’, ‘고흐’, ‘고갱’, ‘세잔느’, ‘쇠라’, 입체주의의 ‘피카소’, ‘조르쥬 브라크’, 소설가인 ‘에밀 졸라’, 음악가인 ‘쇼팽’ 등 수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지였다.

유명한 화가로는 기억되지 않았지만,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과 그의 아들인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다.

1865년 리모쥬 근처의 마을에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쉬잔은 서커스단의 곡예사로 자유분방한 여인이었지만, 사고로 서커스를 그만두고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세탁소의 배달원이 돼 화가들의 집을 드나들면서 르느와르나 뚤루즈 로트랙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현재는 수 많은 예술가들이 관광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몽마르트르에서는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계단에 앉아 음악도 들어보고, 연극하는 것을 구경하며, 참새에게 먹이도 주면서 휴식을 취하면 좋다.

하지만 소매치기가 극성이니 조심해야 한다. 이국인들의 사이에서 골목을 거닐면서 정취를 느껴보고, 노천 카페에서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옛 화가들의 숨결을 느껴보기 바란다./정리=김장선기자 kjs76@





 

 

 

>>테마여행가 안완기는…

한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1992년 프랑스로 건너 가 유럽의 건축을 공부했으며, 특히 프랑스의 풍부한 문화와 역사에 빠져 들게 됐다.

그는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해 감상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쉬움만 남기고 돌아서는 수 많은 여행객들을 보면서 프랑스를 제대로 느끼고 배우는 정직하고도 건강한 여행문화를 꿈꿨다.

지난 2003년부터 프랑스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홈페이지(www.algogaza.com)을 제작, 운영해 유용한 프랑스 여행관련 정보 및 자료를 꾸준히 올리고 있다.



<약력>

- 1986년 경희대학교 건축공학과

- 1992년 프랑스 유학

- 1995년 Strasbourg 건축학교 수학

- 1998년 Val-de-Marne Paris 건축학교 수학

- 2002년 프랑스 테마여행 전문 가이드

- 2006년 ‘알고가자 프랑스’ 테마여행사 운영

- 2014년 ㈜OECD 대표부 대외협력부 근무

- 2014년 9월~ ‘알고가자’ VIP여행사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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