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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해미읍성 산책 1

 

 

 

얼마 전 사진전에서 반가운 사진을 하나 만났다. 성곽과 초가지붕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사진 속 문화유산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그 날 빠져들었던 그 곳, 해미읍성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산에 위치해 있는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읍성이다. 읍성은 성 안에 관아와 민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관아와 민가를 둘러싸고 성곽이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 1천800m의 성곽으로 둘러싸여있는 해미읍성은 주출입구인 진남문과 성 중심을 두고 좌우에 동문인 잠양루, 서문인 지성루가 위치해 있다. 성내에는 활터를 포함해 민속가옥과 동헌, 내아, 청허정 등의 건물이 위치해 있다.

‘해미’라는 이름은 정해현과 여미현 두 개의 현을 병합하면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성종 22년에 완성된 해미읍성은 효종 2년에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230여 년 간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

그럼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을 통해 해미읍성으로 들어가보자. 진남문을 통과하기 전 눈여겨보고 갈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문 앞에 세워진 두 기의 비석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군데군데 마모된 것이 근래에 세워진 비석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1849년 세워진 것으로 오른쪽은 해미읍성의 중수비이고 왼쪽은 박환번의 위덕비이다. 박환번은 당시 읍성공사를 담당한 현감으로 위덕비는 그의 위엄과 덕망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중수비에는 공사기간과 함께 공사 중 백성과 관리가 단결하여 공사 중 다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미읍성 공사에는 인근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고을별로 일정 구간의 성벽을 나누어 쌓으면서 성돌에 각 고을명을 새겨 넣었다. 이는 그 구간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여 부실공사를 막았던 공사실명제다.

정문인 진남문 주변에서도 공사실명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공(公)’자이다. 이 ‘공(公)’자는 공주의 ‘공(公)’자이다. 따라서 이 진남문은 공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지었음을 의미한다. 이 글자를 통해 진남문은 예전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이 남문 외에도 해미읍성에는 동문과 서문이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해미읍성 진남문 안쪽 문루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는 ‘황명홍치 4년신해(皇明弘治 四年辛亥)’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말하고 4년 신해는 성종22년(1491)을 의미한다. 이는 성종 22년에 진남문이 완공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남문을 통해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관아를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탱자나무가 빽빽하게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만 이렇게 탱자나무가 있지만 예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성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이라고도 불렀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에는 키 큰 나무가 하나 서 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가지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한 눈에 예사로운 나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넘은 호야나무다. 호야나무는 충청도 사투리로 회화나무를 말한다. 회화나무는 학자나무로 일컬어지며 길상목으로 여겨져 궁궐이나 서원 혹은 명문 양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다. 회화나무는 한 여름 잎이 무성할 때도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남아 있어도 멋진 나무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검은색으로 펼쳐지는 회화나무의 굵고 가는 가지들은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래서 더 발길이 머물게 되는 곳이다. 특히 이곳의 호야나무는 잎이 무성할 때보다도 겨울에 봐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미읍성의 이 호야나무는 길상목의 상징적 의미와는 걸맞지 않게 죽음과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해미읍성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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