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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팔달문의 유래(下)

 

 

 

팔달문의 이름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의하면 ‘팔달산에서 왔으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팔달산’의 이름은 고려학자 이고(李皐, 1341~1420)로 인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조가 ‘팔달문’이라고 이름을 지을 때 이고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정조는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권유에도 출사하지 않은 고려학자들을 기리기 위해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운 적이 있었다. 절개를 끝까지 지킨 고려 충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아버지를 죽게 만든 간신(奸臣)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묻혀있는 수원 즉 정조의 새로운 고향에서 충절(忠節)의 표상 이고(李皐)를 만난 것이다.

이고(李皐)는 1374년(공민왕23) 문과에 급제하고 집의(執義)와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다. 고려말 정치가 혼란해지자 사직하고 수원 광교(光敎)의 남탑산(南塔山)으로 내려와 살았다. ‘화성군읍지(華城郡邑誌, 1899년)’에 의하면, 남탑산으로 내려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는 이고(李皐)에게 고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무엇을 즐기느라 오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그는 “집 뒤 조그마한 산이 들 가운데 있어 사통팔달이고 여기 올라가면 사면을 바라보아도 막힘이 없는데 이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답했다. 또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2) 이고(李皐)를 경기우도(京畿右道, 부평 강화 등 한양의 서쪽 지역)의 안렴사(按廉使, 관찰사)로 삼고자 여러 차례 불렀는데 이에 응하지 않았다’ 벼슬을 사양한 것은 아마도 공양왕에게 답했던 이유와 같다고 본다. “그러자 태조는 이고(李皐)가 사는 곳을 그려 보내라 하였고 이를 본 태조는 크게 칭찬하면서 팔달산이라 명명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일성록(日省錄)에는 수원 유학자 박주양(朴周陽)이 이고의 사원(祠院)을 건립할 것을 요구하는 글을 보면 “이고는 팔달산의 동북쪽 높은 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담장과 초석의 흔적이 보인다. 그는 우물에서 낚시를 즐겨 학사(學士)라 불리였다. 또 동북쪽 냇가(현 수원천)를 거닐길 즐기며 망천(忘川)이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말년에는 산의 동북쪽으로 이주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선행을 권장하자, 그 마을을 권선리(勸善里)라 불리게 되었다”라고 돼있다.

정리하면, 탑산은 팔달산이 긴 막대기 같은 형태로 남·북으로 길고 동·서는 좁아 남쪽에서 보면 석탑처럼 보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왕들이 이고(李皐)를 중용하고자 불렀으나 이고가 이를 고사하면서 핑계로 “산에 오르면 주변에 산이 없어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진짜 이유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탁한 정치가 싫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 나라 왕도 이를 인정했고 태조는 그 산을 팔달산이라고 이름까지 내려 준 것이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살던 권선동이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고 또 지역구의 이름을 권선구(勸善區)라 하고 있다.

정조가 이고를 얼마나 특별히 생각했는지, 을묘년(1795) 수원 행차 시기 특별히 ‘팔달산 주인 처사 이고 묘 치제문(八達山主人處士李墓致祭文)’을 짓고 그의 묘에 참판급를 보내 이를 읽게 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가 영면한 수원을 자신의 고향이라 수차례 언급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원이 빨리 번창한 도시로 거듭나길 바라는 뜻에서 과거시험을 자주 치르고 세금과 이자를 면제하는 등 혜택을 줬다. 이런 대책에도 신읍치는 정조의 기대만큼 빨리 발전하지 못했기에 ‘사통팔달’하라는 의도에서 남문의 이름을 ‘팔달문’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정조는 당파의 권력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평소에 충신을 바랐다. 그런데 아버지가 묻힌 수원에서 생각지 못한 이고(李皐)를 만나자 당시 정적(政敵)들에게 ‘충신은 기억된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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