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계절의 심장 같은 달이다. 민족의 역사적 의미 또한 그렇다. 여름을 거치지 않고 뜨거운 햇볕 속에서 영글지 못한 곡식이나 과일은 단물이 고이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도 숙과가 될 수 없다. 태양 아래의 뭇 생명은 용광로 같은 계절의 불볕 속에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기를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 마음 써 둔 것 같다.
한 가족 삶의 이력도 그렇고 나라의 역사적 궤적도 그런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다. 나는 결코 부유한 가정에서 환영받고 태어난 사람 아니다. 학교생활을 거의 자취하면서 약한 몸으로 보대껴야 했다. 그때 누군가가 네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아이들과 노래하며 살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나는 문학을 만났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눈 뜨게 하려고 창조주께서는 고난의 길을 걷게 하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가발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조숙하다 못해 애늙은이 같은 면도 있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세상의 하늘을 볼 수 있었고 고난의 강을 건너는 동안 또 다른 생명의 초지를 발견했다. 책을 깊이 있게 읽고 글을 정직하게 쓰면서 슬픔을 슬퍼하는 법을 배웠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는 예이츠의 시(詩)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8월의 아침이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소원했던 김구(김창수) 선생이다. 백범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26일 사망 당하고 추도식도 없이 묻히셨다. 선생은 그의 집무실 2층 창가에 앉아서 대한민국 군인 안 누구 총알로 목숨을 잃었다. 백범 선생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주석으로 옹립된 분이다. 그리고 선생은 해방되어 귀국해 그렇게 사랑하던 조국의 군인에게 죽임을 당했는데도 그 이유는 어디에도 밝혀진 바가 없다.
그분이 돌아가실 당시의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1907년에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1910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관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며 꾸준히 야망을 키웠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귀국해 제1대에서 3대까지 대통령을 지내면서 조선 시대 이씨 왕조의 부활을 생각하여 그랬는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밀면서 그의 아들을 양자로까지 삼았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때는 이승만 후보의 지지표가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은 120% 가까이 나왔다. 그 결과 4·19라는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5·16이라는 군사 쿠데타가 터진 뒤 우리나라 역사는 탁하게 흘러만 갔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영구 집권의 꿈을 접고 미국 하와이로 도망치듯 달아나 그곳의 한 줌 흙이 되었을 것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데 조국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내 살아오면서 ‘정의와 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문학의 힘이었다. 그 과정에서 김구 선생을 부모님 같이 우러른 것은 그분 삶을 개인적 행복에 두는 것보다 백성을 우선시하는 그 점이 존경스러워서였다. 일본인들에게 핍박받는 민족의 심장에 청진기를 대고 신음 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그 이미지 때문이었다. 지금 금배지를 찬 의원들, 전공과목 공부 잘하여 고위직에 있는 공직자와 법관들에게서 김구 선생의 측면 모습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2020년 광복절이 있는 8월의 아침 창을 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