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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11] 마로니에의 꿈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② 여배우 이민지

  • 안휘
  • 등록 2020.09.11 05:57:03
  • 16면

 

“김윤희 씨. 일을 잘하시네요. 무대 경험이 많은가 봐요.”

공연이 끝난 다음 날 윤희는 극단 카프카 단원 중 엑스트라급 배우들 네 명과 함께 공연장 정리를 했다. 소품을 박스에 담아 트럭으로 들어 나르고 있을 때 손정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단원이 말을 걸어왔다. 웃을 땐 잇몸이 많이 드러나는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닙니다. 시골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조금 경험했을 뿐이에요.”

“그런데도 무대 철거에 척척 손을 맞추시네요. 눈썰미가 좋으신가 봐요.”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윤희는 웃어 보이며 칭찬에 답례했다.

공연 소품들을 빌딩 지하창고에 다 옮겨 놓았을 때는 오후 두 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사무실 한구석 아크릴 칠판에 씌어있는 공지글이 보였다. 저녁에 쫑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김윤희 씨. 이리 좀 오세요.”

사무실 저쪽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금테 안경을 쓴 여자 단원이었다. 윤희는 여자 단원 앞으로 갔다.

“우리 극단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하는 일이 많아요. 청소나 쓰레기 치우는 일, 탕비실 관리하면서 차를 타내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여자의 음성에서 차가운 느낌이 뚝뚝 흘렀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어요. 신문 잡지를 스크랩하는 일이에요. 우리 극단에 관한 건 물론이고 공연예술, 연예계 뉴스를 스크랩해야 해요. 사무실에 나오는 날은 그것부터 하세요. 아셨죠? 스크랩북은 저기 구석에 있는 캐비닛 속에 들어있어요.”

“네.”

여자는 윤희의 대답엔 관심 없는 듯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커피 한잔 씩 타서 돌리세요.”

 

백두(白頭). 예명이겠지만, 단장의 이름은 그랬다. 윤희는 캐비닛 속에 꽉 들어찬 스크랩북을 차례로 꺼내와서 읽다가 알게 된 단장의 성명을 보고 나서야 언젠가 장시욱 선생이 대단한 연극 연출가라면서 들려준 이름을 기억해냈다. 스크랩 기사들은 대개가 백두 단장에 관한 것이었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다 싶더니 백 단장은 놀라운 이력을 갖고 있었다. 오랜 무명생활을 한 배우였는데, 연출을 시작하면서 각종 상을 휩쓸었고 국내 최고의 연극상을 일곱 번이나 수상한 명감독이었다. 스크랩에서 본 백 단장과 관련된 뉴스들은 찬사 일색이었다. ‘연극에 미친 괴짜’라면서 최고의 명장이라는 극찬을 쏟아낸 르포기사도 있었다. 윤희는 스크랩북을 읽거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을 하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배달돼 온 신문과 잡지들을 읽는 일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동천에서는 좀처럼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뉴스와 온갖 상식들이 탐구심을 자극했다.

 

“오늘 처음으로 우리 극단에 나온 김윤희 양을 소개할게요.”

순대국을 전문으로 하는 골목 음식점이었다. 백두 단장은 단원들이 자리에 모두 앉은 다음에 들어왔다. 백 단장은 사뭇 근엄한 표정이었고, 단원들은 하나같이 그 앞에서 깎듯이 예의를 지키거나 절절매는 모습이었다. 테이블 끝자리에 앉은 윤희 옆으로, 저만큼 앉아 있던 손정우가 건너와서 앉았다. 주로 공연 이야기와 함께 소주잔 건배가 한 바퀴 돌고 났을 무렵 단장 옆에 앉아서 분위기를 잡는 역할을 하던 이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윤희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윤희는 수줍은 얼굴로 한차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이민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러분들 어떠세요? 우리 김윤희 양 참 깜찍하고 예쁘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 맞네, 참 예쁘네 하더니 누군가 박수를 시작하자 덩달아서 손뼉을 쳤다. 뜻밖의 박수 세례를 받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윤희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치듯 말했다.

“입단 신고식부터 해야지! 술 석 잔에 노래를 세 곡 하는 게 우리 극단 신고식의 전통이니까, 자자 김윤희 양, 제1막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축하주부터 한잔하세요!”

연극 ‘화가와 여간호사’에서 화가 역을 맡았던 한상석이라는 이름의 남자배우였다. 누군가 소주를 가득 따른 맥주 컵을 들고 와서 윤희에게 내밀었다. 윤희는 컵을 받아들고 어째야 하나 쩔쩔맸다. 그러자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원샷’을 합창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다들 호기심에 찬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마셨다. 호기심에 한두 번 먹어보긴 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의 술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통과의례라면 피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잔을 기울였다. 절반쯤 마셨을 때는 알코올 기운에 눈물이 찔끔 솟아올랐다. 한참이 걸려서 술을 다 비우자 일동은 또다시 킬킬거리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람도 보였다.

곁에 있던 손정우가 숟가락을 뒤집어 들고 마이크처럼 윤희 손에 들려주었다. 명창 수준이던 어머니를 닮아 윤희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했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노래를 시작했다. 그곳은 또 하나의 연극무대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정을 잡았다. 취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일었다. 하지만 용케 잘 견디며 평소에 좋아하는 팝송 카펜터즈의 ‘클로즈투유(Close to you)’를 불렀다. 일동은 열광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앙코르를 외치고, 박수를 보내며 잘못 찾아왔네, 배우가 아니라 가수를 시켜야겠네 하는 칭찬이 늘어졌다.

“자, 이제 제2막으로 갑니다.”

노래가 끝나자 또다시 소주가 가득 담긴 맥주 컵이 전달돼왔다. 슬쩍 보니, 저만큼에서 백두 단장과 이민지도 한껏 즐거운 표정으로 윤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윤희는 눈을 질끈 감고 두 번째 잔을 마셨다. 이번에는 중간에 눈물만 솟아나는 게 아니라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소주가 울컥 치밀어올라 애를 먹었다. 어머니의 18번 곡이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마지막 소절을 꺾어 넘길 때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좌중은 완전히 환호의 도가니가 됐다. 어린 원숭이 한 마리를 둘러싸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키득거리는 듯한 표정들이 얄밉게 느껴졌다.

“정말 가수네. 이제 마지막 제3막이야.”

이번에는 한상석이 직접 술잔을 들고 윤희에게 와서 어깨를 토닥거리며 내밀었다. 윤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컵을 받아들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떻게 마셨는지 모르게 어찌어찌 다 마셨을 때는 혀의 감각도 마비되고, 취기가 끓어올라 자꾸만 정신이 아뜩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어가며 견뎠다. 그리고는 숨을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였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혀가 좀 꼬였지만, 악착같이 버티고 끝까지 다 불렀다. 쏟아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윤희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그런 단어들이 가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 되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또 한 번 단원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파고들었다. 팔을 붙잡고 부축하고 있는 손정우의 난감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러는 사이에 저만큼에서 이민지가 벌떡 일어나 윤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버티려고 해도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검은 커튼이 뚝 떨어진 듯 시야가 툭 끊어졌다.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지만 되지 않았다. 이윽고 의식마저 스르륵 가라앉고 말았다.

 

=>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윤희가 깨어난 곳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입니다. 그녀에게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음 주 ‘[12] 마로니에의 꿈 -③신데렐라의 집’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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