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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우] 마로니에의 꿈 (12)

안휘의 장편연재소설 ③ 신데렐라의 집

  • 안휘
  • 등록 2020.09.18 06:42:50
  • 16면

 

…“얼굴 좀 펴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미리 투자하는 거야. 너는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이야.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니까 마음 푹 놓고 살아도 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눈을 떴다. 낯선 방이었다. 윤희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커다란 방에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관 같은 숙박업소는 아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덮치듯 엄습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니 창문이 보였다. 얇은 커튼이 쳐진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윤희는 검은색 실크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 옆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 쪽지가 보였다. ‘윤희. 놀라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집안에서 푹 쉬고 있어. 거실 냉장고 열면 마실 것도 있으니까 목마르면 꺼내 먹고. -이민지.’

 

이민지 배우의 집? 비로소 윤희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극단 카프카 회식에서 글라스 잔 가득 소주를 석 잔이나 마셨던 기억이 났다. 쓰러진 나를 이민지가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인가. 창밖으로 다가가 보니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도심 풍경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자동차들이 마치 줄 맞춰서 기어가는 딱정벌레들 같았다. 여기가 몇 층이나 되나, 고층 아파트였다.

 

방문을 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실이 널찍했다. 윤희는 눈치를 살피며 살금살금 거실을 돌아보았다. 방문이 3개 더 보였지만 차마 열어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열 명이 앉아도 넉넉할 것 같은 커다란 연두색 가죽 소파가 있었고, 그 앞 저 만큼에 대형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거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한 책꽂이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대개가 문학 서적이었고, 연극 영화에 관한 책들도 보였다. 목이 탔다. 거실 안쪽 주방 입구에 놓인 처음 보는 커다란 외제 냉장고에서 보리차 물병을 들고나와 식탁 위에 놓인 유리잔에 따라서 마셨다.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훑고 내려갔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소파 쪽으로 와서 앉았다. 거실 한쪽에 놓인 높다란 기둥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파에 누웠다. 또다시 어지럼이 폭포처럼 쏟아지면서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 김윤희 일어났어?”

얼마나 오래 그러고 소파에 누워 있었을까. 잠도 아니고 꿈도 아닌 상태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달깍 들리더니 이민지가 들어서면서 소파 위에 누운 윤희를 발견하고 물었다. 윤희는 깜짝 놀라서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이민지를 바라봤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여긴 내 집이고, 또 우리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긴장 안 해도 돼.”

이민지는 쩔쩔매고 있는 윤희가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 보조 탁자에 놓인 리모콘을 집어 들고 버튼을 눌러 티브이를 켰다. 화면에서는 익숙한 미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민지가 말했다.

“나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거기 소파에서 좀 기다려.”

윤희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희야. 준비됐으면 이제 나가자.”

밥과 된장국, 갈치구이 등 소소한 밥상 앞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마쳤다. 이민지가 먼저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막 세수를 마치고 옷걸이에서 옷을 찾아 입은 윤희에게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반쯤 차지한 듯한 알이 큰 나비 모양의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낯설고 어색한 환경 때문에 윤희는 몸과 마음이 여전히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민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하는데도, 왠지 모를 두려움에 자꾸만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비로소 거기가 17층이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내려갈 때 또 한 번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다. 지하 1층 주차장에 도착하자 이민지는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윤희는 마치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스쳤다. 이민지가 리모컨을 누르자 저 만큼에 서 있던 하얀색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하고 켜졌다. 운전석 문을 연 이민지가 손으로 조수석으로 타라는 시늉을 했다. BMW? 윤희는 영화나 잡지에서 본 듯한 차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는 들릴락 말락 하는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부드럽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차는 머지않아 벽면이 거의 유리로 뒤덮이다시피 한 K 백화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빨려 들어가듯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무얼 하러 가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괜히 물어보았다가는 꾸중을 들을 것 같은 생각이 말을 가로막았다. ‘B3 VIP 출입구’라고 쓰인 문 앞에서 차를 세우자, 유니폼을 입은 빼빼 마른 남자가 다가와 거수경례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민지는 아주 익숙한 듯이 움직였다. 출입구 안으로 들어가면서 슬쩍 돌아보니까, 유니폼 남자가 이민지의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이민지가 비로소 말을 했다.

 

“너 휴대전화 없지?”

“…네.”

“옷 몇 벌 사고, 휴대전화부터 만들어야겠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윤희는 더럭 겁이 났다. 돈을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쇼핑이라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기어이 말을 했다.

“저, 돈 안 가져왔는데요.”

그러자 이민지가 까르륵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는 오른손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윤희를 명품 여성복매장으로 데려간 이민지는 이 옷 저 옷을 입혀가면서 원피스 두 벌과 투피스 한 벌을 골랐다. 그리고는 매장에서 핸드백도 하나, 빨간 구두도 하나 챙겼다. 고급스러운 디자인도 그렇지만 가격표를 슬쩍 들여다보던 윤희는 질려서 오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민지는 그런 윤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이민지가 자기 이름으로 새 휴대전화를 개통하여 윤희에게 넘겨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토탈뷰티샵이라는 간판을 단 미장원이었다. 머리를 박박 민 남자미용사가 거울 앞 의자에 앉은 윤희를 유심히 훑어보며 이민지와 한참 대화를 나누더니 헤어스타일 앨범을 들고 윤희에게 다가와 펼치면서 설명했다. 외모와는 전혀 다른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아가씨, 반가워요. 대단한 미인이세요.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은 이거 같은데, 어떠세요? 괜찮으신가요?”

미용사가 보여주는 사진은 앞머리를 일자로 내리고 양쪽 머리는 웨이브를 살짝 준 귀여워 보이는 단발머리 헤어스타일이었다. 윤희는 고개를 끄덕거려 동의했다.

 

“얼굴 좀 펴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미리 투자하는 거야. 너는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이야.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니까 마음 푹 놓고 살아도 돼.”

미용실을 나올 때는 해가 저물어 있었다. 이민지는 윤희를 양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윤희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밝게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민지가 정색하고 눈까지 흘기면서 말했다.

“징그럽게 선생님이 뭐냐. 그냥 언니라고 불러. 알았지?”

“죄송합니다. …어, 언니라고 부를게요.”

“뭐든지 겁내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나씩 해나가는 거야. 알았지?”

“네.”

 

돌아다니느라고 배가 고픈 탓도 있었겠지만,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 내려오니 쇼핑한 물건들이 모두 승용차 뒷좌석에 놓여 있었다. 이민지는 윤희를 대학로 근처까지 태워다 주었다. 셋방이 있는 골목 앞에서 쇼핑 가방들을 내려준 그녀는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윤희는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이민지가 사라진 큰길 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민지는 윤희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갑니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윤희는 어떻게 적응해갈까요? 다음 주 ‘[13] 마로니에의 꿈 -④누드모델’에서 확인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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